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52화 (52/463)

52화

“저요? 저야 별다른 일이…….”

“비아 말이다. 성년식을 떠난 바람에 옆에 없지 않느냐. 걱정이 되겠지.”

“비아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를 닮았는걸요. 심산유곡에서 단련을 하거나 맛있는 걸 찾아다니고 있겠죠. 아니면 멋진 풍경을 보러 다니거나. 하하핫.”

“나는 비아가 너를 닮아서 걱정이 되는데? 큭큭, 그래. 잘 있을 거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부인과 아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두 남자다.

제아무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일지라도 친인을 향한 마음은 범인들과 다를 바 없는 게 당연했다.

“그나저나 ‘겨울 달’……. 그 아이가 그런 황당한 일을 벌일 줄이야…….”

그믐이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반려수인 ‘흑살사’를 움직여 굽은 뿔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부족에 대한 정보까지 넘겼다고 하더군요. 검은 수리 전사의 보고에 따르면 고의는 아닌 것 같다지만…… 절대 쉽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창의 사내 녀석이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확실하다. 달이는 철저하게 이용당한 게야. 예전에 사절단으로 왔던 녀석이었는데 이름이…….”

“기억합니다. 호국영이라는 이름이었죠. 백족 출신의 청년.”

너른 하늘의 눈에 차가운 이성으로 눌러 놓았던 무언가가 서서히 차올랐다.

괴후에게 살해당한 ‘잽싼 다리’를 보았을 때 일어났던 짙붉은 열기.

원시의 화염을 담은 눈동자가 머나먼 곳에 있는 창산을 그렸다.

“점창파 장문인 공지량. 이대제자 호국영. 그 둘은 이번에 창산에서 저를 마주해야 할 겁니다.”

* * *

화녕(華寧).

시야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널따란 늪지대가 전사들을 맞이했다.

습기 찬 축축한 땅은 온통 진흙투성이였고, 곳곳에 패인 진창과 수렁들이 입을 벌린 채 길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숨에 통과한다.”

너른 하늘은 전사들에게 거침없는 전진을 주문했다.

족장의 명은 언제 어디서건 절대적이다.

이백이 넘는 전사들이 망설임 없이 늪지대로 진입했다.

“‘깃털 날리기’를 운용해라! 자연기로 몸을 띄워 올려!”

그믐이 노파심에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흐흐, 할아범. 그간 일선에서 너무 떨어져 있었던 거 아니유?”

옆에서 달리던 중년의 전사가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눔 새끼, 발자국만 남아봐라. 발모가지를 분질러 놓을 테다.”

무안해진 그믐은 눈알을 부라리며 괜한 엄포를 놓았고,

“어이쿠! 다 할아범 같은 줄 아시오? 발자국은 남아야지! 안 남으면 그게 사람이여? 귀신이지?”

늙은이의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전사는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만큼은 쓸데없는 걱정이 맞다.

여기 있는 자들은 그야말로 백전을 거친 노련한 전사들이기 때문이다.

질퍽질퍽한 땅에 발이 닿기 직전, 발바닥에 집중시킨 자연기로 체중을 흩뜨린다.

발끝이 지면에 닿는 순간, 응집했던 자연기를 위쪽으로 튕겨 올려 추진력을 얻으니 무른 지표면조차 훌륭한 디딤돌이 됐다.

전사들의 몸은 깃털이요, 자연기는 바람이다.

나풀나풀 낙하하던 깃털이 용솟음치는 바람에 솟아오르듯, 전사들의 육신이 진창 위를 날듯이 질주했다.

‘이런 미친…! 등평도수(登萍渡水)?!’

온몸을 수렁에 파묻은 채 늪지대를 감시하던 응목대원이 소리 없는 경악을 토했다.

이백이 넘는 야만 전사들이 늪지대로 뛰어들 때만 해도 미련한 것들이라고 비웃었다.

화녕 일대에 펼쳐진 늪지대는 행군하는데 있어 최악의 조건을 갖춘 곳이기 때문이다.

무릎까지 빠져드는 진창은 물론이거니와 사람 키보다도 깊은 수렁이 곳곳에 널려 있다.

진흙과 개흙이 물에 섞여 표면을 이루고 있기에 언뜻 봐서는 구분도 어렵다.

화녕은 문산에서 대리로 가는 직선상에 위치해 있지만, 점창의 수뇌부는 와족 전사들이 당연히 늪지대를 우회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을 비웃듯 와족의 전사들은 한 명도 낙오되는 이 없이 늪지대를 바람처럼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 많은 인원이 죄다 등평도수를 구사한다고?!’

천하에는 온갖 경공 절기들이 범람하고, 지고한 경지를 개척한 경공의 대가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물 위를 수평으로 내달릴 정도의 경지를 이룩한 자는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하다.

한데 이백이 넘는 야만인들이 전부…?

‘아, 아니야. 여긴 물 위가 아니지.’

발이 빠져드는 질척질척한 늪일 뿐, 수면과는 엄연히 다르다.

너무도 압도적인 광경에 잠시 착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도 엄청난 건 마찬가지다. 거의 모든 인원이 진창 위에 발끝 자국만 희미하게 남기는 수준이야. 저 정도면 풀잎을 밟고 달리는 초상비(草上飛)에 가깝다는 소린데…….’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다.

지금껏 상정해온 적들의 전력을 한 단계는 높여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수뇌부의 예상을 한참이나 웃도는 행군 속도와 허를 찌르는 움직임.

응목대원은 적들이 늪지대를 통과하는 즉시 전서구를 날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너희는 여기서 꽤 시간을 지체하게 될 거다. 늪지대 중앙에 이르면 곧…!’

푸화아악!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늪지대 한복판에서 거센 물보라가 치솟았다.

‘우회하는 게 훨씬 빨랐을 거다. 우리도 그놈들 때문에 중앙에는 자리 잡질 못했거든.’

물웅덩이들에서 튀어나온 건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악어 떼와 거대한 물뱀이었다.

가장 풍요롭고 수심이 깊은 곳.

늪지대의 최상위 포식자들이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지.”

너른 하늘이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달리고 있는 그의 벗을 돌아봤다.

“부탁한다, 푸른 눈.”

늪지대를 우회한 다른 반려수들과 달리, 너른 하늘의 강압에 의해 진창에 뛰어든 ‘푸른 눈’은 온몸이 진흙투성이였다.

불만에 가득 찬 대호는 으르렁대며 전면으로 튀어나갔고, 쌓인 울화를 토해내듯 맹렬하게 울부짖었다.

“크허어어어엉!”

먹이사슬 정점에 자리한 대호의 포효.

어지간한 맹수가 아닌 바에야 야생의 짐승들은 대호의 울부짖음을 듣는 순간, 붙박인 듯 제자리에 서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하물며 푸른 눈이다.

줄기줄기 뻗어 나온 광망이 건방지게 앞을 막아선 피식자들을 위압했고, 천지를 울리는 포효가 하늘 아래 모든 공간을 휩쓸었다.

기세 좋게 솟구쳤던 늪지대의 야수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좋아! 속도를 늦추지 말고 전진해라!”

텅 빈 늪지대를 와족의 정예들이 내달렸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찌릿찌릿 등골을 치닫는 원초적 공포는 응목대원의 육신을 마비시켰다.

의지를 배반한 하반신이 누런 오줌을 수렁 안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때.

선두에서 달리던 노인이 그를 돌아봤다.

‘어?’

하늘에서 어둠이 쏟아져 내리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하늘로 끌어올려져 산산이 해체됐다.

옥계(玉溪), 역문(易門), 초웅(楚雄), 남화(南華).

파죽지세로 전진한 와족 전사들은 문산에서 대리에 이르는 최단 거리를 일직선으로 주파했다.

와족의 진격로에 위치했던 응목대는 한 명도 남김없이 도륙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전방위적으로 포진한 응목대원들은 뚫려 버린 공간들을 더듬어 와족의 이동 경로와 진격 속도를 유추했고, 마침내 위치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바야흐로 운남을 뒤흔들 격전이 핏빛 꽃봉오리를 피워 올리려 하고 있었다.

* * *

우지직!

대호의 아가리가 닫히자 골육이 찢기는 섬뜩한 소리가 평야의 바람을 타고 번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이 끊긴 인간의 눈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뭐 하는 짓이지, 이놈들?”

가늘게 뜬 눈이 이해할 수 없는 적들의 행동을 유추한다.

하지만 짚이는 부분이 없었다.

갑작스레 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적들 때문에 그믐의 미간이 깊은 골을 그렸다.

“상대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왜 희생을 늘리는 게야?”

대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온 덕분에 시간을 많이 단축했다.

문산에서 남화까지 한 달이 안 되는 여정을 거치며, 죽인 적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남화에 가까워지면서, 그믐은 자신들을 주시하는 눈길이 부쩍 늘어난 걸 느꼈다.

이상한 건 먼저 덤비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마주친 적들은 죄다 은신에 특화된 놈들일 뿐 제대로 검을 쓰는 놈이 없었다.

그저 정찰을 위해 파견한 놈들인 게 분명했다.

한데 남화를 넘어서자 놈들이 암습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웬만한 적이라면 그 정도로도 충분히 저지할 수 있겠지만,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반려수들과 수장들이 모두 모여 있는 와족에게는 부질없는 몸부림이나 다름없었다.

쓸데없이 인명 피해만 늘리고 있는 셈이다.

도무지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슬슬 제대로 덤벼올 때가 됐는데 조용하군요. 창산까지 끌어들이려는 걸까요?”

너른 하늘이 그믐을 돌아봤다.

“이 무익한 암습. 아무래도 시간을 끌려는 수작인 것 같은데…….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구나. 나라면 이쯤에 진을 치고 몰아쳤을 텐데 말이지.”

“뭐가 됐든 달라질 건 없습니다. 창산을 부순다는 목표에는 변함이 없으니까요. 단순히 저들의 사정 때문에 시간을 끄는 것이든, 무언가를 준비한 것이든. 이대로 쭉 가죠.”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지.”

너른 하늘과 그믐은 전사들을 독려하며 행군을 계속했다.

그리고 대리와 남화의 중간, 창산을 불과 며칠 앞둔 거리에 이르렀을 때.

침중한 표정의 ‘흰 수리’ 전사들이 하나둘 그들에게 달려왔다.

광기

왁자지껄한 대리의 거리.

밤새 성인 남녀의 끈적끈적한 욕망의 분출구가 되어주었던 주루와 홍루는 달이 다시 떠오를 때를 기약하며 등불을 내렸다.

해가 만물을 비추는 동안은 밤일과는 다른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시간이다.

면, 가죽, 목재, 약초 등의 생필품부터 먹, 비단, 옥수(玉髓), 명경(明鏡) 등 찾는 이들이 한정된 사치품까지.

갖가지 물건들이 진열된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크으~ 어떻게 세상에 이런 맛이!”

아이들에게 시장 거리란 눈길을 사로잡는 보물들의 전시장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겨우 두어 번 시장을 접해본 게 전부인 마른 비에게는 특히나 그랬다.

신기한 것들이 널려 있지만, 역시나 소년을 가장 감탄하게 만드는 건 먹거리였다.

“당과(糖菓)가 그렇게 신기해?”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당과를 빨아먹는 마른 비를 보며, 여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고말고! 이건 아버지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야!”

마른 비가 떠올릴 수 있는 최상의 감탄사였다.

야생에도 단맛을 내는 과일이나 야채류가 존재하지만, 이 당과라는 인간 문명의 걸작과는 비교할 수 없다.

입에 넣는 순간 부드럽게 살살 녹아내리며 입안을 가득 채우는 감미로움이라니!

마른 비는 황홀한 표정이었다.

“많이 먹어. 그 정도는 얼마든지 사줄 수 있어.”

“와! 고마워! 여규, 너 부자구나?”

마른 비는 여규에게 문자를 배우며 문명사회에 대한 지식도 습득해가는 중이었다.

그들의 사회에서는 화폐라는 수단을 통해 대부분의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땡전 한 푼 없는 마른 비가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건 당연했기 때문에, 그의 식대를 책임지는 건 전적으로 여규의 몫이었다.

“부자는 아니지만, 너 먹고 싶은 거 사줄 돈은 있어. 엄밀히 따지면 내 돈은 아니지만.”

여휘가 원 황실에 투신한 이후, 그가 장로로서 받던 직봉(職俸)은 아들인 여규에게 지급되고 있었다.

직위를 해제하지 않는 이상 봉록을 안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제대로 주기도 싫다.

공지량이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며 삭감한 결과, 전에 비하면 고작 1할 정도가 지급될 뿐이지만, 열네 살 꼬맹이가 생활을 영위하기에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딱히 돈을 쓸 곳이 없는 여규는 그 돈을 차곡차곡 모아왔다.

“많이 먹어, 많이. 2주 만에 내려왔으니까 맛있는 것들 다 먹고 가자. 그래야 또 힘내서 수련하지.”

알찬 나날을 보내다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여규가 당과에 정신이 팔린 친구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봤다.

‘안 가길 잘했어.’

마른 비와 함께 한 시간들은 보람찰 뿐만 아니라 매 순간순간이 즐거웠다.

지난 14년의 삶이 무채색이었다면, 마른 비를 만난 이후는 하루하루가 영롱한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당분간 산에 돌아가지 않기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여규는 나중에 문책을 받더라도 마른 비와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연장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부턴 동물을 잡을 때 가죽을 버리지 말고 벗겨서 팔아야겠어. 여규야! 다음에 내려올 땐 내가 당과 사줄게!”

‘그게 그냥 벗기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닐 텐데.’

돌아가는 길에 가죽 상인에게 들러서 손질법이라도 물어봐야겠다.

점창의 무복을 입고 있으니 웬만하면 친절하게 알려주겠지.

서툴면 어떠랴.

둘이서 낑낑대며 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그래, 고마워. 기대할게.”

여규가 환히 웃었다.

‘응?’

원승은 밀실에서 공유환과의 유쾌하지 못한 시간을 보내고 홍루의 출입구를 막 나서는 참이었다.

꼴도 보기 싫지만 그를 수행하여 창산으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아랫사람 노릇하기란 참으로 피곤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여 사형?’

무인이란 항시 주변의 상황을 폭넓게 눈에 담아야 한다.

중원을 떠나 운남에 내려와서도 그는 무인으로서의 기본을 잊지 않았다.

원승은 거리로 나오자마자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고, 시장 거리 귀퉁이에서 밝게 웃는 여규를 포착했다.

‘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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