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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53화 (53/463)

53화

점창을 상징하는 백색 무복은 한참을 빨지 않았는지 꾀죄죄했다.

하지만 여규의 표정은 원승이 지난 몇 년간 보아온 어느 때보다 활기에 차 있었다.

‘친구?’

여규의 옆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당과를 빨고 있는 청년이 한 명 서 있었고, 여규는 그 청년을 보며 웃고 있었다.

‘청년이… 맞나? 아냐. 신체는 발달했지만 얼굴이 아직 앳돼.’

자신이 점창에 몸담게 된 계기.

존경하는 위대한 무인.

그 후 알게 된 그의 아들.

하지만 소년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홀로 외로운 시간을 감내하고 있었다.

여휘는 훌륭한 협사지만, 좋은 아버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규를 지켜보았으나,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삼대 제자인 데다 외부에서 유입된 그는, 점창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이대 제자 이상이 드나드는 장소엔 갈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문호를 개방했다 하나 문파 내부에서 출신과 위계에 따른 차별은 엄존하고 있었다.

가끔 먼발치에서 마주칠 때마다 여규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구석에 홀로 서 있었다.

사형제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건가, 염려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본 소년의 얼굴은 밝았다.

‘친구가 생겼구나! 잘되었어.’

원승이 따뜻하게 웃었다.

그리고 여규의 친구가 되어준 소수부족의 소년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냈다.

“안 오고 뭐 하나, 원 사제?”

“아, 예. 대사형! 갑니다.”

‘이런…!’

원승은 황급히 미소를 지우고 공유환에게 바짝 다가섰다.

슬쩍 몸을 돌려서 여규 쪽을 막아선 채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뭘 보았기에 웃고 있던 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형. 활기 넘치는 시장통을 보니 중원에 있던 때가 떠올라서요.”

“흠. 그러고 보니 사제는 중원 출신이라 했지.”

대리에서 가장 번성한 시장이라지만, 그래봤자 변방에 위치한 저잣거리일 뿐이다.

사천으로만 올라가도 비교할 수 없는 대시(大市)들이 널렸다.

원승의 어깨 너머를 힐끗 본 공유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쯧. 서두르자. 장문인께서 부르셨다지 않았느냐.”

“예, 사형.”

원승은 다시 여규를 돌아보는 실수 따윈 하지 않았다.

그저 어린 사형의 얼굴에 나이에 맞는 웃음이 자주 피어오르길 마음속으로 바랄 뿐.

공유환을 따르는 원승의 발길은 홍루에서 나올 때보다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 * *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한 거냐?”

장문전 3층.

공지량은 뒷짐을 진 채 문을 열고 들어온 아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묵직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질 뿐이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공유환이 살짝 인상을 굳혔다.

“토착부족들을 우리의 땅에서 내쫓는… 아니, 이주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그간 쌓인 노독을 풀고 있었습니다. 바로 올라와서 보고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버님. 몸이 좀 피곤하여……. 하지만 먼저 올라온 제자들이 보고를 드렸을….”

“가까이 와라.”

그제야 돌아선 공지량의 눈은 무심하기만 했다.

항상 애정이 넘치는 아비의 모습만을 보아온 공유환은 긴장하여 주춤주춤 다가갔다.

“어, 어인 일로….”

짜악!

공지량이 사정없이 아들의 뺨을 후려쳤다.

“아, 아버…!”

짝! 짜악!

홱홱 돌아가는 고개.

공유환이 벌게진 뺨을 감싸 쥔 채 얼빠진 표정으로 공지량을 바라봤다.

난생처음 아비에게 맞은 아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무인으로서의 단련과 수장이 될 자로서의 학습과 연마. 넌 재능이 있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데 있어 게으르지 않았지. 10년 전부터 뻔질나게 홍루를 드나들고, 사형제들 앞에서 경솔한 말을 내뱉어도 눈감아 준 이유다.”

“아버님! 그, 그건…!”

알고 계셨던가?

조심하느라 항상 사람들을 떼어놓고 출입을 했거늘.

새지 않는 비밀이란 없으니 제자들 몇몇은 알고 있겠지, 짐작했다.

하지만 설마 아버지가 알고 계실 줄은 몰랐다.

아니, 어렴풋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그까짓 일로 손찌검을 할 줄은 몰랐다.

공유환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보이지 않느냐? 곧 전쟁이 발발한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지. 2주. 2주 후면 야만인 놈들이 대리를 밟을 게야. 이미 모든 무력 단체가 전투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다. 한데 장문인의 아들이란 놈이 색욕에 미쳐서 계집질이나 하고 있어? 네가 정녕 제정신이냐?”

공지량은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고, 아들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파르르 눈가를 떨던 공유환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 아니, 장문인.”

“세인들 앞에서 대공자라 칭한다지? 잘 들어라.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난 내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못난 자식 놈 때문에 무너지는 꼴을 볼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럴 바에야 출신은 비천하더라도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녀석에게 맡기는 게 백번 낫겠지.”

공유환이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 장문인! 어찌 그런 천한 놈을…!”

“너도 알 것이다. 정파, 그것도 구파일방에 속한 문파에서 혈족 승계란 구설수에 오르고도 남을 일이야. 누구나 납득할 만한 실적과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아무리 기반을 닦아놔도 어림없는 일이지. 분명히 말하건대, 네가 스스로 실력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넌 장문의 위에 오를 수 없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긴 세월을 준비해 온 공지량이다.

그는 누가 뭐라던 간에 아들을 차기 장문인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한 번쯤 정신을 차리게 할 기회를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심해라. 내 아들은 너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공유립의 존재가 도움이 됐다.

하나뿐인 아들은, 그가 하나뿐이라고 여기는 아들은 이제 정신을 차릴 거다.

그래야만 한다.

공지량은 끝까지 냉정한 모습을 보이며 뒤돌아섰다.

“2주. 아니, 방금 위치를 놓쳤다는 보고가 도착했으니 그보다 빠를 수도 있다. 나가라. 그리고 전쟁을 준비해라.”

부들부들 떨면서 무언가를 말하려던 공유환이 입술을 깨물었다.

꾸벅 고개를 숙인 그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 새끼를!’

재능과 인성은 비례하지 않는다.

그것을 몸소 보여주려는 듯, 공유환은 비틀린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아 거칠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대상은 집무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

“훅, 후욱…!”

마주치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이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오에 가까운 시각.

일, 이대 제자들은 연무장에 모여 수련을 하고 있을 거다.

2주 후에 전쟁이 시작된다니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겠지.

분명히 거기에 있다!

울화가 치밀어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더 빨리, 더 빨리!

씨팔! 왜 이렇게 먼 거야?!

“대사형!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표, 표정이…! 무슨 일이신지요?”

닥쳐라.

듣기 싫다.

다 닥쳐라!

퍼억!

“꺄악!”

시비 주제에 건방지게 길을 막아?

아, 앞서가고 있었던가?

내 알 바 아니지.

내가 걷는 걸 모르고 피하지 않은 저년의 잘못이다.

다 와 간다.

연무장… 연무장…… 연무장!

어디 있어, 이 새끼?!

호국영, 청목, 완기, 교방, 웅보…… 찾았다!

“이 씨발 새끼가!”

퍼억!

“컥…!”

고작 배 한번 걷어차였다고 쓰러져?

엄살 부리지 마라.

오랜만이지?

오늘 아주 잘근잘근 다져줄 테니까 기대하는 게 좋아.

어디부터 조져줄까?

몰라, 일단 뒈져라!

퍽! 퍽! 퍼억! 퍽!

“컥! 큭! 흑! 으윽…!”

뭐지? 왜 시원하지가 않지?

아, 내공을 안 실었구나.

다시.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 천한!”

퍽! 퍼억!

“서출 새끼가!”

뻐억! 푸억! 빠악!

“감히 네까짓 게, 감히!”

“큭! 으윽! 윽!”

“죽어라! 이 새끼야! 그냥 여기서 뒈져버려!”

“크윽! 윽…! 혀, 형님, 갑자기 왜…?!”

형님?

역겨워서 오장육부가 뒤틀릴 것 같다.

“누가 네 형님이야?! 이 더러운 새끼가! 목매고 뒈진 네 어미에게 보내주마!”

“……!”

이 새끼가?

어디서 감히 그따위 눈초리를?

“눈에 힘 안 빼?!”

퍽! 퍼억!

“이 새끼가? 끝까지! 누가 첩의 자식 아니랄까 봐 제 어미 닮아서 독한 것만 빼닮았구나!”

콰악! 콱! 콱!

“어쭈? 이 악물고 소리도 안 내겠다 이거지? 어디 한번 버텨봐라, 이 개새끼야!”

누가 이기나 보자.

뒈질 때까지 밟아주마.

우선 싸가지 없는 그 눈깔부터!

“죽어!”

퍼억!

“후욱, 후욱… 훅, 후욱…….”

사방이 고요하다.

공유환이 이성을 되찾았을 땐 다진 고깃덩이 하나가 눈 밑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카악! 퉤!”

공유립의 얼굴에 더러운 가래까지 뱉어준 후에야 공유환은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후우―.”

피투성이가 된 채 경련하는 공유립과, 심호흡하는 공유환.

제자들은 멀찍이 떨어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유환은 그게 또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진정됐다.

다른 사형제들에게까지 화를 낼 필요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이들은 자신이 장문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공유환이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켜고 주위를 돌아봤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못난 모습을 보였구나. 흔한 다툼이니 모두들 그리 알거라.”

미친놈처럼 광분하다가 느닷없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이 저건가.

딴에는 수습한다고 한 말이겠지만, 그게 더 섬뜩하게 보인다는 건 공유환만 모르고 있었다.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연무장에 내려앉았다.

‘후우…. 빌어먹을 새끼 때문에.’

공유립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공개된 장소에서 이런 적은 없었다.

조용히 패고, 몇 명에게 뒷수습을 맡겨왔을 뿐.

그러면 소문이 퍼지게 된다.

자신이 공유립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자연스레 알려진다.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내비치는 행위이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장문인의 묵인을 전제로 하기에 공지량이 자신의 두 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리는 방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구타하는 모습을 직접 보일 필요까진 없는데, 오늘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무조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보인 싸늘함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 수련에 집중하도록.”

여태껏 홍루에 처박혀 있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염치를 아는 인간이라면 이 난리를 치지도 않았다.

뻔뻔함으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공유환이었다.

“이런… 유립이가 대사형께 뭔가 실수를 저질렀나 보죠? 그러면 맞을 만하죠. 암요. 평소에 대사형을 대하는 태도도 미적지근한 게 영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헤헤.”

‘저 멍청이가!’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는 머저리는 어디나 있는 법이다.

평소 공유환의 눈에 들기 위해 안달이 난 청목이 그의 비위를 맞춘답시고 나섰고, 호국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청목.”

“예. 대사형.”

“가까이 와라.”

“예? 아, 예!”

‘……큰일 났군.’

청목은 무공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만, 눈치가 없고 분위기를 읽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실수가 잦지만, 힘 있는 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애쓰는 모리배 같은 족속인지라 데리고 다니기 딱 좋은 녀석이었다.

호국영은 시키는 대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청목을 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이용하곤 했다.

청목으로 하여금 여규를 두들겨 패게 하고 적당한 시점에 자신이 나서서 말리며 상황을 정리하는 식으로 말이다.

‘대사형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아부를 한 모양인데…….’

하지만 지금 저 멍청한 녀석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젊은 제자들의 서열 관계에서 공유환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앞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는 자신이, 언젠가 내쳐질 게 분명한 서출 출신의 사제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이유.

청목은 장문인과 대사형의 특질을 파악하지 못했다.

짜악!

오늘은 점창파 여기저기서 구타의 메아리가 울려 퍼질 날이었나 보다.

경쾌한 따귀 소리와 함께 청목의 고개가 돌아갔다.

짝!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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