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어?!”
나무 위에서 광서우를 주시하던 여울은 갑작스레 변화하는 기운을 느꼈다.
미묘한 근육의 움직임.
깊고 묵직한 호흡.
점점 낮아지는 자세.
녀석은 분명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확인을 위해 편안히 흐르게 두었던 자연기를 끌어올렸다.
확실하다!
광서우의 뿔과 다리 쪽으로 급격하게 기운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목표는?
광서우의 시선이 향한 곳.
등을 보인 채 멀어지는 산이 있었다.
‘안 돼!’
걸음이 오빠는?
여울의 눈이 빠르게 아래를 훑었다.
안개걸음은 생각에 잠긴 채 발을 툭툭 털고 있었는데,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산이 오빠!”
나무를 박차며 내지른 여울의 고함에 안개걸음이 퍼뜩 고개를 들고, 한 박자 늦게 반응한 산도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스팟!
대지를 스치는 듯한 마찰음.
광서우의 다리가 거리를 지웠다.
모두가 방심했다.
광서우는 그 이름처럼 지칠 줄 모르고 미친 듯이 날뛰는 녀석이지만, 그 지랄 맞은 성격만큼이나 놀랍도록 단순했다.
“푸이이익!”
산이 여울의 외침을 듣고 고개를 돌렸을 때, 광서우는 지난 이틀간 자신을 애먹인 인간을 들이받을 만반의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다리에 응집된 기운이 다할 때까지 연이어 순간 가속을 사용했고, 한껏 구부린 머리는 적을 들이받을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기를 있는 대로 때려 부은 뿔이 시퍼렇게 빛났다.
“어?”
산이 고개를 돌렸을 때, 광서우는 눈앞까지 들이닥쳐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애에…!’
야수의 거친 호흡.
대지를 스치듯 밟는 네 다리.
충돌의 순간을 고대하며 한껏 부푼 근육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단순한 오감을 뛰어넘은 종합적 감각이 여울에게 무수한 정보를 실어 날랐다.
그녀는 광서우의 움직임이 잡힐 듯이 ‘느껴졌다’.
끔찍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광서우가 산을 들이받기 직전인데, 자신의 형편없는 몸뚱이는 그녀가 원하는 움직임을 티끌만큼도 구현해주지 못했다.
마치 잠자리가 나아갈 경로와 진동하는 날갯짓 하나하나가 모두 보이고 느껴지는데, 손이 굼떠서 낚아챌 수 없는 꼴이었다.
“이런…….”
산은 체념한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짓는 게 보였다.
아니,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이 ‘느껴졌다’.
‘제발…! 산이 오빠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안 돼, 멈춰! 멈춰, 제발…!’
이 광경을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으로 삼으라고?
『절대 안 돼! 제발 멈춰줘!』
여울은 그를 지킬 수 있기를, 그가 죽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푸익?”
착각일까?
여울은 희미한 연녹색 기운이 뻗어 나가 광서우에게 닿는 환상을 보았다.
분명 멀지 않은 과거에 보고, 느꼈던 기운이었다.
포근하고 따스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는 걸 느꼈을 때, 광서우는 산에게서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 있었다.
“푸하!”
식은땀에 푹 절어버린 산이 털썩 주저앉았다.
“엇? 광서우가…!”
“저놈이 왜 저기에?!”
“사, 산아!”
주변에 산개한 채 안개걸음을 거들 준비를 하던 청년들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난 코뿔소를 보며 소리쳤다.
여울의 외침을 들은 안개걸음이 고개를 들고, 뛰쳐나가려고 다리를 굽힌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 살았어…….”
죽다 살아난 산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산아! 괜찮아?!”
안개걸음은 그의 안부를 물었다.
역시 경험 부족에서 오는 미숙함이었다.
그들은 안도를 할 게 아니라 당장 움직였어야 했다.
“안 돼요! 오빠! 피해!”
여울이 몸을 날린 나무에서 산이 있는 곳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하지만 광서우의 의도를 눈치채고 가장 먼저, 그리고 유일하게 몸을 움직였던 그녀는 아직까지도 산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다.
“푸익?”
충돌 직전의 순간, 광서우는 거부해선 안 될 것 같고, 스스로도 거절하기 싫은 ‘어떤 의지’가 자신에게 와 닿는 걸 느꼈다.
제발 멈춰달라는 그 간곡하고 애절한 바람에 홀린 듯 발을 멈췄지만, 그것은 잠시 몸을 스치는 바람처럼 한순간에 흩어져 버렸다.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머뭇거렸던 짐승은 잠시 잊었던 목표를 눈앞에서 발견했고, 전의에 불타올랐으며, 주저 없이 달려들었다.
“아…! 제길.”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았던 산에게 그를 분쇄할 짐승의 뿔이 날아들었다.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일격이었다.
직전에 한 번 경험했음에도 다시 찾아든 죽음의 공포는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눈 돌리지는 않겠어.’
솜털 하나하나까지 곤두서는 끔찍한 기분을 맛보며, 산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야수를 똑바로 노려봤다.
콰악!
‘콰악?’
뿔에 받힌 소리라기엔 묘하게 안정적이다.
아프지도 않았다.
산은 그제야 자신과 광서우 사이에 끼어든 손 하나를 발견했다.
“후우, 후우… 후욱―!”
이 남자의 호흡이 거칠어진 걸 본 적이 없다.
여태껏 누구도, 아니, 어떤 생명체도 그가 숨을 가쁘게 내쉬어야 할 만큼 몰아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년 전사들에 대한 걱정에 이십 일 거리를 일주일 만에 주파한 남자가 힘겹게 숨을 골랐다.
“후우……. 위험했구나. 산, 괜찮으냐?”
야수를 멈춰 세운 구릿빛 육체는 미치도록 눈부셨다.
원래도 그랬지만 광서우와 싸우면서 더욱 존경하게 된 그 남자.
너른 하늘이 염려스런 눈빛으로 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은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땅에 이어, 새로운 숭앙의 대상으로 너른 하늘 삼촌을 받드는 게 어떨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족장님!”
환호가 터져 나오고, 달려온 청년들이 황홀한 표정의 산을 끌어갔다.
그제야 당도한 여울도 털썩 주저앉아 눈시울을 붉혔다.
“고생들 많았다.”
일주일 전, 너른 하늘은 생포한 응목대원들에게 사건의 경위를 물었다.
처음에는 죽이라고 기세 좋게 외치던 놈들이, 푸른 눈이 이빨을 드러내자 아는 걸 줄줄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딱히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점창이 소수부족들의 땅을 침탈한 건 주지의 사실이었고, 그들의 일 처리 방식 또한 마을을 찾은 태족 장로에게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야수들을 꾀어낸 방법을 알게 된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새끼들을 납치하고 고문하여 짐승들을 유인한 수법과 와족을 끌어내기 위해 소수부족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걸 듣는 순간, 너른 하늘은 그들을 용서할 생각을 버렸다.
분노한 대망이 그들을 휘감아 으스러뜨리는 걸 묵인하고, 녀석이 새끼들을 쫓는 걸 돕기 위해 푸른 눈을 딸려 보냈다.
푸른 눈은 자신이 왜 그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하냐고 눈을 부릅떴지만, 너른 하늘이 빤히 바라보자 뭐라 그르렁대더니 대망의 뒤를 쭐레쭐레 따라갔다.
그 후 아이들이 있는 문산까지 전력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낸 힘겨운 질주였다.
“후우… 정말 위험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너른 하늘의 표정이 굳어졌다.
화아악―!
급격하게 끌어올린 자연기가 혈맥을 휘돌고, 항아리를 가득 채운 물이 흘러넘치듯 푸른 기운이 너른 하늘 주변에서 넘실거렸다.
펼치듯 방출한 자연기가 주변 지형을 뒤덮으며 방사형으로 퍼져 나갔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어 나가는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중상자가 절반. 파견한 숫자에서…… 다섯이 비는구나.’
상황을 살핀 그의 마음이 더없이 무거워졌다.
“너희들이…… 고생이 많았구나.”
갓 성년식을 마친 아이들이다.
수식어가 붙은 야수를 상대하는 건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운남 각지에서 출몰한 맹수들을 막기 위해 청년들의 반려수를 성인 전사들에게 붙여 보냈으니 더욱 힘겨웠을 터다.
인원 부족.
너른 하늘은 처음으로 전사의 숫자가 모자란 점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너 이놈…….”
그의 눈이 뿔을 붙들린 순간부터 바짝 얼어버린 광서우에게 향했다.
단순한 두뇌만큼이나 성미가 급하고 화를 잘 내는 탓에 미칠 광자가 붙은 코뿔소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하긴 이놈 잘못은 아니지.’
전에 두들겨 팰 때도 느꼈지만, 이 녀석은 악하지 않다.
그저 지극히 단순할 뿐.
각성을 했으니 미약하나마 지능도 발현이 됐을 텐데, 도저히 그렇게 볼 수 없을 만큼 뇌가 순수했다.
“저번에 우리 대화하려고 한참을 노력했었지? 내 말 알아듣겠냐?”
“푸, 푸익…! 푸이익!”
잔뜩 움츠러든 녀석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교육의 효과가 있군. 나는 네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네가 내 말을 이해해야 해. 지금 알아듣고 있는 거 맞지?”
끄덕, 끄덕.
광서우의 조악한 두뇌로 인간의 말을 깨우치는 기염을 토한 건 주구장창 이어진 구타 덕분이었다.
과거 너른 하늘에게 패한 직후부터, 인간을 먼저 건드리면 안 된다는 말을 이해할 때까지, 광서우는 두 달 내내 두들겨 맞아야 했다.
“너랑 싸운 인간들, 우리 부족의 아이들이다.”
광서우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울음소린 알아듣지 못하지만, ‘피익, 푸익, 푸이익-!’하며 괴성을 질러대고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면 무슨 뜻일지는 짐작이 갔다.
너른 하늘과 연관된 줄 알았다면 절대 건드리지 않았을 거라고 변명을 하는 게 분명했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닌 걸 안다. 새끼들이 납치됐지? 몇 마리는 아마… 목숨을 잃었겠지. 맞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광서우의 눈빛이 돌연 살벌해졌다.
까맣게 잊고 있던 본래의 목적을 떠올린 것이다.
“푸이이이익!”
녀석은 너른 하늘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광폭하게 날뛸 기세였다.
“진정해. 내가 도와주마. 너 혼자선 못 찾을 거다. 우리 말고 다른 집단의 인간들이…… 아, 이건 이해하기 어렵겠군.”
청년들에게 지시를 내리려고 고개를 돌린 너른 하늘이 흠칫했다.
그토록 강했던 광서우가 기도 못 펴는 놀라운 광경에, 그리고 녀석이 족장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점에 청년들은 무한한 존경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광경이었다.
“음……. 난 잠시 이 녀석과 다녀와야 할 것 같구나. 다들 정말 고생 많았다. 할아범을 비롯한 다른 어른들도 일을 마치는 대로 여기로 올 거다. 주변에 별다른 위협은 존재하지 않으니 편히 쉬고 있어라.”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퍼뜨렸던 자연기는 또 다른 목적도 띠고 있었다.
혹시 은신해 있을지 모를 점창의 정찰대를 찾기 위함이다.
하지만 워낙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 그런지 숨은 자는 없었다.
“그리고 여울이는 일을 마치는 대로 잠깐 나 좀 보자꾸나.”
순간적으로 가속하는 광서우의 능력.
녀석과 싸운 지가 워낙 오래된 데다 다급한 일들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리 언질만 주었다면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다치지는 않았을 텐데.
완벽해 보이지만, 너른 하늘 역시 망각과 실수를 거듭하는 한 명의 인간일 따름이었다.
그나마 이 정도에 그친 건 달려오면서 언뜻 보았던 여울이의 능력과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본인은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그 느낌은 분명…….
‘설마… 할멈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너른 하늘의 지목에 어리둥절했던 여울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너른 하늘이 광서우의 새끼 수색을 돕기 위해 떠나려는 찰나, 땅에서 그림자가 솟았다.
“족장님.”
지형지물을 헤치며 급하게 달려온 듯 검은 수리 전사의 옷은 여기저기가 긁히고 찢겨 있었다.
“할멈께 부탁하신 물건, 받아왔습니다.”
기우였구나.
너른 하늘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전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할멈이 쓰러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