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더 이상 싸울 기분이 들지 않는다.
희한한 방식으로 맥 빠지게 하는 놈이었다.
“그래. 무인이 패했으니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그제야 상황을 되짚은 여규가 소년을 노려봤다.
“그러고 보니 왜 날 살려둔 거지? 너, 진짜로 날 우습게…!”
“아냐, 아냐! 절대 아냐! 그런 거 아냐!”
야만인 소년이 손사래를 쳤다.
“왜 살려두다니? 그럼 어떻게 해? 죽여?”
“무인끼리의 생사투에서 패했으니 죽어 마땅하지. 실전 결투에서 패하고도 목숨을 건지는 건 치욕적인 일이다.”
“어우~ 살벌한 이야기를 참 쉽게도 하네. 사람은 돕고 지켜야 하는 존재지 다툴 대상이 아냐. 그런 이상한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아버지가 중원에서 생사투를 벌였던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아버지가 맹수로부터 사람들을 구한 이야기를 들었지. 둘 다 들은 거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여규는 이럴 때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누군가와 대화라는 걸 해본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야만인 소년이 그런 부분에선 조금 더 능숙했다.
“진짜로 죽고 싶은 건 아니지? 세상에 맛난 음식과 즐거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 그러고 보니 우리 이름도 모르네. 난 마른 비야.”
느닷없이 다가오는 오른 주먹.
여규가 흠칫 놀라서 어깨를 움찔댔다.
‘……뭐지?’
마른 비는 환히 웃고 있었다.
싸우자는 뜻이 아닌 건 분명하다.
처음 보는 동작이지만 앞뒤 맥락과 눈치로 보아 소수부족 특유의 인사법인 것 같았다.
‘이, 이렇게?’
머뭇거리며 내민 주먹이 마른 비의 주먹과 맞닿았다.
툭!
사람이 주먹을 쥐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
폭력의 대명사인 주먹을 반가움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승화시킨다.
난생처음 해보는 동작이 영 어색했지만, 여규는 묘한 친밀감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여규. 난 여규라 한다.”
“오, 이름이 여규였구나. 반가워, 정말!”
마른 비의 티 없는 웃음에 전염이라도 된 걸까?
딱딱하던 여규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피었다.
열네 살 소년이 몇 년 만에 짓는 미소였다.
“아까의 질문. 당연히 죽고 싶지 않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살려줘서……· 고마워.”
“에이, 사람은 다툴 대상이 아니래도 그러네.”
“그런데 좀 혼란스럽다. 우리 관계는 뭐지?
“음? 그게 무슨 말이야?”
“조력자도 아니고, 적대자도 아니야. 우리 관계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모르겠어.”
“조… 적…… 뭐? 뭐 그리 어려운 말을 써.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간단하잖아.”
“?”
마른 비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씩 웃었다.
“친구지.”
한순간에 여규의 얼굴이 멍해졌다.
‘친구…….’
죽마고우, 막역지우, 관포지교, 문경지우…….
서책에서는 무수히 보았다.
서로의 흉금을 터놓을 만큼 허물없고, 다정하며, 친밀한 벗.
하지만 여규에게 있어 친구란 잡을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뜬구름과 같았다.
아버지인 여휘를 제외하고 자신을 챙겨주는 건 봉검 장로와 공유립 뿐인데, 그들을 친구로 여길 순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자신 또한 다가가지 않았다.
사문의 사형제들조차 이토록 적대적인데, 생판 남이었던 자들이 그런 낭만적인 관계로 묶일 수 있다는 걸 믿기 힘들었다.
여휘가 중원으로 떠난 이후, 여규는 철저한 외톨이였다.
“왜 계속 멍해져?”
마른 비가 수시로 생각에 잠기는 여규를 희한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사문의 울타리 밖에서 마주친 비슷한 또래.
자신이 다짜고짜 공격했음에도 목숨을 빼앗지 않고, 순수한 호의로 다가와 준 상대.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
그제야 여규는 자신이 무척이나 외로웠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 그렇구나. 우린 친구가 된 거구나……. 그런데 친구란 게 그냥 이렇게 되는 거야? 사형제만 해도 입문하는 날 정중히 예를 갖춘 인사로 시작하고, 서책에 나오는 유명한 친구들의 관계도……. 더군다나 우린 무인이니까 뭔가…….”
“어우!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진지해? 그냥 인사 나누고 서로가 마음에 들었으면 된 거야. 뻑 하면 무인이, 무인이…! 아, 근데 무인이 뭐야?”
자신을 일격에 때려눕혀 놓고선 무인이 뭐냐고?
여규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 * *
“뭐 때문에 이러는 거냐.”
헤아릴 수 없는 그림자들이 뒤엉켜 축조된 원시림은 차라리 하나의 성곽과 같았다.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대지가 두 손을 맞잡고, 지겹도록 아득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아 올린 자연의 장벽이었다.
미욱한 인간의 손길이 닿은 건축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출입구가 정해져 있는 그것과 달리 어디로든 오고 갈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자연의 경이가 낳은 또 하나의 기적, 태생적으로 규정지어진 종의 한계를 깨부수고 새로운 무언가가 된 대망(大蟒)은 밀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앞을 가로막은 한 명의 인간 때문이었다.
“사람을 해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밀림 한복판에 강고히 뿌리내린 거목과 같은 존재였다.
우뚝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 수컷 때문에 대망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무 일대 밀림의 제왕인 대망에게도 눈앞의 인간만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와 같았다.
“쉬아아아악!”
무지막지한 위용을 드러내듯 두텁게 발달한 인간 수컷의 가슴팍에는, 과거 자신의 몸 일부를 구성했던 비늘들이 돌돌 말린 채 묶여 있었다.
대체 왜 저런 수고를 들인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그것에는, 자신의 비늘 말고도 기분 나쁜 놈들의 이빨과 발톱 따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마어마한 자연기의 잔흔이 느껴지는 그것들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승산을 점치기 힘든 괴물 같은 놈들도 모조리 이 인간에게 패했다는 뜻이니까.
보나 마나 과거의 자신처럼 인간을 공격했다가 두들겨 맞은 녀석들의 신체 일부가 틀림없었다.
“쉬익, 쉬아악!”
잡념에 사로잡혔던 대망이 본래의 목적을 상기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꿈틀대는 몸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쉬이익- 캬아악!”
얼마 전, 겁대가리를 상실한 인간 놈들이 보금자리를 습격했다.
덤벼든 놈들을 모조리 휘감아 죽였지만, 그사이 우회한 놈들이 새끼들을 납치했다.
이어진 흔적은 명확했고, 이미 인간 소굴 두 개를 거쳐 오는 길이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새끼들이 다리 잘린 도마뱀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새끼들을 해친 게 분명한 인간 놈들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으스러뜨렸다.
다음 흔적이 가리키는 곳도 명확했다.
대망은 혹시 살아 있을지 모를, 납치된 새끼들을 찾아야만 했다.
한데 갑자기 나타난 이 인간이 앞길을 막아선 것이다.
“움직이지 마라. 못 간다.”
“키아아아악!”
먼저 공격하는 놈들은 응징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왜 약속을 어기는 거냐?
인간 놈들이 내 새끼를 납치하고 죽였는데도 가만히 있으란 말이냐!
파충류 특유의 차가운 흉악함.
일반적인 뱀의 그것보다 수십 배는 커서 더욱 끔찍한 대망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들거렸다.
“뱀을 반려수로 둔 전사를 데려올 걸 그랬나. 의사를 알아듣기 힘드니 답답하군.”
너른 하늘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사람을 해친 건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지만… 시작은 네가 한 게 아니었겠지. 대망, 너나 나나 모두 흉계에 말려든 상황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슬슬 움직임이 드러날 때가…… 음?!”
한순간 가늘어졌던 너른 하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서북쪽! 백이십 장(丈)!”
그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울창한 밀림 어딘가를 향했다.
“푸른 누우운!”
“크아아아아앙!”
밀림의 경계를 통째로 찢어발길 듯한 포효가 울려 퍼지고, 수풀 속에 몸을 감췄던 맹수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발산하며 날아올랐다.
‘헛!’
너른 하늘의 가늠은 정확했다.
겹겹이 덮인 활엽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내가 화들짝 놀라 상체를 세웠다.
너른 하늘이 대망과 대치하고 있는 지점과 사내가 은신한 나무 사이의 거리는 정확히 백이십 장이었고, 그 간격은 은신을 제대로 수련해 기척을 지운 누군가의 존재를 알아채기에는 지나치게 먼 거리였다.
최소한 사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통상 중원에서 고수로 분류되는 자들을 미행할 때의 두 배가 넘는 거리를 뒀는데, 걸렸다고?’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럴 때가 아냐. 탈출을!’
발각될 거란 가정은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사내의 반응은 더뎠다.
그리고 그 머뭇거림은 땅을 박찬 푸른 눈이 거리를 좁히기에 차고도 넘치는 시간이었다.
“크허허헝!”
우렁찬 포효와 함께 휘둘러진 앞발이 사내가 숨어있는 거목의 밑동을 때렸다.
성인 남자 세 명이 손을 맞잡아야 할 만큼 두꺼운 나무가 와지끈 비명을 지르며 분질러졌다.
‘미친! 일격에?!’
눈 아래서 꿈틀대는 장대한 동체.
기품 넘치는 주황빛 털은 줄기찬 세월의 침략에 지쳐 색이 바랬지만, 그래서 더 고풍스러웠다.
육중한 몸체를 가로지르는 흑색 줄무늬들이 가련한 사냥감을 움켜쥘 사신의 손톱처럼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움치고 뛸 준비를 마친 사내와 먹이사슬 정점에 위치한 포식자의 눈이 교차했다.
야생의 살기를 담아 마주보기조차 버거운 눈은 네까짓 게 어디로 튈 거냐고 묻는 듯했다.
짙푸른 광망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맹수의 안광이 심혼을 옥죄자, 가지를 박차려던 사내가 자신도 모르게 심장 부근을 와락 움켜쥐었다.
‘대, 대호!’
대호라고 부르는 것조차 실례가 될 법한 크기의 어마어마한 호랑이였다.
호피 수집이 취미인 장문인을 수행하면서 참가했던 경매를 기억한다.
중원 최고의 엽사(獵師) 집단.
실존하기만 했다면 용조차 사냥했을 거라는 저 수천(狩天) 사냥꾼들의 경매에서도 이토록 거대한 호랑이는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저 푸른 눈동자!
귀화(鬼火)를 피워놓은 듯 시퍼렇게 이글거리는 동공이 신비하면서도 두렵게 타오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영물이 분명했다.
‘부딪히면 안 돼. 덤볐다간 무조건 죽는다. 땅으로 내려서서도 안 돼. 나무! 나무를 타고 빠져나간다!’
상대를 가늠한 무인의 본능이다.
단언컨대 대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도주로를 결정한 사내가 무너지는 나무를 밟고 건너편으로 뛰어오른 순간, 장대한 그림자가 사내를 덮쳤다.
“끄아아아악!”
허공에서 짐승에게 다리를 물린 사내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삼십 장 떨어진 나무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자는 덩달아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무지막지한 범의 아가리에 사로잡힌 사내는 지금껏 모든 작전을 함께해온 사형제이자 벗이며, 동료였다.
‘이, 이걸 어떡하면…!’
수면 아래 잠복해 있던 악어가 날아오르는 물새를 집어삼키듯, 대호는 삽시간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동료를 문 채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구할 수 없다!’
저 짐승은 대적 불가능한 존재다.
더군다나 응목대원인 자신들은 적들을 은밀히 관찰한 후 보고하라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동료가 당하더라도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는 게 당연했다.
이를 악문 사내가 혹시 흘러나갈지 모를 기척을 추스르려는 순간, 대호와 눈이 마주쳤다.
‘나, 날 봤어?’
무성한 나뭇잎이 시야를 제한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몸이 차갑게 식을 정도의 소름을 유발하는 푸른 눈동자는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와중에도 정확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타앗!”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
우연이 아닐까, 라는 헛된 기대가 목숨을 앗아가는 법.
눈이 마주치고,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 순간, 고련을 거듭한 사내의 육신이 삶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발각됐다.
그렇다면 한시도 망설여선 안 된다.
찰나를 머뭇거린 동료가 산 채로 사로잡히는 걸 보지 않았나.
저 짐승은 아직 떨어져 내리는 중이고, 동료를 물고 있기까지 하다.
지금! 지금 도망치면 빠져나갈 수 있다!
은신과 경공이야말로 응목대의 특기임을 상기한 사내가 불안감을 떨치며 날아올랐다.
“혼자일 리가 없지. 2인 1조였군.”
사고의 흐름은 거기까지였다.
뻐억!
둔기가 후두부에 작렬하는 불쾌한 소리를 끝으로, 사내는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