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건 그렇고… 설마 저 녀석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나?’
점창과 와족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알고 있다면 저토록 태연하게 친구 관계를 맺을 리 없다.
여규라는 꼬마는 비아와 달리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무관심한 성격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정보에서 소외된 녀석이라는 뜻인데…….’
그런 녀석이 따로 나와서 수련하는 특권을 누린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 수 없는 부분은 일단 제쳐둔다.
은빛여우는 보다 시급하고 현실적인 문제, 마른 비가 점창의 영역 안에 머무는 걸 계속 두고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최근에 확인했던 표식의 내용을 떠올렸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매사에 주의해라.’
그믐이 운남 서남단에 위치한 청죽림에서 운남 전역으로 하달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은빛여우가 다음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정 지역마다 가장 높은 곳에 남기기로 약속된 표식을 통해, 또는 직접 달려간 검은 수리와 흰 수리 전사들을 통해 새로운 내용이 다급하게 더해졌다.
‘곧 전쟁이 시작된다. 아마 마을도 습격을 받을 것이다!’
‘특수한 상황이니 불러들여도 되겠지만, 지금으로선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편이 더 좋다. 성년식 중인 아이들을 깊숙한 곳에 숨겨라.’
‘담당한 아이의 안전이 확보되는 즉시 검은 수리들은 문산으로 집결하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성년식을 떠난 아이들 중에 점창이 있는 대리 쪽으로 거침없이 북진한 꼴통이 있을 거라고는.
그믐조차 마른 비가 방위를 가늠하지 못하는 건 둘째 치고, 도시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기본적인 지침마저 모르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리상 명령의 전파가 늦었고, 북상한 검은 수리 전사가 표식을 남겼을 땐, 마른 비의 흔적을 보고 질겁한 은빛여우는 이미 점창의 영역 안에 따라 들어와 있었다.
추가된 내용을 알았다면 성년식이고 뭐고 간에 당장 마른 비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거다.
그리고 점창의 영역 밖으로 데리고 나가 꽁꽁 숨겼을 거다.
하지만 마른 비의 돌발 행동에 휘말린 은빛여우는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점창의 영역이긴 하지만, 전쟁이 시작된 것도 아니고…… 싸움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와족과 다른 소수부족을 구분하긴 힘들어.’
‘비아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곤란을 겪는다 해도 본인이 감당해야 해. 절대 개입 불가. 변동이 없는 한 지켜본다.’
은빛여우는 한 번도 깨어진 적이 없는 성년식의 원칙을 따르기로 했다.
“마룬 비, 마룬 비.”
와족 고유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던 여규는 이제 마른 비의 이름을 제법 그럴듯하게 부르고 있었다.
“마룬 말고 마른. 발음하기 어렵지? 그냥 건우(亁雨)라고 불러. 한어로 하면 같은 뜻이라며.”
백족 고유의 음식인 이괴(饵块)와 유선(乳扇)을 양손에 쥔 마른 비가 입을 우물거리며 여규를 돌아봤다.
“아냐. 원래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 마룬, 마른. 흠, 발음이 어렵긴 하네.”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이거 너무 맛있어!”
쌀로 만든 피(皮)에 고기, 채소를 다져 넣고 양념을 바른 이괴는 마른 비를 신세계로 이끌었다.
산양 젖을 발효시켜 넓게 펴고 불에 구워낸 유선 또한 씹을수록 감칠맛이 났다.
와족은 사냥을 통해 잡은 고기를 날것 그대로 먹거나 불에 익혀 먹는다.
야채도 산천에 널린 것을 채집하여 그대로 섭취할 뿐, 음식의 맛을 돋우는 향신료는 사용하지 않았다.
맵고, 짜고, 단맛이 어우러지며 혀가 얼얼할 정도의 자극을 주는 음식들은 마른 비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숭성사삼탑보다도 훨씬 더 인상적인 문명의 혜택이었다.
‘어지러울 정도의 건물들과 황홀한 불빛의 거리. 돌을 깎아 만든 성곽들. 하늘 끝까지 쌓아 올린 탑.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과 그걸 거래하는 시장. 그리고 음식.’
대리를 구경하고 돌아온 첫날에, 아니, 처음 대리를 내려다본 순간부터 마른 비는 문명에 매료됐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전승하고 다듬어온 문명의 이기는 호기심 왕성한 소년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을 화인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더 배우고, 더 경험하고 싶어.’
마른 비가 여규를 돌아봤다.
“부탁할 게 있어.”
여규는 먹다 말고 생각에 잠긴 마른 비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래.”
두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문자를 가르쳐 줘.”
“싸우는 법을 알려 줘.”
“문명에 대해 배우고 싶어.”
“강해지고 싶어.”
둘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고, 지금 그 이해가 합치했다.
“나도 강해져야 해. 낮에는 하루 종일 대련을 하자. 그리고 저녁에 시간을 내서 문자를 알려줘.”
“좋아! 그렇게 하자.”
“규야, 근데 너 돌아가지 않아도 돼?”
“괜찮아. 있으나 없으나 나한테는 관심 없거든. 가끔 올라가서 얼굴만 비치면 돼.”
그럴 리 없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고, 봉검 장로에게 외출을 허락받았다 해도 산에 아예 올라가지 않는 건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여규는 올라가기 싫었다.
창산에서 지낸 14년의 시간보다 마른 비와 함께 한 이틀이 훨씬 즐겁고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일검을 단번에 무너뜨린 마른 비의 무력.
사일검을 단련하기에 이보다 좋은 상대는 없었다.
여규는 당분간 친구와 이곳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놀고들 있네.’
지난 2주간 몇 번이나 튀어나온 지 셀 수 없는 은빛여우의 감상평이었다.
그가 은신한 나무 아래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칼과 육신을 주고받는 두 소년이 있었다.
‘비아는 괜찮겠군.’
점창의 영역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문제아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묶여 있었다.
혹시 점창에서 사람이 올까 싶어 자리를 뜨지 못한 것이다.
여규라는 소년의 말이 맞았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외톨이인가? 저 소년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말해준 사람이 없었던 거군.’
와족과 점창의 일을 몰랐던 이유가 이거였다.
묘한 상황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당분간 비아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을 듯했다.
그제야 은빛여우는 마른 비의 돌발 행동 때문에 한동안 보지 못했던 다른 아이를 떠올렸다.
적섬여를 잘못 만졌다가 사경을 헤매고 일어난 후로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마른 비와는 반대 방향으로 갔으니 점창의 영역과는 멀어졌을 거다.
야생에도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였으니 감당 못할 맹수를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별문제는 없을 터였다.
‘무사히 있어라, 비아야. 금방 다녀오마.’
은빛여우가 나무를 박찼다.
* * *
‘제길.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
점창의 영역을 빠져나올 때까지 은밀히 이동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다.
영역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후에는 전력으로 내달렸지만, 대리의 동쪽으로 진로를 잡은 아이는 생각보다 먼 곳까지 가 있었다.
야생에 적응한 만큼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한 게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2주라는 시간은 인간이 남긴 흔적들이 희미해지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은빛여우는 아이를 따라잡기 위해 십여 일을 소비해야만 했다.
‘무정.’
무정(武定)은 대리와 더불어 문명이 개화한 또 하나의 도시인 곤명(昆明)의 서북부에 있는 지역이다.
얼마 전 대리 인근의 보이차 밭을 빼앗긴 하니족 본가가 이주한 지역이기도 했다.
무정에 접근해서야 은빛여우는 아이가 최근에 남긴 흔적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이 근처다.’
풀이 누인 형태로 방향을 가늠했다.
주변 지형지물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애쓴 모양이지만, 은빛여우의 눈을 속이기엔 미숙한 실력이었다.
휘어진 각도와 풀을 내리누른 무게감.
그가 맡은 또 다른 아이인 ‘돌개바람’의 자취가 틀림없었다.
‘나무 위로.’
정신없이 이동하느라 아직 표식을 확인하지 못했다.
한 지역에서 가장 높은 지형이란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광활한 땅에서 오직 한 곳.
게다가 자연현상으로 인해 쉽게 훼손되지 않을 조건을 충족하는 장소는 드물었다.
원래 숙지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면 그 지역 전체를 뒤져봐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 막 임무에 투입되기 시작한 은빛여우가 와족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의 지형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우선 아이에게 달려왔다.
무사함을 확인한 후에 주변 지역을 뒤질 생각으로.
하지만 나무 위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은빛여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피투성이가 된 사람 형체.
다급히 뛰어내린 은빛여우가 풀숲 사이에 쓰러져있는 아이의 맥을 쥐었다.
‘살아 있어!’
식식거리는 숨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했으나 이어지고 있었다.
“돌개바람! 정신 차려라!”
몸을 숨기는 데는 도무지 재능이 없어 은신을 가르치며 혼내기도 많이 혼냈던 아이.
그러나 재빠른 몸놀림으로 차기 나무표범 전사가 될 거라 확실시되던 아이.
자랑하던 두 다리가 잘린 소년이 겨우 눈을 떴다.
“은빛… 여우…… 형?”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은빛여우를 보게 된 돌개바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 눈이 곧 날카로워지며 마지막 힘을 담고 번쩍였다.
“형! 피해요!”
그 순간, 풀숲을 뚫고 무정한 검이 치솟았다.
발현
“으아아아아아!”
꽈앙!
바위 부수기.
산의 전력을 다한 주먹이 거수의 몸체를 때렸다.
“푸익?”
옆으로 붕 떠서 몇 걸음 밀려난 짐승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돌아봤다.
“어…? 야, 이건 너무하잖아?”
“푸르륵!”
아래로부터 올려치는 박치기가 날아든다.
바람이 공간을 가르고, 눈앞으로 철퇴가 지나간 듯 육중한 무게감이 허공에 남았다.
“비켜, 산!”
나무에서 뛰어내린 안개걸음이 다급하게 외쳤다.
쐐새새색!
하늘로부터 내리꽂힌 발차기가 거수의 전신을 두드렸다.
“푸이익!”
소낙비가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
끝도 없이 쏟아내는 발차기는 인간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철갑 같은 피부로 무장한 코뿔소 녀석에게는 귀찮은 모기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했다.
‘치잇! 상성이 안 좋아!’
이렇게 묵직하고 튼튼한 녀석을 상대하는 데는 힘으로 승부하는 산과 같은 유형이 딱이다.
문제는 전력을 다한 산의 일격조차 큰 충격을 주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푸르륵, 푸륵!”
단단히 화가 난 듯 고개를 흔들며 광포한 눈빛을 쏟아내는 짐승.
광서우(狂犀牛).
이 미친 코뿔소 녀석은 자연기까지 활용할 줄 아는 터라 자신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간혹 뿔에 자연기를 응집하고 돌진해올 때면, 일직선 상에 위치한 모든 지형지물이 박살나서 증발한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수식어가 붙은 다른 짐승들에 비해 느리지만 않았다면, 자신들은 벌써 한참 전에 저승 구경을 했을 거다.
‘시간만 끌어라. 우리 중 한 명이 갈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할아범이 왜 이놈을 자신들의 상대로 지목했는지 절절히 이해가 갔다.
“지치지도 않나, 이놈은? 우리야 교대로 싸우고 있지만, 이놈은 혼자서 이틀 내내 날뛰고 있잖아?”
안개걸음이 슬쩍 눈만 돌리며 산에게 푸념했다.
“그러게. 죽겠다, 아주.”
초췌한 얼굴의 산이 겨우 입을 열어 대꾸했다.
“빠져서 좀 쉬어라. 실수하면 그대로 죽어.”
“응. 나 멀찍이 떨어져서 조금 쉬다가 온다.”
이틀 내내 광서우와 싸우며, 주의해야 할 두 가지를 알게 됐다.
첫째는 두말할 것 없이 뿔이고, 둘째는 간혹 튀어나오는 독특한 움직임이다.
주로 돌진 중에 나타나는 그것은 순간적으로 눈이 인지할 수 있는 속도를 넘어서서 단거리를 기동하는 것인데, 그 실체를 깨닫기까지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야만 했다.
‘순간 가속’이라고나 할까.
천천히 움직이다가 갑자기 잡아낼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달려드는 통에 피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여울이가 없었다면 벌써 전멸했을 지도…….’
놀랍게도 광서우가 보이는 움직임의 비밀을 알아낸 것도, 더 이상 크게 다친 사람이 없는 것도 가장 약하다고 생각했던 맑은 여울 덕분이었다.
‘약한 건 맞지. 싸움에는 확실히 재능이 없어. 한데 기이할 정도로 감각이 발달해 있다. 성년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비밀이 이거였군.’
안개걸음이 고목 위에 자리 잡은 여울을 힐끔 쳐다봤다.
지금 여기서 가장 지친 사람을 꼽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녀다.
안개걸음과 산을 필두로 하여 두 패로 나뉜 청년들이 교대로 광서우를 상대하는데 반해, 유일하게 녀석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여울은 이틀간 한숨도 못 자고 전투를 지켜보며 위험을 알려주고 있었다.
퀭하게 패인 눈자위로 그녀의 고됨이 짐작됐다.
하지만 부릅뜬 눈에는 절대로 사상자를 늘리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었다.
‘후우. 어른들이 빨리 오셔야 할 텐데.’
안개걸음이 발을 툭툭 털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때, 광서우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