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대, 대사형…! 왜?”
짝! 짜악!
“크흑, 흑!”
‘이건… 좀 과한데…….’
대사형이 청목의 발언을 그냥 넘기진 않으리라 짐작했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다.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었나?
호국영의 눈이 가늘어지며 공유환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폈다.
짝! 짝! 짜악!
공유환은 청목의 뺨이 시뻘겋게 부어오를 때까지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고 얻어맞은 청목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일 때쯤, 그는 손을 멈췄다.
“잘 들어라.”
공유환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 이대 제자들을 넓게 둘러봤다.
“천한 피가 섞이긴 했지만, 이 녀석은 장문인의 피를 이어받았다. 그 말은 이 공유환과도 절반의 피는 같단 말이지. 더럽기 짝이 없는 녀석이지만, 어찌 됐든 배다른 동생이란 말이다. 누구의? 이! 공유환의!”
가슴을 탕탕 치는 그의 눈엔 광기가 번들거렸다.
“다른 놈이 이 녀석을 업신여기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나! 공유환만이! 이 녀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야!”
그의 말을 듣는 제자들은 하나같이 아연한 표정이었다.
방금 전까지 누가 너의 형이냐며 지랄 발광을 떨지 않았나.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겨우 숨만 쉴 정도로 두들겨 패지 않았던가.
그러더니 이제 와서 다른 이가 무시하는 건 두고 보지 못한다고?
그래도 동생이니 아끼는 감정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어서?
절대 아니다.
그저 자신과 같은 피를 지닌 존재가 멸시받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거다.
공유립이라는 인간이 아닌, 그 몸속에 흐르는 피가 모욕받는 걸 참지 못하는 거다.
그것을 곧 장문인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게 틀림없었다.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사고방식이었다.
광인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만큼.
“데려가서 치료해줘라.”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자근자근 밟아놓더니 이제는 치료를 하란다.
작게 고개를 흔든 이대 제자 두 명이 정신을 잃은 공유립을 운반했다.
‘대체…….’
잘못 생각했다.
대사형은 장문인과는 또 다르다.
평소 많은 사람을 눈여겨보고 분석해 온 호국영이지만, 이런 유형은 본 적이 없었다.
장문인이나 사문의 어른들은 대사형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는 걸까?
그저 뛰어난 재능과 냉혹한 성정을 지닌,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기는 인간이라고만 생각했다.
자신 또한 그런 부류이기에 일정 부분 동질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장로가 되고, 대사형을 장문인으로 추대하면 궁합이 잘 맞으리라 여겼다.
한데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복동생을 두드려 패더니 피에 대한 기묘한 집착까지 드러낸다.
이런 예측 불허의 광기라니.
‘이건… 생각지도 못한 부분인데.’
눈꼬리가 잘게 떨려온다.
빳빳하게 갠 포목처럼 말끔하게 정돈된 미래가 마구잡이로 구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자아, 그럼 수련을 재개하도록 하자.”
공유환은 또다시 빙긋 웃고 있었다.
“씩, 씩…!”
연무장 귀퉁이에 주저앉은 청목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 미친 새끼가!’
청목이 저 멀리 있는 공유환을 힐끗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로서는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도 공유환을 오랫동안 노려볼 용기가 없었다.
‘미치광이 아니야? 저거?’
자신은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부.
그래, 아부다.
아부가 맞다.
‘누군 그런 걸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너무나 노골적이고 미숙하지만,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처세술이다.
인간 사회 어디나 그렇듯이 점창파 또한 내부의 권력관계가 어지러이 얽혀 있고, 자신과 같이 특별한 능력도, 배경도 없는 평범한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
다행히도 장차 점창을 이끌어갈 젊은 세대의 권력관계는 매우 명료했다.
자신처럼 눈치 없는 사람도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일대 제자는 공유환, 이대 제자는 호국영.
그 둘의 눈에만 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의 아첨을 떨고, 그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자신 같은 평범한 인간이 살아남고 출세하려면 힘 있고 뛰어난 자들에게 붙는 수밖에 없으니까.
욕할 테면 욕하라지.
상관없다.
고고한 척하며 자신을 비웃는 놈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된다.
그리고 그놈들이 목숨을 건 임무를 수행할 때 자신은 안락한 집무실에서 특권과 지위를 마음껏 누리면 되는 것이다.
‘한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거의 모든 일, 이대 제자들이 구타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공유환이 공개된 장소에서 공유립을 폭행한다는 소문이 퍼져, 대기 중이던 주력 전투 집단은 물론이고 삼대 제자들까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왔을 때는 자신이 한창 얻어맞는 중이었다.
이 소동을 장문인이 모를 리 없다.
누군가 제지해야 함에도 아무도 나서지 않은 것.
분명 장문인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장문인은 몰려드는 제자들을 가만히 놔두라고 지시한 게 틀림없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창피해서 죽고 싶다.
그나마 좁쌀만 했던 위신마저 땅바닥까지 추락했다.
모두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열불이 터지고 쪽팔려서 안 되겠어. 일단 이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나도 이 울분을 좀 풀어야겠어. 여규! 여규 이 새끼, 지금 어디 있지?’
강자에게 당한 약자가 자신보다 더 약한 자를 찾는다.
폭력의 비틀린 연쇄다.
다행인 건 마른 비와 붙어 있느라 여규는 지금 창산에 없었다.
“야! 여규 못 봤어?”
“몰라. 걔가 어디 있는지 알 게 뭐야. 한참 안 보이던데.”
“어쩌다 마주치면 대련하는 거고. 아니면 신경 끄는 거고. 하도 당해서 이제 연무장에 잘 안 오잖아.”
“얼핏 듣기론 봉검 장로님께서 산외에서 수련하는 걸 허락했다고 하던데. 왜? 화풀이하려고?”
청목과 친하게 지내는 제자 세 명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있어 봐.”
그중 한 명인 완기가 연무장 중앙에 서 있는 공유환에게 다가갔다.
“저… 대사형.”
“음? 그래, 완 사제. 무슨 일이냐?”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공유환은 태연하기만 했다.
“여규를 못 본 지가 오래 됐습니다.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같이 수련하고 손발을 맞춰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이 녀석, 분명…….’
공유환이 저 멀리 두 명의 동기와 함께 서 있는 청목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닿자 청목은 목을 움츠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완기, 교방, 웅보……. 청목과 친한 녀석들이었지. 호국영과 함께 여규를 자주 괴롭히던 놈들. 나한테 맞은 걸 그 꼬맹이에게 풀겠다?’
괘씸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그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다.
이대 제자씩이나 되는 녀석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손찌검을 당했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이성을 잃고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아버지의 질책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주변을 물리지 않은 걸 보면 이번 일을 넘어가 주기로 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관용을 베푼다.
분노를 모조리 발산한 공유환은 지금 매우 상쾌한 기분이었다.
“여규라…….”
공유환이 연무장 주변에서 서성이는 인파를 훑었다.
슬슬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공유환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여규. 오늘 아침에 대리에서 보았지.”
연무장 바깥에서 공유환을 주시하던 남자가 흠칫했다.
“안 그런가? 원 사제?”
원승의 깜짝 놀란 표정을 음미하듯 공유환이 천천히 입을 뗐다.
“원 사제가 너희들을 여규에게 안내해 줄 거다.”
사일
“후아아~ 이제 좀 소화가 되네.”
오전에 시작해 정오를 넘어 해가 서산머리에 걸릴 때까지, 두 소년은 시장 곳곳을 쏘다녔다.
자연 친화적인 삶을 넘어 자연 그 자체로 15년을 살아온 마른 비에게 대리의 시장 거리는 별천지나 다름없었고, 그건 여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끔 생필품을 살 때 들리는 것 말고는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본 적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른 비는 시장을 구경하는 내내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진짜 경이적인 위장이다.”
배를 두드리는 마른 비를 보며 여규가 혀를 내둘렀다.
“멈출 수가 없어. 엄청나. 훌륭해. 최고야.”
마른 비는 시장의 먹거리들이 진심으로 만족스러웠다.
“너희는 전부 굽거나 날로 먹는다고 그랬지? 난 그게 더 맛있던데.”
대리의 음식에 익숙한 여규는 오히려 마른 비가 사냥해서 구워주는 싱싱한 육류가 더 입에 맞았다.
아직 마른 비처럼 날고기까지는 즐기지 못했지만.
“근데 희한하네. 여기서 파는 먹거리 대부분은 운남 소수부족들의 토속 음식이거든. 백족이나 하니족 같은. 그런 걸 보면 너희도 나름의 조리법이 발달했을 법 한데.”
“아냐. 우린 그런 거 없어. 굽는 게 다야.”
“그래? 와족이라고 했지? 와족. 와족.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여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어기 운남 아래쪽에 우리 마을이 있어. 우린 다른 부족들과 달리 모두가 모여 살아. 타 부족과 교류도 별로 없고, 어지간해선 여기까지 올라오는 일도 없으니 잘 모를 거야.”
“그렇구나. 그런데 자꾸 되새기니까 낯설지는 않은 이름이야. 분명 어디선가…….”
“규야, 잠깐만. 뭐지, 이거?”
기운을 감지한 건 마른 비가 먼저였다.
기억을 곱씹던 여규가 무슨 일이냐는 눈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여규도 눈빛이 굳어지며 시장 거리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의.”
마른 비가 기운의 진원지를 포착했다.
이를 드러낸 채 흉흉한 기세를 퍼뜨리는 네 명의 청년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른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도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매우 난감한 눈으로 이쪽을, 정확히는 여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이야?”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마른 비가 물었다.
“……응.”
올 게 왔다.
예상보다 훨씬 안 좋은 방식으로.
‘하필이면 저놈들이.’
청목, 완기, 교방, 웅보.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는 뻔하다.
오랫동안 복귀하지 않은 자신을 찾으러 온 게 분명했다.
노골적으로 쏘아오는 날 선 적의.
자신 때문에 먼 곳까지 나오게 되서 화가 났다, 그거겠지.
보나마나 산에 올라간 후에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시작할 거다.
‘상관없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마른 비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후회는 없다.
좀 더 같이 있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
“비아야. 나, 산에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즐거웠어.”
여규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렇게 갑자기?”
“응. 사형들이 데리러 온 것 같아.”
“사형이면… 같이 생활하면서 단련한다는 윗사람? 그런데 데리러 왔다면서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어?”
“나 때문에 멀리까지 내려와서 그럴 거야. 원래… 날 싫어하기도 하고.”
욕과 함께 온갖 모멸적인 발언들이 튀어나오겠지.
친구에게는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자신은 상관없지만, 그 때문에 하나뿐인 친구가 마음이 무거워지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여규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좀… 놀랄 수도 있어. 그래도 우리끼리의 일이니 절대 끼어들지 말아줘.”
“알았어. 근데 저건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닌 것 같은….”
여규가 마른 비의 어깨를 툭 치고 빙글 몸을 돌리며 포권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
“이 새끼야!”
뻐억!
기습이나 다름없는 발길질이 복부에 꽂히고, 붕 떠올랐던 소년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는 전쟁 준비에 뭐에 정신없이 구르다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따귀를 처맞았는데, 팔자 좋게 시장 구경이나 하고 앉아 있어?’
쌓여 있던 울화가 여규의 얼굴을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다.
청목은 스스로를 다스리기 힘들었다.
“컥! 사형! 갑자기 이게…!”
“저번엔 쌍욕을 퍼붓더니 이제 와서 뭔 사형? 죽어! 이 새끼야!”
모진 발길질이 이어진다.
청목은 여규를 말 그대로 죽일 듯이 짓밟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