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50화 (50/463)

50화

‘은빛 여우’는 이를 악문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훅……. 큭!’

불의의 습격이었다.

심장을 노린 검을 가까스로 비껴냈지만, 빗나간 검은 오른쪽 가슴 부근을 긁고 지나갔다.

검에 주입된 예리한 기운은 강피를 찢고 깊은 상처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콸콸 쏟아지는 핏물이 은빛 여우의 상반신을 붉게 물들였다.

‘왜 이런 곳에 적이…!’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역이다.

야생 짐승들만이 거니는 깊은 숲 속에 정찰병 따위를 배치할 이유가 없다.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었다.

‘전쟁이 시작됐구나!’

‘마른 비’를 지켜보는 사이, 전쟁이 터진 게 틀림없다.

그리고 ‘돌개바람’을 만난 적들이 여기까지 쫓아온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지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적들을 마주칠 리가 없었다.

‘잠깐……. 아니야.’

돌개바람이 지나온 길.

여기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다니는 지역이 아니었다.

전쟁이 발발한 삼엄한 시기에, 아무런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에서, 우연히 성년식 중인 아이를 마주쳤다?

‘그럴 확률은 희박해.’

그렇다면 의도적인 추적과 살해로 보는 게 타당하다.

성년식이라는 와족 고유의 풍습에 대해 듣고, 아이들이 남긴 흔적을 더듬어 쫓아왔다는 게 차라리 그럴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머리를 맴돌았다.

‘대체 왜?’

성년식을 치르는 아이들은 전력에 보탬이 될 수준이 아니다.

한 명이라도 병력을 끌어모아야 할 시기에 굳이 아이들을 쫓는다?

인원이 남아도는 것도 아닐 테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만, 이 새끼들……. 설마?’

은빛 여우의 영민한 두뇌는 금세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고, 얼굴이 크게 굳어졌다.

‘……몰살!’

언제 어디서건 자라나는 아이들은 해당 공동체의 미래다.

제아무리 찬란한 성세를 구가했던 집단이라도 뒤를 이을 젊은 피가 없다면 쇠락은 당연한 이치다.

회생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완전한 박멸.

점창파는 와족의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지워버릴 작정인 게 분명했다.

‘이 개 같은 새끼들이…!’

강대한 맹수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한 운남의 실정상, 투쟁의 대상은 주로 생존을 위협하는 야수들이었다.

하지만 천 년이란 아득한 시간을 지내오며 다른 부족과의 마찰이 없었을 리 없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수많은 부족들과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부족들.

때로는 소규모로, 때로는 명운을 건 총력전으로.

무수한 전투의 나날을 거쳤지만 한 번도, 어떤 부족도 상대의 씨를 말릴 작정으로 덤벼드는 경우는 없었다.

그것은 불문율이다.

누구도 다른 핏줄을 말살시킬 권리는 없다는 전제에 대한 암묵적 동의.

만약을 대비해 노약자들을 피신시키기는 하나, 내가 그렇듯 상대 또한 싸울 수 없는 자들까지 건드려 대를 끊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또한 그것은 명예다.

스스로 전사임을 자부하기에 주먹을 쥐지 못하는 약자를 핍박하는 건 부끄러운 짓이라 여긴다.

무기를 들고, 주먹을 쥔 채 본인의 의지로 덤벼오는 적만을 거꾸러뜨린다.

힘의 고하를 견주고, 승패를 나눈다.

그걸로 충분하다.

이익이든 자존심이든 단순한 시비가 됐든지 간에 그렇게 한바탕 붙는 걸로 마무리 짓는다.

복수? 원한?

그것은 차후의 일이다.

내가 죽인 적의 아들이 커서 싸울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앙금이 남았다면 그때 도전을 받아주면 되는 것이다.

고작 그것이 두려워 아직 여물지도 않은 아이를 건든다?

당장 불알을 떼고 마을에 머물며 소일거리나 뒤적이는 게 낫다.

그것이 전사의 마음가짐이다.

또한 같은 시대, 같은 땅에 던져져 힘겨운 삶을 살아내는 나 아닌 누군가를 향한 최소한의 예우인 것이다.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살아왔다.

혼탁한 인간 세상에는 종종 도를 넘는 종자들이 존재하지만, 은빛 여우는 그런 건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은빛 여우의 눈이 두 다리가 잘린 채 피지도 못하고 져 버린 부족의 아이를 담았다.

아직 젊기에 순수한 심장이 뜨겁게 데워진다.

근육을 조이고, 자연기를 둘러쳐 출혈을 막은 그가 뚜벅뚜벅 걸어 나가 외쳤다.

“나와! 이 개새끼야!”

진한 분노를 담은 눈이 붉게 물들었다.

‘흥분했군.’

응목대 7조장 서준이 몸을 드러낸 야만인 전사를 훑었다.

아이를 공격한 직후, 무언가가 다가오는 게 느껴져서 몸을 숨겼지만 확신은 없었다.

이 오지에 또 다른 누군가가 올 거라고 예상치 못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아이를 따라온 거라면 공격할 때 가만히 있었을 리 없고……. 무언가를 전하러 온 건가? 아니면 전쟁이 시작됐으니 데려가려고?’

성년식 중인 아이들 뒤에 ‘검은 수리’ 전사들이 따라붙는 것까지는 응목대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은빛 여우의 갑작스런 등장에 서준도 놀랐다.

‘끝냈어야 했는데.’

완벽한 기습이었다.

황급히 달려온 야만인은 아이의 상태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상대는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고, 주의가 흩어진 틈을 노린 일격은 심장을 도려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상대는 검을 피해낸 것이다.

‘이십 대… 중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몸놀림이었다.

와족의 성인 전사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으니 조심하라던 대주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싸울 줄도 모르는 아이를 건들다니! 네놈이 그러고도 전사란 말이냐!”

분노에 차 씩씩거리는 모습은 이성을 잃은 게 분명했다.

‘나도 꺼림칙하다, 야만인. 달갑지 않단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조직에 매인 몸인 것을.’

점창에서 나고 자라 마흔에 이를 때까지, 서준은 온갖 임무에 투입되어 왔다.

정면에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검을 연마하는 전투 조직들과 달리, 그는 응목대의 특성상 점창이 드러낼 수 없는 지저분한 일들을 도맡아왔다.

처음엔 반발이 심했지만, 이제는 마음이 닳아버렸다.

조직에 속한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점창을 위한 일이라 자위하며 감정을 죽이고 맡은 임무를 묵묵히 실행할 뿐.

그저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죽인 상대에게 명복을 빌어주는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 비열한 짓인 걸 안다. 불의에 분노하는 것. 젊음의 특권이지. 하지만 젊은 친구, 그 때문에 자넨 목숨을 잃을 거야.’

저자가 작심하고 지형에 녹아들었다면 곤란할 뻔했다.

검에 적중된 상황에서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은신술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은신과 암습을 주 무기로 삼는 자가 제 발로 걸어 나왔고, 그렇다면 끝난 거나 다름없다.

서준은 고함을 치는 적과의 거리를 서서히 좁혀나갔다.

‘온다!’

자신의 특기가 은신과 암습이기 때문에 이런 부류의 습성은 누구보다 잘 안다.

은신이 장기인 적이 흥분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없을 기회라고 여기겠지.’

흥분이 가라앉고 이성을 찾기 전에.

다시금 지형에 녹아들기 전에.

반드시 숨통을 끊으러 온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오른쪽일 거다.

‘도박을 할 수밖에 없어.’

시간은 은빛 여우의 편이 아니었다.

부상을 입었고, 적은 녹록치 않다.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마른 비를 점창의 영역에서 데리고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속전속결.

타오르는 분노를 누르지 않고 폭발시켰다.

그 정도로 검을 쓰는 자의 눈썰미라면 자신이 진심으로 화가 나 있다는 걸 알 거다.

그러면 의심치 않고 다가온다.

은빛 여우는 부상을 입은 오른편에 탐지를 위한 자연기를 집중시켰다.

툭!

‘왼쪽?!’

홱 돌아간 시야에 작은 돌멩이가 잡혔다.

‘속임수!’

쐐애액!

시퍼런 검광이 번개처럼 날아든다.

목덜미를 노리는 검은 지독하리만치 침착하고 노련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피할 수 있다.

심장이 없는 오른쪽.

일격에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건 오직 목뿐이다.

은빛 여우의 몸이 급격히 휘돌고, 검날이 간발의 차로 목을 비껴 지나갔다.

피잇!

목덜미를 스친 검이 핏방울을 허공에 점점이 띄워 올렸다.

‘이젠 내 차례다.’

준비한 역공을 적의 가슴팍에 꽂아 넣는다.

어둠을 찢고 사냥감을 낚아채는 올빼미처럼.

새의 부리 형상을 그린 오른손이 적의 명치를 꿰뚫기 위해 치달았다.

‘웃어?’

암습에 실패하고 곧 뒈질 놈이?

은빛 여우의 눈썹이 꿈틀대고, 서준의 입은 여유로운 곡선을 그렸다.

“우린 2인 1조라네. 젊은 친구.”

푸화학!

왼쪽의 돌멩이.

여태껏 숨어 있던 놈의 작품이다.

땅거죽을 뒤집으며 암습자의 신형이 치솟았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늙은 아저씨.”

여유롭던 서준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백색 털에 자르르한 윤기가 흐르니 은빛에 가깝다.

수풀에 몸을 숨겼던 날렵한 여우 한 마리가 좌측에서 날아든 암습자의 배후를 덮쳤다.

날카로운 이빨이 목덜미를 파고들고, 검은 수리 전사의 일격이 명치를 관통했다.

“끄아아아!”

“커헉…!”

빙글 몸을 돌린 은빛 여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서 숨이 끊긴 아이를 안아 올렸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은빛 여우는 적들의 비명으로 먼저 간 아이의 넋을 위로했다.

그의 눈이 지켜야 할 또 다른 아이가 있는 서쪽을 향했다.

“가자. 실바람.”

벗을 닮아 영특한 눈동자를 지닌 여우가 그의 뒤를 따랐다.

진격

드르륵―

밤새 방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가려주던 미닫이문이 열렸다.

코끝을 찌르는 주향과 여인들의 분 냄새가 방 안으로 들어선 사내의 후각을 자극했다.

밀실이나 다름없는 방 내부는 난장판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엎어진 탁자를 발로 밀어낸 사내가 방 중앙을 뚜벅뚜벅 가로질러 침상으로 향했다.

“후우…….”

입을 열기 전,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한다.

까딱하면 못마땅한 심정이 여과 없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원승이 수년이 지나도록 눈앞의 청년에게는 쉽게 나오지 않는 호칭을 겨우 꺼냈다.

“……대사형.”

침상 위에는 상의를 탈의한 청년이 입은 건지 벗은 건지 헷갈리는 차림의 여인 서너 명과 뒤엉켜 있었다.

죄다 벗고 있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만취하여 자고 있던 청년이 겨우 눈을 떴다.

의외의 얼굴에 흠칫 했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는다.

부스스 일어나 한옆에 던져 놓은 상의를 걸친 청년이 원승을 올려다봤다.

“목이 아프지 않느냐. 앉아라.”

‘정파의 무인이 홍루에서 밤을 지새우다니……. 더군다나 장문인의 아들이란 자가.’

자신과 열 살의 나이 차가 나는 어린 사형이다.

삼대 제자로 입문하길 결심한 순간부터, 그깟 나이 따윈 잊은 지 오래다.

하지만 원승은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눈앞의 청년을 사형이라 부르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는 걸 느꼈다.

“장문인께서 찾으십니다.”

“앉으라고 했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원승을 노려봤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싫다 이건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쉰 원승이 교의를 끌어와 침상 앞에 단정히 앉았다.

“무슨 일이지?”

청년이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전투의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전멸이겠지.”

툭 내뱉는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맞습니다. 벌써 들으신 겁니까?”

“보나마나다. 면면을 보아라. 버리는 패인 게 뻔하지 않느냐. 아버님, 아니, 장문인의 성향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지. 쓰레기 같은 놈들을 처분하는 동시에 적들의 전력을 가늠한다. 나라도 그리했을 것이야.”

‘버리는 패……. 쓰레기…….’

얼마 전까지 한솥밥을 먹던 식구들을, 자신을 사형이라 부르던 자들을 지칭한 게 맞는가.

원승 역시 이번에 출정한 자들 중 상당수가 성정에 문제가 있다는 점엔 동의한다.

그렇다 해도 저런 표현.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부르시는 건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원승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고작?

사문의 제자들이 전멸을 당했는데 고작이라니?

저 나이에 전투의 결과를 예측해낸 안목은 훌륭하지만, 이 녀석은 인성에 큰 문제가 있다.

소수부족을 이주시키는 임무에 파견됐을 때부터 느낀 바다.

원승은 자신이 도저히 이 청년에게 정을 붙일 수 없을 거란 걸 깨달았다.

“……곧 시작될 전쟁 때문인 듯합니다. 아울러 이전 임무를 끝마치고 사형께서 장문인을 찾지 않으신 것이….”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나?”

말을 툭 자르고 들어오는 공유환이다.

서른 중반에 이를 때까지 강호를 구르며 터득한 인내심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눈치 빠른 제자들은 모두 알고 있지요. 대사형 앞에서 티를 내지 않을 뿐.”

담담하게 풀어내는 답변이다.

또한 이는 간접적인 충고이기도 했다.

‘네가 이러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 자중하라.’

‘너는 점창 장문인의 아들이자 정파의 제자다.’

‘그게 어떤 일이 됐든 사형제들이 네 앞에서 말을 가리고 눈치를 보게 만드는 건 잘못된 일이다.’

사형제 관계를 떠나 10년을 앞서 인생을 경험한 강호의 선배로서 전하는 조언이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공유환이 손을 멈추고 원승을 빤히 쳐다봤다.

원승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 눈길을 똑바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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