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거래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점창파의 영역에 들어왔음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감각은 따라붙은 자가 없다고 말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세상은 넓었고, 자신했던 무공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전사도 아닌 주술사, 그것도 할멈이라 불리는 여자에게 일대 일로 밀릴 줄이야.
동월이 손을 쓰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붙잡힐 뻔했다.
‘그 지경에서도 날 구하다니! 어찌 그렇게 멍청할 수 있단 말이냐! 첫사랑에 대한 미련인가? 큭큭, 우습군. 어쨌든 천만다행이었어…….’
그 미련한 행동이 그녀와 와족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거다.
호국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운남 서남부 끝자락에서 서북부에 위치한 창산까지.
험난한 지형도 마다치 않고 최단거리를 가로지른 호국영의 몰골은 피폐했다.
하지만 주머니에 든 금광석 조각에 손이 닿자 피곤함이 씻은 듯이 가셨다.
잎의 노래에게 당해 불편한 어깨를 주무르며, 호국영이 점창파의 문턱을 넘었다.
* * *
마룡봉의 중턱.
가파른 절벽 끝에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남송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담아낸 고풍스런 전각이 걸려 있었다.
오직 점창의 장문인 한 사람만을 위해 지어진 장문전(掌門殿)은 발아래 굽이치는 구름의 물결을 배경 삼아 도도하게 서 있었다.
“크하하하하!”
황홀하기까지 한 절경이건만 내부에서 터져 나온 경박한 웃음소리가 고즈넉한 미를 퇴색시켰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전각의 주인은 웃음을 그치지 않았고, 흐르는 구름들은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를 안타까워하며 남몰래 한숨지었다.
호국영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장문전을 찾았다.
그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그의 옷은 넝마나 다름없었고 몸의 상태는 그보다 더욱 엉망진창이었다.
왼쪽 어깨는 탈골이 된 건지 축 처져서 덜렁댔고, 퀭한 눈가와 초췌한 낯빛은 곧 쓰러져서 기절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감히 저따위 몰골로 여길 기어들어 와?’
호국영이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공지량은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원시 부족의 여자아이를 만나 정보를 캐내는 간단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저렇게 다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돌덩이를 확인하는 순간, 짜증은 벅찬 희열로 바뀌어 공지량에게 일찍이 느껴본 적 없는 전율을 안겨주었다.
“정녕… 정녕 그게 사실이더냐?”
“예, 장문인.”
당장 엎어져 실신할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호국영의 눈은 또렷하게 빛났다.
득의양양한 눈동자에는 야심이 이글거렸다.
“이럴 수가! 잘했다! 정말 잘했어! 크하하하하!”
호국영이 내놓은 금광석은 소년의 주먹만 한 크기였다.
거기에는 눈으로 또렷이 식별될 정도의 자연금이 함유되어 있었다.
금광석 표면에 드러난 것이 이 정도라면, 그 매장량은 추측을 불허할 게 틀림없다.
영롱한 빛이 선명한 걸로 보아 순도 또한 탁월할 것이다.
공지량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문파의 세를 불리고 강성한 힘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
협의, 단결, 명성, 역사, 전통, 민심…….
다 개소리다.
그런 허울 좋은 것들은 위선자들이 스스로를 포장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금력.
한 마디로 돈이다.
조직의 힘은 결국 탄탄한 자금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정파의 기둥이라는 구파일방, 그리고 오대세가 중 재정적으로 허덕이는 집단이 한 곳이라도 있던가.
알토란 같은 중원의 땅들을 움켜쥔 채 항상 그득한 곳간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겠지.
그러니 그따위 꿈꾸는 소리나 읊조릴 수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공지량은 중원 각지를 차지하고 앉은 유수한 무력 단체들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부아가 치밀었다.
‘이젠 아니야!’
원(元).
칭기즈 카안이란 걸출한 인물이 세운 북방 오랑캐의 제국.
야만인이라 멸시하던 자들의 말발굽 아래 중원이 짓밟힌 지 어언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황성이 있는 대도(大都)까지 뱃길을 열어 서역의 찬란한 문물들을 코앞까지 실어 날랐고, 서역과의 유례없는 활발한 교류를 가능케 했다.
그 과정에서 어느 때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된 품목.
바로 금이었다.
‘하늘이 준 기회다. 금광만 보유할 수 있다면…… 가능해. 내 대에 점창을 천하제일문으로 발돋움시킬 수 있다!’
토지, 보이차, 목재, 가죽, 대리석…….
다 하찮다.
어느 곳도 일개 문파가 금광을 보유한 곳은 없었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정보 유출! 금광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외부로 흘러나가서는 안 된다. 운남이 중원의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롭다지만, 입단속을 확실히 시켜야겠군.’
‘가장 중요한 건 황실에 들키지 않는 것이야. 무림의 세력들과는 협상이든 전쟁이든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황실은…!’
‘와족만 정리하면 된다. 부족 묘라고 하니 절대 내주지 않겠지.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정리했어야 하는 놈들이다. 깔끔히 쓸어버리고 금광을 접수한다.’
공지량은 처음으로 운남에 터를 잡았던 사문의 시조들에게 감사했다.
‘금광의 위치는 운남에서도 최남단. 야만인 놈들을 밀어버리고 극비리에 채굴과 정제를 시작하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다. 유통로의 확보가 문제인데……. 그래, 흑상(黑商)! 어차피 양지에서 풀 수는 없는 노릇이니 흑상과 접촉할 수밖에. 꼬리가 잡히지 않을 단체를 하나 만들어야겠군.’
공지량은 중원의 지하 경제를 쥐고 흔든다는 흑상까지 염두에 두었다.
정파, 그것도 구파일방에 속한 점창이 흑상 같은 암상인들과 접촉하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금광을 독점하기로 한 이상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그들과의 거래가 처음도 아니었다.
‘와족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 이런 천운을 안겨 주는구나!’
공지량은 커다란 줄기를 순식간에 그려냈다.
가지와 잎은 차차 덧붙이면 될 일이다.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든 그의 앞에,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물어온 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가 됐나 보군.’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만 같은 상황에서 호국영은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장문인이 달콤한 미래에 대한 행복한 상상을 끝마칠 때까지.
중간에 끼어드는 건 역효과를 낼 뿐이다.
기쁨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가 그린 장밋빛 미래에 편승하는 것이다.
호국영은 거래를 아는 남자였다.
“아, 이런…….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접하는 바람에 미처 너를 배려치 못했구나. 무척이나 피곤할 터인데. 미안하다.”
공지량은 호국영이 기억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상하고 따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금광은 이미 점창의 것이었다.
“너는 영리한 녀석이니 내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마. 무엇을 원하느냐.”
기다렸던 순간이다.
잠시 입술을 핥은 호국영이 차분히 말했다.
“저 역시 가식 따위 배제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확고한 지위와 흔들리지 않는 명예를 원합니다. 백족 출신인 제가 점창파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 와족을 정리하는 대로 최연소 장로에 취임시켜 주십시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이 정도 머리가 굴러가는 녀석이라면 10년 전부터 시작한 백족의 권한과 직위를 축소하는 작업을 눈치 못 챘을 리 없다.
자신의 앞길에 낀 안개를 걷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호국영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야심 넘치는 녀석이 그 정도로 만족할 리 없지.’
공지량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또?”
“저는 살아남기 위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상계의 일을 해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합니다만, 서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유통. 캐내고 분류하여 걸러낸 금을 정상적인 경로로는 유통하지 못하겠지요. 어떤 방식이 될지까지는 짐작하지 못하지만, 분명 장문인께 복안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유통의 과정을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공지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개인 줄 알았더니…… 늑대였던가.’
야심이 있는 자가 직위를 얻었다면 그다음은 정해진 수순이다.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는 필히 자금이 필요했다.
기껏해야 금광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의 일정 부분을 요구할 줄 알았다.
자신이 과하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의, 지금의 좋은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쉽게 허락을 얻어낼 수 있는 미미한 비율 정도로만.
그것만으로도 개인이 손에 쥐기엔 막대한 금액이다.
점창의 귀퉁이에 자신만의 세력을 구상하기에 차고도 넘치는 자금을 손에 넣는 것이다.
그리고 공지량은 허락하려 했다.
호국영이 세운 공은 그 정도 보상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한데 유통망을 맡겨 달란 말이지.’
생각보다 훨씬 더 야심이 큰 녀석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욱 영리했다.
하지만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범위였다.
그래서 공지량은 허락했다.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나와도 좋네, 지 대주.”
호국영이 문을 나선 후, 고요가 찾아든 집무실의 공기를 음미하던 공지량이 말했다.
입구의 멀쩡한 문설주가 둘로 분리되는 듯 일그러지더니 응목대의 대주 지석인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군.”
공지량이 고요히 웃으며 지석인을 바라봤다.
표정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흘리는 기운에서 못마땅함과 우려 섞인 감정이 진하게 전해져 왔다.
“굉장한 공을 세운 건 맞지만, 보상이 과하다. 그거겠지?”
“네, 장문인. 영리한 놈이지만, 그래서 위험합니다. 호국영, 저 녀석은 장문인이나 문파에 대한 충성심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놈입니다. 오직 자신의 안위와 출세에만 관심이 있죠. 중히 써서는 안 되는 놈입니다.”
“자네 말이 맞네, 지 대주. 그런 녀석이지.”
“하오면…….”
공지량이 빙긋이 웃으며 호피 깔린 교의에 편안히 등을 기댔다.
몇 년 전, 중원을 오가는 수고까지 마다하며 수천 사냥꾼들의 경매에서 낙찰받은 호피는 그야말로 최상품이었다.
외피가 손상된 곳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사냥했기에 더욱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녀석은 여우일세. 처음엔 개인 줄 알았고, 거래를 청할 땐 늑대인가 싶었지만, 대화를 마칠 때 확신이 들더군. 그 녀석은 여우야.”
“동감합니다.”
지석인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자 공지량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영악하지만 그릇이 크지 않아. 원하는 게 어느 정도 충족되면 거기에 머물러 자신의 것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될 녀석이지. 그 이상을 넘보지 않을 걸세. 그랬다간 겨우 손에 넣은 것들을 모조리 잃을 수도 있으니까. 그걸 감수하면서 그 이상을 탐할 그릇이었다면 당장 목을 쳤을 거야. 금광의 비밀을 아는 자가 하나라도 줄어드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이고 말이지.”
구파일방의 장문인이 내뱉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언제든지 제 이익에 따라 등 돌릴 수 있는 놈이라 쳐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듣고 보니 장문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원하는 걸 손에 넣고 나면 그걸 지키기 위해 열성적으로 협조할 녀석이지요.”
“그렇다네. 녀석은 제 능력만으론 장로직에 오를 수 없어. 영리한 만큼 자신의 한계를 잘 알 걸세. 적당한 야심에 적당한 머리. 딱 다루기 좋지.”
“충분히 제어 가능하다, 그 말씀이시군요. 왜 허락하신지 이해했습니다.”
호국영은 오늘 커다란 도박에 성공했다 자평하며, 큰 판돈을 배짱 있게 내건 스스로에게 뿌듯해하며 돌아갔으리라.
하지만 그가 상대했던 자는 농익을 대로 익은 투전꾼이었다.
들고 있는 패는 물론이거니와 머릿속과 인간으로서의 됨됨이까지 낱낱이 읽힌 그가, 더군다나 상대가 철저히 숨기길 바라는 비밀까지 알고 있는 그가, 원하는 액수를 건져서 살아 돌아간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감미로운 미래에 대한 구상과 새로이 얻게 된 장기짝에 대한 감상평을 마친 공지량이 당면한 현실에 눈을 돌렸다.
“지시했던 건 어찌 됐는가, 지 대주. 얼마나 따라붙었지?”
“그게… 운남 곳곳으로 퍼져 나간 데다 생각보다 뒤를 쫓기가 힘들어서……. 현재 6할 정도 파악되었습니다.”
“6할이라……. 생각보다 더디긴 하군.”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 정도로도 미끼 역할론 충분할 거야. ……·한 달 후. 한 달 후가 좋겠군. 그때 시작하게.”
“한 달 후에 말입니까? 8할 이상은 따라붙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야. 지금쯤이면 매복시켜 놓은 삼대 제자들과 야만인 놈들이 맞붙은 결과가 나왔을 걸세. 놈들은 부상자를 수습하는 대로 곧장 이리로 올 거야. 몸을 추스르고 이동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한 달 후가 딱 좋네.”
평소 같으면 바로 명을 받들었을 지석인이 잠시 말을 멈추고 공지량을 바라봤다.
그리고 공지량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틀어졌다.
“깊게 생각할 것 없네. 보나 마나 전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