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55화 (55/463)

55화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원승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대리의 시장 거리 한복판에서 사형이 사제를 개 패듯이 구타하는 장면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이게 정파의 제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인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복동생을 때린 공유환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최소한 그건 문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외인이 개입하기 힘든 형제간의 일.

이미 구타가 끝난 상황.

나서려는 사람들을 막아서는 응목대원.

연신 몸이 움찔댔지만, 원승은 공유환과 공유립의 일에는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다.

이들이 연무장에서 공유환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지만, 그저 복귀하지 않는 철없는 사제를 찾으러 나온 것이겠거니 했다.

한데 세인들이 바글거리는 시장 한복판에서 다짜고짜 폭행을 해?

원승이 인상을 굳히며 청목을 떼어놓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어허, 사제. 끼어들지 마.”

이대 제자 교방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제지했다.

입가에는 비열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이것들! 죄다 한패로구나. 게다가 익숙해. 이러는 게 처음이 아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구나, 짐작은 했다.

하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저기서 맞고 있는 소년은 목적 없던 자신의 인생에 전환점을 만들어준 위대한 무인의 아들이며, 아무 관련이 없는 사이일지라도 달라질 건 없다.

이건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리고 자신은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점창에 입문했다.

저 여휘 대협처럼 말이다.

원승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사형이고 뭐고 막돼먹은 불한당 같은 놈을 떼어놓기 위해 나서려는 찰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그만하시죠. 사형.”

콰악!

날아드는 발을 움켜쥔 여규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잡아? 이 새끼가!”

청목이 내력을 끌어올려 발에 집중시켰다.

그대로 짓밟을 생각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청목은 생각처럼 여규의 손을 수월하게 밀어내지 못했다.

여규 또한 밀리지 않기 위해 격렬히 저항했기 때문이다.

“감히 반항을 해? 해보자 이거냐?”

청목의 눈이 번쩍였다.

‘큭! 밀린다!’

청목이 전력을 다하자 여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밀려나기 시작했다.

당연한 결과다.

같은 심법을 수련한 이상 내공의 축적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결국 시간일 수밖에 없다.

심법을 수련한 지 10년도 안 된 여규가, 두 배 가까운 세월 동안 정진해온 청목에게 내력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여규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터질 듯이 불거졌다.

“큭!”

여규의 행동은 기민했다.

밀린다는 판단이 든 순간, 몸을 비틀며 발을 바깥으로 흘렸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집중된 청목의 발은 허공을 때렸다.

청목 또한 민첩했다.

발길질이 빗나가자마자 몸을 돌린 그가 왼발 돌려차기를 여규에게 때려 넣었다.

“크윽!”

팔을 겹쳐 겨우 막아냈지만, 여규는 몇 걸음이나 물러나야만 했다.

양팔이 아려온다.

되먹지 못한 놈이지만, 청목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 사형! 여긴 창산이 아니에요! 제정신입니까?!”

“제정신? 이 새끼가 사형에게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너, 문파에 복귀하지 않은 게 얼마나 됐지? 문규를 어긴 부분에 대한 체벌이다. 달게 받아들여!”

“봉검 장로님께서 산외 수련을 허가하셨습니다. 일개 제자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닐 텐데요. 게다가 같은 제자인 주제에 체벌이라니? 그것도 대리 한복판에서! 누가 허가한 겁니까, 그걸?”

소년은 부당함을 토로한다.

규율을 어긴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벌을 받겠다.

하지만 여기선 아니다.

그리고 너에겐 아니다.

보는 눈이 많고, 그중엔 처음 사귄 친구도 있다.

적대자로 가득한 사문이지만, 그래도 사문을 욕보이긴 싫었다.

그래서 꼴같잖은 놈이지만 존대를 붙였고, 처음 얼마간 부당한 구타를 감내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여규의 눈빛은 확고한 의지를 전하고 있었다.

“왈가왈부? 주제? 이 썩을 새끼가 끝까지!”

화를 발산하려 왔건만 오히려 화가 덧쌓인다.

공유환이 그랬듯, 청목 또한 끊어져 버린 이성을 이어붙일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채앵!

결국, 검을 뽑고 만다.

‘약해빠진 새끼가!’

수개월에 걸친 자유 대련 동안 여규는 한 번도 자신을 이기지 못했다.

딴에는 죽을힘을 다해 덤벼들었겠지만, 형편없는 검 실력은 자신에게 일말의 위협도 주지 못했다.

호국영의 지시로 처음 붙게 됐을 땐 바짝 긴장했었다.

무력 하나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여 장로의 아들이 아닌가.

호부 밑에 견자 없는 법.

목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한참 어린 사제에게 패할까 봐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분광검을 보며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이토록 엉망일 수 있단 말인가.

여 장로가 중원으로 떠난 이후, 스승 없이 홀로 수련을 했다더니 이런 꼴불견이 따로 없었다.

‘그런 주제에 시퍼런 독기는 빠질 줄을 몰랐지.’

그래서 더 가지고 노는 재미가 있는 꼬마였다.

거듭되는 폭력은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앗아간다.

상대는 그저 자신의 먹잇감일 뿐이며, 그 관계가 역전될 리 없다는 믿음을 굳혀간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규를 두들겨 패며 청목은 확신했다.

힘이 있어야만 한다고.

더 강한 자에게 붙어야만 한다고.

그 여 장로의 아들이다.

여 장로가 떠나지만 않았다면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봐라.

줄 끊어진 연의 신세가 되어 배척당하고, 따돌림 받고, 두들겨 맞는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점창제일검의, 아니, 점창제일검이었던 자의 아들이 자신의 발아래 눕게 될 것이라고.

처음에는 시켜서 마지못해 한 일이었지만, 언젠가부터 청목은 자진해서 나섰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자신은 꿈꾸지도 못할 위치에 올라섰을 상대를 농락하는 것.

그건 분명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넌 약자고, 내 장난감이야. 한데 감히 그따위 눈빛을 해?’

뒤틀린 자가, 비틀린 욕망을, 어긋난 방식으로 표출한다.

청목이 검 끝을 여규에게 겨눴다.

‘이 새끼. 진심이야.’

청목은 나타난 순간부터 눈이 뒤집혀 있었다.

시뻘겋게 부은 저 얼굴.

누군가한테 흠씬 얻어맞은 게 틀림없다.

‘그래서. 나한테 분풀이를 하러 왔다 이거지?’

이 먼 곳까지? 친히? 몸소?

“너 정말 상종 못 할 개새끼구나.”

청목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고, 여규의 눈은 서늘한 분노를 품었다.

더 이상은 참지 않는다.

차앙!

야무진 손이 단호하게 검을 빼들었다.

“덤벼.”

지면과 수평으로 들어 올린 검 끝이 적을 꿰뚫을 주인의 의지를 전한다.

쭉 뻗은 왼팔이 표적을 겨냥하고, 하늘을 향해 바짝 세운 왼손이 상대의 시선으로부터 나의 눈을 가린다.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이 빛나니, 그것은 곧 사냥감을 노리는 명궁의 예안이라.

해를 쏘아 떨어뜨릴 후예의 살(虄).

사일검(射日劍)이 저무는 황혼 아래 첨예한 광휘를 머금었다.

“뭐냐? 그 웃기지도 않는 자세는?”

청목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분명히 말하는데.”

고개를 모로 틀어, 왼손으로 가렸던 눈빛을 내비친다.

이글거리는 눈이 비열한 얼굴을 불사를 듯이 노려봤다.

여규의 눈빛을 마주한 청목이 움찔 몸을 움츠렸다.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뭔 애새끼 눈빛이…!’

“조심하는 게 좋아. 전과는 많이 다를 테니까.”

“개소리!”

잠시간의 위축을 떨쳐내려는 듯 청목이 발작적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네까짓 게 뭘 하든 나에게 통할 것 같나! 죽이진 않겠다! 하지만 감히 사형에게 검을 들이댄 대가는 치러야 할 거야!”

자기가 먼저 검을 뽑았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검을 겨눴다는 게 참을 수 없을 뿐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청목이 땅을 박찼다.

‘저 자세로 취할 수 있는 검식(劍式)은 찌르기 하나뿐이다. 멍청한 자식! 공격 방식을 대놓고 알려주는 꼴이라니!’

검을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는 변화와 응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각도로 뻗어 나가는 투로.

강함과 부드러움, 거침과 정밀함을 넘나드는 변화무쌍함.

베기, 가르기, 찌르기 등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공격을 구현 가능한 기능적 특징까지.

하지만 저 싸가지 없는 꼬맹이가 취한 자세는 검이라는 병기의 이점을 모조리 날려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찌르기에 국한된 획일적이고 단조로운 공격법.

검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다.

청목의 비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저, 저 자세는!’

저 독특한 기수식을 어찌 잊을까.

그날.

원승의 뇌리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각인된 밤.

한족 아녀자를 겁탈하려던 원의 백호장을 주살한 여휘의 자세다.

백호장이 휘두르던 도(刀)의 흉맹한 기세가 생생하다.

몽골 기병대가 세계를 제패하는 데 일조한 천하무쌍의 무예.

전투마와 그 위에 탄 기병까지 일격에 양단하기 위해 탄생한 북방 초원 최강의 도법.

중원인들에게 악몽처럼 자리매김한 십칠식(十七式) 참마도법(斬馬刀法)이었다.

하지만 여휘는 저 자세에서 내지른 찌르기 일격으로 백호장의 참마도를 가볍게 분질렀다.

‘아들에게 전해졌었나!’

원승이 벅차오르는 감격에 전율하는 사이, 여규의 조그만 입술이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나도 마찬가지야. 죽이진 않을게. 대신 검을 뽑은 대가는 치러야 할 거야.”

“이 쥐방울만 한 새끼가!”

점창에서의 이십여 년.

청목은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쾌속하기로 유명한 분광십팔수검.

그중에서도 검속 하나에 모든 걸 내건 무호흡 연격.

섬전분광이 빛을 쪼개며 날아들었다.

‘끝났어!’

여규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신의 속도에 반응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감히 이따위 실력으로 검을 뽑아 들어?

한동안 검을 들지 못하도록 양어깨의 힘줄을 끊어놓으리라.

창산의 명의들이 이어 붙여주더라도 재활하려면 고생깨나 해야 할 것이다.

청목은 다시는 여규가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하도록 치명적인 상처를 새겨놓을 심산이었다.

‘저리 독하게 나오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네.’

매섭게 엄습하는 적의.

노리는 곳은 양쪽 어깨인 게 틀림없다.

꼴 보기 싫은 놈이지만, 한 식구란 소속감 때문에 검을 쓰는 걸 망설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청목의 독심을 보고 나니 흔들리던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는다.

이놈은 사정 봐줄 필요가 없는 놈이다.

여규가 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부수기로 마음먹었다면 철저하게.’

속도로 덤벼오는가?

그렇다면 속도로 부숴주마.

‘연(連), 일수초현!’

찌를 듯한 눈빛이 섬전분광의 투로를 낱낱이 해체하고, 내질러진 손이 초고속 찌르기 연격을 토해낸다.

채채채채챙!

날카로운 금속성이 쉼 없이 울려 퍼지며 시장 거리를 흉흉하게 물들였다.

“이, 이익…!”

분광검은 베는 것에 중점을 둔 검술이다.

그리고 베기란 필연적으로 곡선을 그린다.

곡선을 그리는 베기와 일직선으로 내뻗는 찌르기.

어느 쪽이 빠를지는 자명했다.

터져나간 사일검이 분광검의 검속을 압도하기 시작하자 청목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해갔다.

“큭! 크윽! 카학!”

청목의 성대에서 기괴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처음엔 검봉(劍鋒), 그다음엔 검인(劍刃), 곧 검병(劍柄)의 바로 윗부분까지.

점이나 다름없는 검첨(劍尖)으로 날아드는 분광검을 맞춰서 상쇄시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여규의 찌르기는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었다.

청목이 휘두르는 검의 꼭대기를 맞추던 사일검은 곧 중앙으로 내려와 검날에 부딪히기 시작했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검을 쥔 손잡이까지 다가왔다.

급기야 청목은 검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시작부터 차단당하기에 이르렀다.

챙! 챙! 채채챙!

‘빠, 빠져야 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여규의 검 끝은 검병의 윗부분을 두드리고 있었다.

조금 더 속도에 익숙해지면 검을 쥔 손까지 타고 내려올 게 뻔하고, 그러면 끝이다.

사색이 된 청목이 황급히 물러섰다.

“헉! 허억! 하악!”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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