44화
“빠르기도 하구먼. 이제야 알아본 게냐?”
바짓단을 툭툭 턴 그믐이 뒷짐을 지며 대꾸했다.
“야만… 아, 아니 운남의 소수부족들은 영 구분이 안 가는…… 초상화 한 점 본 게 전부라서……. 장문인께서 그토록 신신당부한 이유가 있었… 구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검진에 섞여 있던 중년 사내가 더듬더듬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번 작전의 총 지휘자인 황정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야만족이란 표현은 운남의 소수부족으로, 당연한 듯 내뱉던 하대는 반공대로 바뀌어 있었다.
어딜 감히 미개한 원숭이가 정도를 입에 담느냐고 외쳤던 철면피는 턱이 박살 난 채 한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믐은 돌진 방향을 그자가 있는 쪽으로 잡았고, 입을 잘못 놀린 동문 하나 때문에 주변에 있던 애꿎은 자들까지 신체 한 부분이 바스러진 채 의식을 잃어야만 했다.
‘망설임 없이 진을 돌파하던 그 움직임! 저자는 진의 구조를 꿰고 있다. 그렇다면… 파봉진으로는 안 돼.’
적에 비해 아군이 유리한 점이 무엇인가.
지휘자로서 어떻게든 적을 제압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백이 넘는 적을 앞에 두고도 여유롭기만 한 그믐을 노려보며, 황정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때,
“오! 왔구먼.”
노인의 쾌활한 음성과 함께 점창의 제자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뜨릴 흉맹한 그림자가 사위를 뒤덮었다.
‘괴, 괴수!’
까마귀 떼가 이룩한 검은 돌풍을 홀로 흩어버린 괴조(怪鳥)가 돌아왔다.
웅장하기까지 한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팔뚝 길이의 깃털이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이백사십 명의 검사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인세의 그것 같지 않은 생명체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자, 계속해야지? 나이가 들어서 고거 움직였다고 허리가 뻐근하구먼. 늙은이를 좀 거들어줄 녀석이야. 어둔 날개라고 한다네. 그래 봤자 둘이니까 괜찮지?”
히쭉 웃는 그믐의 말에 황정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저 노인 한 명도 벅찬데 괴수까지…!’
삽시간에 승산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용기와 만용은 엄연히 다른 법.
황정은 자신을 바라보는 점창 제자들의 눈에서 퇴각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패잔병의 기색을 읽었다.
작전에 투입될 때까지만 해도 활활 타오르던 사기는 이미 사그라지고 재만 남아 형체도 찾기 힘들었다.
‘전의가 완전히 꺾였어…….’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 상대는 몰살을 말했고, 이쪽을 모두 죽이려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면 남은 건 후퇴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상대는 둘 뿐이다.
흩어져서 퇴각한다면 모두를 쫓을 수는 없을 거다.
그리고 한 명이라도 많은 이를 살려 보내려면…….
“조장들의 인솔하에 산개하여 퇴각한다! 1조는 나와 함께 남는다!”
적들의 기동력이 월등하다.
모두가 도망친다면 뒤를 잡힐 때마다 희생자가 속출할 터였다.
하지만 누군가가 남아 목숨으로 시간을 번다면, 나머지는 무사히 전권에서 이탈할 수 있다.
그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조장의 선택을 예감하고 있던 1조 검사들이 비장하게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노인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의 판단을 부정했다.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구먼. 어차피 죽을 거라면 칼이라도 제대로 휘두르고 죽는 것이….”
“가라!”
황정이 힘차게 외쳤다.
이게 옳다.
도주하는 자들을 잡을 자신이 없기에 노인이 어설픈 수를 쓰는 게 틀림없었다.
‘나와 1조는 죽겠지만 나머지는 살아나갈 것이고, 저자에 대한 정보를 장문인께…!’
“쯧! 전사답게 죽을 기회를 줘도 미련한 놈들이.”
그믐의 단호한 말이 황정의 생각을 끊었다.
“쳐라. 수리의 눈.”
후아아악―!
산천초목에 깃들었던 그림자들이 일시에 떨쳐 일어선다.
그것은 덫에 걸려 버둥대는 사냥감의 숨통을 끊을 칼날과 같았다.
도주를 위해 사방으로 찢어진 점창 제자들이 목뼈가 부러지고 척추가 끊어진 채 곤두박질쳤다.
적당한 거리만 유지한다면 수식어를 획득한 맹수들의 이목마저 속일 수 있는 검은 수리 전사들이다.
그믐에게 정신이 쏠려있던 점창 제자들은 자신들을 포위하며 다가든 치명적인 그림자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위, 위로! 지형지물에 붙지 마라! 경공으로 뛰어넘어!”
외마디 비명도 남기지 못한 채 와르르 무너져 내린 전열.
후열에서 퇴각을 지휘하던 조장들이 다급히 외쳤다.
“그것도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닌데.”
황정은 이제 그믐의 혼잣말이 숫제 야차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온갖 지형지물에서 유령처럼 솟아오르는 와족 전사들을 피하기 위해 점창의 제자들이 땅을 박찼다.
높은 허공을 점하여 위험 지대를 벗어나려는 그들의 노력을 비웃듯, 체공 상태의 어둔 날개가 부리를 열었다.
“삐이익―!”
그것은 매복한 병사들에게 공격을 명하는 장수의 호령과 같았다.
올빼미라기보다는 독수리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울리고, 숲의 꼭대기에서 운남 푸른 하늘의 주인들이 쏟아져 내렸다.
날개를 펼친 맹금들이 점창 제자들의 급소를 할퀴고, 눈을 쪼았으며, 통째로 낚아채 집어던졌다.
“이, 이걸…!”
지상과 공중의 탈출로가 모두 막힌 이백여 명의 점창 제자들이 허무하게 몸을 누였다.
인간과 짐승이 펼쳐낸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햇볕을 즐기던 숲의 안온함에 짙붉은 혼돈을 덧입혔다.
“그러게 그냥 싸우다 죽는 게 낫대도.”
자신의 오판 때문에 인생을 검 한 자루에 걸었던 무인들이 검 한번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전멸했다.
거보라는 듯 툭툭 던지는 그믐의 말은 악착같이 붙잡고 있던 황정의 이성을 끊기에 충분했다.
“으아아아아!”
그믐에게 돌진하는 황정의 머리 위로 사위를 뒤덮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인간의 심원한 공포를 유발하는 그것은 실성한 듯 내달리는 황정을 낚아채더니 하늘 저 멀리 던져버렸다.
발작적으로 덤벼드는 1조마저 순식간에 삼켜버린 어둠은 그믐의 머리 위로 돌아와 상공을 유유히 맴돌았다.
까마귀 떼를 흩어버린 어둔 날개와 홀로 검진을 부숴버린 그믐.
은신과 암습으로 이백이 넘는 점창의 제자들을 전멸시킨 검은 수리 전사들.
그들이 작은 점으로 보일 만큼 먼 곳에서, 그 모든 광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던 그림자가 자취를 감춘 건 그즈음이었다.
친구
두툼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얼굴을 톡톡 건드렸다.
외부에서 가해진 자극에 잠들었던 육신이 깨어나고, 깨어난 육신은 끊어졌던 정신을 다그쳤다.
심연의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의식이 격렬히 솟구쳐 올라 수면 위로 부상했다.
“컥! 허억…! 쿨룩, 쿨룩!”
동공으로 빛이 들어오고, 자욱이 깔렸던 안개가 걷히듯 뇌가 깨어났다.
눈이 부셨다.
머리는 무거웠다.
그리고…… 턱이 많이 아팠다.
“으윽!”
여규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왼손으로는 턱을, 오른손으로는 머리를 부여잡고서야 간신히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코앞에서 뿌연 물체가 어른거렸다.
흐릿했던 초점이 점차 명료해지며 하나의 상(像)을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아! 일어났다!”
‘누구더라?’
분명히 본 적 있는 얼굴이다.
한데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디서 봤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댓잎처럼 휘청이던 뇌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기 시작했다.
다가드는 얼굴.
차오르는 기억.
그리고… 턱을 울리는 극심한 통증!
“적!”
빠악!
눈앞에 있는 게 적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육신이 본능적인 일격을 쳐냈다.
바람을 가른 주먹이 목표에 깔끔하게 틀어박혔다.
“아악!”
코앞에서 날아든 주먹이다.
아니, 그보다 느닷없이 주먹을 휘두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불시에 턱을 얻어맞은 소년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검!’
밥을 먹건 잠을 자건 검사는 손에서 검을 놓아선 안 된다.
눈앞에 적이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여규가 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없어!’
하긴 검사인 걸 뻔히 아는데 주변에 검을 놓아둘 리 없다.
벌떡 일어선 여규가 주먹을 불끈 쥐고 비척비척 일어서는 소년을 노려봤다.
“어우, 아파……. 야!”
얻어맞은 소년도 한 손으로 턱을 움켜쥔 채 여규를 쏘아봤다.
주먹을 움켜쥔 여규와, 분한 듯 씩씩대는 야만인 소년.
두 아이는 대치한 채 서로를 사납게 노려봤다.
‘검이 없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애써 숨기려 했지만, 여규의 앳된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운남의 토착부족으로 짐작되는 소년은 처음부터 맨손이었다.
사일검을 흘리던 그 움직임.
적은 근접전 박투에 특화된 게 틀림없다.
검을 들고도 패했는데 맨손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규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아까도 말했지만, 싸우기 싫어. 싸우지 말자.”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야만인 소년은 전투 자세까지 풀어버렸다.
‘……진심인가?’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인데 싸우지 말자고?
방금 제대로 한방을 얻어맞기까지 했는데?
‘뭐 하는 놈이지?’
지금까진 너무 경황이 없었다.
여규는 그제야 자신을 눕힌 상대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엄청 크네.’
목소리로 비슷한 또래임을 짐작할 뿐, 야만인 소년의 체구는 다 큰 청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컸다.
늘씬하게 쭉쭉 뻗은 팔다리와 고루 발달한 육체.
탄력 넘치는 근육은 건드리면 손가락이 튕겨져 나올 것만 같았다.
몸 구석구석 안 쓰는 곳이 없다는 증거다.
검을 연마하는 검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의 근육이었다.
‘싸울 생각이… 정말 없는 것 같은데?’
인간 병기 같은 모습을 한 주제에 눈 하나는 놀랍도록 선하다.
바닥이 훤히 비치는 계곡물처럼 맑디맑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 내 검은 어디 있지?”
야만인 소년과 달리 여규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
검의 행방을 물어야만 했다.
“아, 맞다! 위험해서 내가 가지고 있었어.”
야만인 소년이 허리 뒤에 매달아 놓은 검을 꺼내 들었다.
‘위험하다……. 이걸 칭찬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구차하게 핑계 댈 생각은 없다.
자신은 전력을 다하고도 패했다.
그런데 자신을 눕힌 상대에게서 위험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감정의 정체는 뿌듯함이었다.
복잡한 심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여규가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검. 줄 수 있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왜일까?
왜 이런 말이 나온 걸까?
방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상대에게 무기를 달라니!
곧 다시 싸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었다.
“그럼. 당연하지. 네 것이잖아.”
상대의 반응은 더 황당했다.
잠시 멍하게 있던 여규가 불같이 화를 냈다.
“이… 건방진! 검을 돌려줘도 언제든 제압할 자신이 있다는 거냐?! 네가 무인에게 모욕을 주고도…!”
“응? 무슨 말이야? 또 싸울 거야?”
“…….”
“싸우지 말자. 싸워야 할 이유가 없잖아. 자, 여기 네 무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야만인 소년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정말로 검을 쑥 내밀었다.
어서 받으라는 듯이.
여규는 눈앞에서 해맑게 웃는 소년을 어느 쪽으로 구분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적의? 호의?’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 있지만, 여규가 아는 인간의 유형은 단 둘뿐이었다.
적대자와 조력자.
대부분의 인간이 적대적인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가뭄에 콩 나듯 호의적인 사람도 존재하는데, 그건 극히 이례적인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저 공유립처럼.
열네 살 소년의 눈에 비친 인간이란 칼로 자르듯 구분되는 두 부류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구별하기 쉬웠다.
“왜 말이 없어?”
“…….”
야만인 소년은 여규가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분명 적대적인 관계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호의적인 태도로 다가온다.
아버지, 봉검 장로, 그리고 공유립.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인간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아껴주는 세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을 이끌고 도와준다.
그러나 그들과 야만인 소년은 무언가가 달랐다.
“싸울 거 아니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을 조롱하거나 무시할 의도는 없다는 것이다.
순수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를 얼굴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