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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7화 (47/463)

47화

그 단호한 말에 지석인의 침묵이 조금 더 연장됐다.

자신이 간과한 부분이 있는지를 되짚은 그가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장문인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매복조에는 삼대 제자라곤 해도 전투경험이 풍부한 자들이 상당수 속해 있습니다. 더군다나 마을 쪽엔 설검대주가 설검대의 절반을 이끌고 직접 출정을….”

“설검대? 그놈들로는 택도 없네.”

공지량의 음성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를 만난 건 와족과의 충돌 이후였군. 설검대 정도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면 십 년이란 시간을 준비하지도 않았겠지. 그 야만인 놈들은 자네의 상상 이상으로 강해. 설검대보다는 차라리 그 코끼리 무리가 움직였다는 쪽을 기대하는 게 나을 걸세.”

머나먼 창산에서, 전선의 보고가 와 닿기도 전에 공지량은 전투의 결과를 정확히 예견했다.

과거에 직접 목도했던 적들의 힘.

사절단이 보고 온 너른 하늘과 그믐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

그리고 호국영이 겨울 달을 통해 캐낸 피상적인 정보들…….

그것들을 조합하는 것만으로 실상에 가까운 분석을 이끌어 내는 통찰력은 과연 구파의 장문인이란 직위가 아깝지 않았다.

“전멸할 줄 알고 보낸 걸세. 아니, 전멸하라고 보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군.”

지석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십 년간 공들여 키운 무인들이 아닌가.

더욱이 설검대는 설검 장로의 수제자인 정황이 이끄는…….

‘아…!’

그래서인가.

설검 장로의 직속 세력인 설검대를 투입한 것이?

더군다나 설검대주까지 끼워서!

지석인의 명석한 두뇌는 한순간에 감춰진 진실에 도달했다.

“내가 이래서 자네가 좋아. 머리 회전이 굉장히 빠르단 말이지.”

추측이 맞았다.

지석인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공지량을 바라봤다.

‘……무서운 분.’

“설검 장로는… 뛰어나지. 야욕도 커. 외부에서 굴러들어온 주제에 말이야. 그자는 늑대네, 지 대주. 난 여우는 몰라도 늑대를 키울 생각은 없어. 유환이를 위해서도 슬슬 정리할 때가 됐지.”

호국영이 이제 갓 자신의 세력을 꿈꾸는 단계라면, 설검 장로는 이미 자신만의 막강한 세력을 일궜다.

고작 십 년 만에.

아무런 지원도 없이 맨몸으로 말이다.

필히 정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와족과의 전쟁을…….’

장문인은 와족과의 전쟁으로 내외부의 불안요소들을 말끔히 정리할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

항상 옆에 머물며 같은 그림을 그렸지만, 장문인이 잡고 있는 화선지는 자신의 것과는 크기 자체가 달랐다.

“설검대는 전멸할 걸세. 하루아침에 설검대의 절반이 날아가는 꼴이지. 게다가 수제자까지. 설검 장로의 성정으로 보아 보고를 듣는 순간 대로하여 검을 들고 뛰쳐나갈 거야.”

“그분의 성격이라면, 그럴 겁니다.”

“곧 시작될 본 전투에서 누구보다 그가 열심히 싸워주겠지. 전쟁 중에 죽어도 좋고, 살아도 상관없네. 이미 기반은 날아간 상태거든. 다시 세력을 일구기에 그는 너무 늙었어. 이것으로 끝이네.”

“하오면 삼대 제자들은…….”

“아, 그놈들. 내보낸 놈들의 면면을 보게. 물론 아까운 제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말썽을 일으키던 놈들이지. 잔인하거나, 야비하거나, 저속하거나, 약삭빠른 녀석들. 명문 정파에는 어울리지 않는 놈들 아닌가.”

맞는 말이다.

“천하제일문으로 거듭나야 할 점창에 그런 녀석들이 있으면 쓰겠나? 허헛.”

공지량이 안배한 계략을 듣는 내내 지석인은 넘어가지 않는 침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처음부터…… 10년 전부터 이 모든 걸 구상한 거다. 장문인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눈에 띄는 과오만 없다면 닥치는 대로 받아들인 무인들.

물론 정파로 분류되는 자들이지만, 개중엔 정파의 무인이라 불려서는 안 될 자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쓸 목적으로 끌어모은 거였다.

그중 쓸 만한 녀석들을 추리고, 나머진 적의 전력을 탐색하기 위해 내버렸다.

전멸할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피해를 입히면 좋고, 못 입혀도 상관없고.

설검대 절반을 제외하면 실제 주 전력의 손실은 전무했다.

점창의 주력이라고 할 만한 무력 단체와 제자들은 온존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창의 주력’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닿았을 때, 지석인의 영민한 머리는 가장 큰 맹점을 짚어냈다.

“장문인……. 한데 봉검 장로님과 운검 장로님께서 전쟁에 참전하실 리가…….”

봉검과 운검.

그들은 정도라는 대지에 뿌리내린 거목들이다.

한 번도 불의한 길을 걸어본 적이 없는, 정파의 표본과도 같은 인물들인 것이다.

그들은 몇 년째 은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공지량은 그들에게 가는 모든 정보를 차단했다.

철저한 고립으로 그들은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운남 소수부족들의 토지를 강탈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와족에 대한 선공을 계획했단 걸 알게 된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게 문제일세. 지 대주. 두 명의 대 장로 없이는 전쟁이 불가능하지. 누가 뭐래도 점창 최강의 무력 집단은 그들이 이끄는 봉검대와 운검대인 게 사실이니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여휘를 파문시킨다는 자신의 결정에 반대한 순간부터.

점창의 수호자인 그들은 공지량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건드릴 수 없다.

건드려서도 안 된다.

실력, 명망, 세력, 명성, 명분…….

봉검과 운검은 공지량에게 있어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그들이 내 뜻에 따라줬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갈 필요가 없었거늘.’

대 장로들이 전쟁에 찬성할 리 없었고, 그래서 지난한 계획을 준비했다.

그들이 참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만 했다.

“야만인 놈들이 단순 무식하고 경우가 없는 놈들이었으면 훨씬 쉬웠을 거야. 서출이긴 하나 사절로 간 장문인의 둘째 아들이 해를 입었다면, 제아무리 봉검과 운검 장로라도 움직이지 않고는 못 배겼겠지.”

‘그래서 조용히 지내던 유립이를 갑자기 사절단으로…….’

이제는 듣지 않아도 알겠다.

이것 역시 유환이를 차기 장문인으로 올린다는 계획과 맞닿아 있는 거겠지.

혈족 승계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첩의 자식이라도 어쨌든 자식인 이상,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에 이른 게 틀림없다.

그래서 보낸 거다.

잘하면 우환도 제거하고 그토록 바라던 전쟁의 빌미로 써먹을 수 있으니.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아비가 여기에 있었다.

“뜻대로 쉽게 풀리는 일이 없어. 이 모든 게 점창을 위한 일이거늘……. 거의 다 와 가네, 지 대주. 잊지 말게. 한 달일세.”

호국영이 금광석을 들고 방문한 이후, 갑자기, 그리고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지석인은 급격히 피로가 몰려오는 걸 느꼈다.

“한 달 후. 천하는 점창의 비상을 목도하게 될 것이야.”

남들은 어찌 볼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를 호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의 계략이 고즈넉한 전각의 풍경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교류

“우와아아아~!”

저러다 목이 꺾이진 않을까 걱정될 만큼 고개를 뒤로 젖힌 소년이 하늘을 향해 탄성을 내질렀다.

장엄하게 버티고 선 세 개의 건축물이 난생처음 도시에 들어선 소년의 혼을 쏙 빼놓고 있었다.

“대단하지? 대리의 자랑 숭성사삼탑(崇聖寺三塔)이야.”

겨우내 쌓인 눈이 봄을 맞아 녹듯, 항상 딱딱하게 굳어 있던 여규의 마음이 마른 비를 만난 후 풀어져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두드리지 않았던 문 너머에는 너무 외로워서 외로운 줄도 몰랐던 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도 없이 다가와 닫힌 문을 열어젖힌 친구다.

열네 살 소년의 가슴 속에 쌓여있던 사람에 대한 갈망이 마른 비를 향해 주체할 수 없이 뻗어 나갔다.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이렇게 즐거운 거였다니…!’

둘은 여규만의 연무장에 누워 밤을 꼬박 새우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여규는 자신의 또래와 난생처음 허물없는 잡담을 나누는 것이었고, 말문이 터지자 스스로도 놀랄 만큼 쉴 새 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호의로 가득 찬 눈빛이, 나를 향한 호기심이, 그리고 상대를 향한 궁금증이 여규로 하여금 잠을 잊게 했다.

매 순간순간이 신기하면서도 유쾌한 시간이었다.

지칠 만도 하련만 마른 비는 미소 한 번 잃지 않고 깔깔대며 여규가 내미는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어느 순간 지쳐서 곯아떨어진 둘은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마른 비의 부탁에 따라 대리를 구경하러 나온 것이었다.

“와~ 정말 엄청나! 이런 걸 사람이 만들었단 말이야?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아!”

“총 16층이고, 높이는 21장 정도 된대. 퇴토건탑(堆土建塔) 방식으로 지어졌고, 내부에는 대리석을 깎아 만든 불상이….”

“퇴, 뭐? 쉬운 말, 쉬운 말.”

“음. 그러니까…… 한 층 한 층 탑을 올릴 때마다 주위에 같은 높이의 흙을 쌓아서 건축하는 거야. 탑이 완공된 후에 주위의 흙을 치워서 탑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는 거지.”

“저 높이까지 흙을 쌓는다고?! 와~ 엄청 힘들었겠다.”

탑을 쌓기 위해 기울인 노고가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듯 마른 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唐) 대에 건립되었어. 남조국(南诏国) 시기를 지나 대리국 시절에는 불교가 굉장히 발전했대. 그래서 대리국을 불국(佛国), 묘향국(妙香国)이라고 칭하기도 했다더라.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리에 지어진 수많은 건축물 중에서도 숭성사삼탑은 최고야.”

“아, 당. 남조국. 대리국. 흠, 그렇구나.”

모르는 게 분명했다.

천진난만하지만 그만큼 머리가 백지인 친구를 위해 여규가 입을 열려는 순간, 마른 비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근데 불교가 뭐야?”

“부, 불교는…! 야! 너 인간적으로 너무 무식한 거 아니냐?!”

둘은 만난 지 이틀 만에 친근한 면박과 농담까지 주고받을 정도로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놀고들 있네.’

두 소년이 내려다보이는 민가의 처마 밑.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은빛 여우가 투덜댔다.

이틀 전, 숲 속에서 마주친 두 꼬마는 만나자마자 살벌하게 검과 발길질을 주고받았다.

결국 여규라는 점창의 소년이 기절했고, 막 깨어났을 때만 해도 둘은 또 싸울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러던 놈들이 갑자기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친구. 그렇구나. 우린 친구가 된 거구나.’

‘뭐가 그리 복잡해? 인사 나누고 서로가 마음에 들었으면 된 거야!’

은빛 여우는 당시 꼬마들의 대화를 들으며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민망함에 손가락이 오그라들었고, 쑥스러움에 어깨가 굽었다.

등 뒤로 뭔가가 기어가는 것만 같고, 자신도 모르게 몸이 배배 꼬였다.

두 꼬맹이는 낯간지러운 말을 맨정신에 잘도 주고받았다.

‘저 점창 소년은 천치인가?’

이틀 전, 여규를 처음 봤을 때 내놓은 은빛 여우의 인물평이었다.

친구라는 말에 멍해지더니 친구가 되는 의식이니 뭐니 희한한 소리만 해댔다.

생긴 건 똘망똘망한 게 노을이만큼이나 영리해 보이는데,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비아보다도 모자라 보였다.

‘뭐 하는 녀석이지?’

여규라는 소년은 창산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에서 홀로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것부터가 굉장히 특이하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점창파의 제자들은 임무를 수행하거나 특별히 허락받지 않는 이상 자유로이 산외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저 꼬마가 임무를 수행할 리는 없고. 그렇다면 특별히 허락을 받고 여기에서 수련을 한다는 건데…….’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외인이 올 리 없는 점창의 영역이라지만, 그 숲은 마음만 먹으면 행동 하나하나를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형이었다.

듣기론 무인이라고 불리는 한족의 전사들은 영역 내부에 존재하는 연무장이라는 곳에서 단련을 한다고 했다.

연무장이라는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 이유는 그곳에 단련을 위한 여건을 갖춰 놓기 때문이지만, 특정 지역을 정해놓고 방비함으로써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했다.

그만큼 한족 전사들은 단련하는 모습이 노출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한다고 들었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할 싸움 기술들이 새어 나간다나 뭐라나.

마음 내키는 곳 어디서든 자유롭게 단련하는 와족 전사들로서는 듣기만 해도 갑갑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믐 할아범은 ‘쥐뿔도 없는 것들이 괜히 있어 보이려고 깝죽대는 게야.’ 라는 한마디로 그들의 행동 양태를 일축해버렸다.

‘비아를 공격했던 동작들로 봐선 나이에 비해 상당한 녀석인데…….’

봉검 장로는 여휘를 배척하는 문파의 분위기가, 여규가 창산에서 새로운 무공을 수련하는 데 있어 독이 될 것임을 짐작했다.

여규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창산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그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운남에서 감히 점창의 영역에 침입할 간 큰 인간은 없기 때문에 그 선택은 최선이라 할 수 있었다.

여규를 바라보는 은빛 여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뭐 하는 꼬맹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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