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공유환의 눈동자가 점차 또렷하게 확장된다고 느낄 때쯤,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대공자님?”
둘의 대화 소리에 잠에서 깬 기녀가 앞섶을 여미며 공유환을 불렀다.
‘대공자?’
원승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강호무림에서 대공자라 불리는 건 딱 한 부류뿐이다.
조직을 이끌 차기 수장으로 내정된 자.
세가의 장남이나 사도 방파의 후계자 정도를 일컫는 말이다.
당연하게도 대공자란 호칭은 혈족 승계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는 집단에서 주로 사용한다.
‘구파의 후기지수가 세인들에게 대공자라고 불리다니! 갈 데까지 갔구나…….’
무인이란 자가 타인이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술에 취해 깨어나지 못했다.
외인이 자신에게 대공자라는 표현을 쓰는 걸 제지하지 않았다.
그 두 가지가 의미하는 것.
감히 자신을 건드릴 자는 없으며, 차기 점창 장문인은 자신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치명적인 방심, 그리고 지독한 오만…….
이런 자가 점창의 미래란 말인가.
원승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일어났구나.”
원승을 대할 때와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즐거웠다. 또 보자꾸나.”
「한 번만 더 건방지게 나를 가르치려 들면, 그땐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 원 사제.」
동시에 발해진 육성과 전음(傳音)은 상이한 온도차를 띠었다.
「아, 그리고 표정 관리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잊지 말도록.」
방 안에 남겨진 원승은 깊이 탄식했다.
* * *
“고생들 많았다.”
‘너른 하늘’이 그의 앞에 모여든 부족원들을 넓게 둘러봤다.
바위 곰, 나무 표범, 수리의 눈.
운남 각지에 파견되었던 와족 전사들이 각자에게 부여된 임무를 마치고, 드디어 이곳 문산에 집결한 것이다.
작게는 소수부족을 공격한 야수들과, 크게는 빈틈을 노리고 습격해온 적들까지.
이들은 전투를 끝마치고 피로를 풀 틈도 없이 내달려왔다.
녹초가 되어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크련만.
초승달이 비추는 어슴푸레한 밤하늘 아래 운집한 전사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뜨거운 열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수가… 많이 줄었구나.”
온몸에 자상을 입은 자.
삐져나온 장기를 간신히 수습한 자.
심지어는 팔다리가 잘려 다음 전투를 기약할 수 없는 자들까지.
밀려오는 통증에 서 있기도 힘들지만, 누구도 아픔을 내색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엄살을 부리기엔 그들의 가슴에 담긴 분노가 지나치게 컸다.
많은 이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와족의 전사들은 단지 동료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느슨한 관계가 아니다.
한 명 한 명이 어릴 적부터 함께 해온 가족이자, 친구이며, 전우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형제자매를 잃은 비통함에 고통을 잊었다.
조용히 흘리는 전사들의 눈물이 피로 얼룩진 가슴에 스며들었다.
“쉬지도 못하고 달려온 걸 안다. 하지만 더 큰 전투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일을 벌인 자들. 창산에 웅크린 한족들에게 갈 것이다. 애도는 잠시 가슴 한구석에 묻어라. 운남의 적을 불태우고, 그들을 집어삼킨 화염으로 스러져간 형제들을 추모할 것이다.”
쿵! 쿵! 쿵!
결의를 다지는 전사들의 의지가 심장을 데운다.
심장을 두드리는 주먹이 터질 듯이 차오르는 분노를 갈무리한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너른 하늘은 문산의 숲을 뒤덮은 소리 없는 함성을 똑똑히 들었다.
“지난 수백 년간 그랬듯 우리는 운남에 터 잡은 힘없는 이들의 방패이며, 그들을 대신해 적들을 응징할 철퇴다. 와족 22대 족장 너른 하늘의 이름을 걸고 말하노니, 저들은 한 달 후, 우릴 건드린 대가를 저들의 피로써 치르리라.”
30년 전과는 다르다.
이번엔 용서하지 않는다.
너른 하늘의 입에서 멸적(滅敵)의 언약이 흘러나왔다.
쿵! 쿵! 쿵! 쿵!
점차 고조되어 하나된 심장박동을 느끼며, 너른 하늘이 말했다.
“전원, 출진한다.”
* * *
찌르륵, 찌륵.
어둠에 휩싸인 밤.
숲의 적막을 깨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심심한 걸 넘어 지겹기까지 한 정찰 임무를 한 자리에서 며칠째 수행하다보니, 이억은 온몸이 뒤틀리는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으으… 뻐근해.’
개원(開遠).
운남 동남쪽에 있는 광활한 원시림 지역이다.
볼 것도, 먹을 것도, 심지어 인간의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고대의 숲에 그가 잠복해 있는 이유는 며칠 후 이곳을 지날 적들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지겨워 죽겠네.’
하지만 아무리 빨라봐야 일주일 후다.
만약을 대비해 적당한 나무 위에 일찌감치 자리 잡긴 했지만, 적들의 그림자는커녕 야생 짐승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듭된 수련 덕분에 아무런 소음도 흘리지 않고 찌뿌둥한 몸을 푸는 데 성공한 그가 건너편 나무 위를 올려다봤다.
눈 부분만 빼꼼히 내놓은 신입이 잎사귀 사이에 몸을 감춘 곳이었다.
녀석은 새로 임무에 투입된 티를 내듯 한시도 긴장을 풀지 않고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쯧쯧. 저러다 막상 움직여야 할 때 몸이 저려서 죽지.’
계속해서 몸을 긴장시키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원하는 움직임을 구현할 수 없다.
지치기 때문이다.
장시간에 걸친 긴장은 피로를 유발하고, 누적된 피로는 필연적으로 근육의 경직을 불러온다.
뛰어난 무인일수록 긴장과 이완의 완급 조절에 신경을 쓰는 이유다.
그리고 그것은 은신과 정찰, 때때로 암습의 임무까지 수행해야 하는 자신들과 같은 첩보대원 역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내내 적들이 출현하리라 예상되는 날짜 3일 전까지는 지나치게 몸을 긴장시키지 말라고 강조했거늘.
저 애송이는 선배의 조언을 까맣게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살며시 내공을 끌어올린 이억이 신입 대원의 귀에 전음을 흘렸다.
「긴장 풀어, 인마. 그러다가 적을 만나기도 전에 긴장해서 죽겠다.」
화들짝 놀란 신입이 동그래진 눈으로 이억을 돌아봤다.
「선배! 응목대 지침에 따르면 야전에서 은신 중일 때는 전음을 자제해야 합니다! 소리를 기에 실어 전달하기에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절정에 이른 고수들은 기의 전파 자체를 낚아채기 때문에 아무리 전음이라도…!」
「아, 시끄러, 시끄러! 네 전음이 몇 배는 더 길거든? 그리고 너 지금 누구한테 설명하냐? 내가 그걸 몰라서 했겠어?」
「그럼 왜…?」
「긴장 풀라고, 자식아! 오면서 몇 번이나 말했냐? 적들이 여기까지 오려면 최소 일주일이라니까? 쓸데없이 힘 빼지 말라고! 정작 움직여야 할 때 몸이 경직된단 말이다.」
「아,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자꾸 긴장이 되네요.」
‘어이구, 저런 게 어떻게 응목대 최종 선발 시험을 통과했지?’
그나마 다행이다.
이쪽은 원시림의 외곽 지역이라 적들이 지나가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저런 풋내기를 배치했겠지.
이억이 신입을 흘겨보고 정면으로 눈을 돌렸을 때.
“크르르…….”
시퍼런 눈동자가 코앞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 * *
숲이 들썩인다.
어떤 생명체도 눈에 잡히지를 않건만, 원시림 한복판이 파도가 치듯 술렁이고 있었다.
시작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원시림 서쪽 끝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온 고목은, 연륜이 선사한 느긋함으로 숲을 헤집는 물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이변을 감지한 건 지난밤 해가 떨어질 무렵이었다.
이백 명이 넘는 인간과 그 숫자만큼의 짐승들이 원시림 동쪽 끝으로 은밀히 진입했다.
퍽이나 기묘한 조합이었다.
고목이 자리한 개원의 원시림은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지만, ‘거의’라는 건 달리 말해 가끔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드물게 모습을 드러낸 인간들은 둘 중 하나였다.
짐승들을 사냥하거나 짐승들에게 사냥당하거나.
인간과 짐승이 저렇게 짝을 지어 사이좋게 움직이는 경우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고목으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건 숲에 막 진입한 인간과 짐승의 무리가 다짜고짜 다른 무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공격을 받은 쪽은 인간들로만 구성된 집단이었다.
미리 와서 숨소리까지 죽인 채 숨어있던 인간들은 뒤늦게 숲에 진입한 인간과 짐승의 무리에게 일방적으로 사냥당했다.
지난밤 동쪽 끝으로 진입한 인간과 짐승의 무리는 해가 떠오를 무렵 고목이 자리한 서쪽 끝까지 다다랐고, 숲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인간들을 남김없이 쓸어버렸다.
고목은 그들의 기동을 보며 가끔씩 숲을 지나는 거침없는 바람을 떠올렸다.
참으로 시원시원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숲을 들쑤신 파도가 발밑에 이르고, 고목의 품에 안겨 있던 인간을 죽였을 때.
그래서 가지와 잎이 지저분한 인간의 피로 물들었을 때.
고목은 그들에 대한 평가를 시원시원한 녀석들에서 고약한 녀석들로 수정했다.
* * *
“나무들한테 미안하구먼.”
그믐이 손에 묻은 피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원시림 서쪽 끝, 최소 몇 백 년은 됐음직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목 중턱이다.
여기에 숨어 있던 놈이 이 숲에 남은 마지막 적이 틀림없었다.
드넓은 원시림을 하룻밤 새 주파하는 동안, 그의 손에만 최소 삼십 명 이상의 응목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지형의 특성상 적들은 대부분 나무 위에 은신해 있었고, 아늑한 밤을 원했을 숲의 나무들은 느닷없이 인간의 피로 목욕을 해야만 했다.
“놓친 놈은 없겠지?”
“확실합니다.”
너른 하늘이 적들의 피로 물든 상반신을 닦지도 않은 채 다가왔다.
“내 생각에도 그렇다. 너랑 나, 우둔한 녀석과 눈깔. 네 명이 앞장서서 적들을 처리했으니 빠져나간 놈은 없을 게야.”
“감각이 뛰어난 반려수들까지 모조리 동원했으니 틀림없을 겁니다.”
너른 하늘이 밝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둔 날개’는 뭐라고 합니까?”
“숨어 있는 놈이 있을 순 있어도, 숲을 빠져나간 녀석은 확실히 없다더군.”
하늘에선 어둔 날개가 이끄는 날짐승들이 고요히 비행하며 숲의 경계를 주시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바로 움직인 게 주효했다. 부상을 입은 전사들은 힘들었겠지만.”
“네, 적들이 기겁한 표정을 짓더군요. 예상하지 못한 게 분명합니다. 다친 사람이 많았으니 최소 며칠은 쉬고 이동할 거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 빠르게 움직여도 창산까지는 한 달이 걸릴 거리다. 그 말은 놈들도 변동 사항이 생길 경우, 바로바로 전파를 하기가 어렵다는 뜻이지.”
그믐이 창산이 있는 북서쪽을 돌아봤다.
“우리를 지켜봤던 놈들이 집결지를 문산이라고 보고했을 거다. 그에 맞춰 뭔가 계획을 짜놓았겠지. 그렇다면 시간을 앞당겨서 들이친다. 그게 외통수에 걸린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인 게야.”
“한 달. 놈들은 우리의 회복력을 모릅니다. 가면서 휴식을 취해도 도착할 때쯤에는 전사들이 싸울 수 있는 몸 상태를 회복하겠죠. 중간에 대규모 전투만 피하면 됩니다.”
“그래. 하지만 이렇게 은밀히 이동하는 게 쉽진 않을 거야. 현장 지휘를 맡은 놈들 중에서도 머리가 돌아가는 놈들이 분명히 있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위치를 파악할 거다. 요 며칠간 지나치게 무리했으니 오늘은 전사들을 푹 쉬게 하자꾸나.”
“예. 그렇게 하죠.”
대꾸를 한 너른 하늘이 그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부리부리한 두 눈에 담긴 건 걱정이었다.
“왜? 뭘 그렇게 쳐다봐?”
“……괜찮으신 겁니까, 할아범?”
그믐이 별소릴 다 한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으엉?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게야? 꼬맹이가 힘 좀 세졌다고 내가 누군지를 벌써 잊은 거냐? 네가 어둔 날개한테 어부바 해달라고 조를 때 난 이미 수식어 붙은 놈들을 눕히고 다녔다, 이눔아.”
“설마요.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할멈이…….”
진한 걱정과 염려.
‘잎의 노래’가 쓰러진 걸 언급하는 건 너른 하늘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른 하늘이 그답지 않게 말을 흐리자, 그믐이 난처함을 덜어주기 위해 먼저 입을 뗐다.
“안 괜찮으면 어쩔 거냐? 전쟁이 시작된 판국에 ‘수리의 눈’ 수장인 내가 자리를 비워? 걱정된다고 달려갔다가는 그 여편네 성격에 뺨부터 후려칠 거다.”
너른 하늘이라고 모를 리 없다.
그녀를 잘 알기에 그만큼 염려가 큰 것이다.
그믐이 슬쩍 그를 곁눈질하고 말을 이었다.
“걱정 마라. 너도 알지 않느냐? 할망구 술력이 좀 높아야 말이지. 반백년을 함께 한 굽은 뿔의 죽음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걸 거다.”
“네, 할아범. 당연히 별일 없으실 겁니다. 금세 털고 일어나실 테니 마음 편히 가지세요.”
“그래야지. 사실… 걱정은 된다. 너도 알다시피 반려수를 잃었을 때 가해지는 심리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지 않느냐? 혼으로 이어져 있기에 그렇지. 반려수를 잃은 부족원들이 한동안 시름시름 앓는 걸 너도 봤을 테고 말이야. 그건 함께 한 기간이 길수록 더욱 힘겹다. 강한 사람이지만… 이겨내는 게 쉽지는 않을 게야.”
말을 마치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믐이 너른 하늘에게 물었다.
“넌 괜찮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