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양쪽 다 무호흡 상태를 유지한 채 벌어진 격돌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후에야 둘은 숨을 골랐고, 호흡이 흐트러져 컥컥대는 청목에 비해 여규는 고요하게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 자신을 추슬렀다.
전투의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마무리에 있어서까지 우위는 명백했다.
“어, 어디서 이따위 사술을!”
청목이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으나 스스로도 알고 있다.
엄연한 검술 대결에서 패했다는 것을.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은 추하기만 했다.
“짖지 말고 들어와. 인정할 때까지 조져줄 테니까.”
명문 정파의 열네 살 소년이 입에 담을 소리는 아니지만, 그것은 소년의 일생을 관통하는 투쟁의 산물이다.
시도 때도 없는 사형제들의 괴롭힘 속에서 악밖에 남지 않은 소년은 거친 욕지거리라도 내뱉으며 힘겨운 일상을 견뎌야만 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욕설이란 때에 따라 나름의 통쾌한 맛이 있다는 점이다.
정제된 언어로는 담아내기 힘든 격정을 적나라하게 분출시킨다.
또한 그것은 상대의 평정을 깨뜨리는 원색적인 도발로도 유용했다.
청목의 얼굴이 곧 거품을 물고 발작한다고 해도 믿을 만큼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 쌍놈의 새끼가!”
대리 한복판이다.
무수한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
문내에서 그 난리를 겪은 후에 곧장 나왔으니 분명히 사문의 눈도 따라붙었을 거다.
외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몸을 숨긴 채 지켜보는 응목대원들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니, 분명히 있다.
‘저 꼬맹이에게까지 밀리는 모습을 보이면…… 난, 난 정말 끝이다.’
청목은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깊게 들이마신 숨으로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단전에 웅크린 내기를 남김없이 끌어 올려 사지에 퍼뜨린다.
이제는 정말 이판사판이다.
‘저놈이 날 도발한 것이야. 죽어도 제 놈 책임이지, 난 모른다.’
청목의 눈이 진득한 살기를 품었다.
‘진짜 죽일 생각이군.’
앞을 가린 왼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로 보이는 상대의 눈.
청목은 진심으로 끝을 볼 생각이었다.
‘응해주마.’
여규는 이미 실전을 겪어봤다.
연무장의 잘 깔린 청석 바닥 위에서 사문의 식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검을 휘두르는 건 실전이 아니다.
마른 비를 처음 만났을 때.
비록 순식간에 패했지만, 여규는 분명 마른 비를 적으로 인식했다.
“카아압!”
전신에 퍼뜨렸던 기운이 검 한 자루에 집중되자 백색의 검기가 검을 감싼다.
눈이 뒤집힌 청목은 뒷일을 생각할 여력도, 의향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꼬마를 두 동강 낼 뿐이다.
피가 나도록 틀어쥔 검에 공력이 집중되고, 모든 걸 건 가르기 일수가 벼락처럼 여규를 덮쳤다.
‘똑같이 받아주마.’
힘으로 승부를 걸어오니 힘으로 받아준다.
진기를 집중시킨 여규의 검이 벌떼의 소음을 울리며 진동했다.
‘사양무광 회천식(廻天式).’
기존의 파괴력에 회전력을 가미한다.
더 예리하고, 더욱 빠르게.
빛을 비껴내는 어둠의 엄습이 석양을 지웠다.
왜애애앵!
격렬히 회전하는 찌르기 일식이 대기를 꿰뚫고, 날아드는 분광검을 검째로 집어삼켰다.
쨍강!
검이 동강동강 분질러지고,
우두둑!
검을 쥐고 있던 청목의 오른팔이 회전력을 이기지 못한 채 기이한 각도로 뒤틀렸다.
퍼어억!
왼쪽 어깨를 관통당한 청목이 등 뒤에서 뒤늦게 터진 진기의 폭발에 내상을 입으며 쓰러졌다.
“죽이진 않아.”
꿰뚫는 순간 회전을 죽였고, 관통을 마친 후에야 검에 담긴 진기를 허공에 터뜨렸다.
청목과 달리 여규는 죽이지 않겠다는 선언을 끝까지 지켰다.
아무리 화가 나도 선은 넘지 않는다.
그게 여규가 생각하는 정파의 무인이었다.
“저, 저…!”
“청목아!”
“저 새끼, 죽여!”
차차창!
지켜보던 교방, 완기, 웅보가 검을 뽑았다.
누가 시작했건, 누가 잘못했건 그따위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아니,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
마땅히 분풀이 대상이 됐어야 할 놈이 저항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감히 사형을 상처 입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세 명의 이대 제자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규에게 달려들었다.
“끝까지 비겁한 새끼들이구만.”
전력을 다한 전투 끝에 찾아오는 무기력감.
여규는 급속히 빠져나간 기운으로 인해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하지만 기분은 좋다.
사일검을 쓰면 제압할 자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익숙하지 않은 분광검으로 대련을 하느라 항상 쓰디쓴 패배만을 되풀이했다.
어리지만 자신도 어엿한 무인이다.
남들은 어떻게 볼지 몰라도 스스로 무인이라 자부한다.
패배가 달콤할 리 없었다.
홀로 고련을 거듭한 사일검으로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놈을 눕히고 나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다.
밀려오는 쾌감에 여규는 웃었다.
“덤벼! 새끼들아!”
기력이 없다고 저따위 놈들에게 물러서는 모습을 보일 생각은 없다.
다치든 죽든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여규는 검을 들어 올렸다.
“너희… 진짜 나쁜 놈들이야.”
나지막한 음성이 싸움판을 파고들고, 항상 실없이 웃기만 하던 얼굴은 고요한 분노를 담았다.
친구의 부탁 때문에 움찔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억눌렀던 소년이 마침내 침묵을 깨고 뛰쳐나왔다.
“막아. 그냥 맞으면 다쳐.”
탄탄한 어깨에 푸르른 자연기가 어리고, 전진하는 육체가 산을 허물어뜨릴 대지의 일격을 치졸한 인간들에게 선사한다.
푸콰쾅!
“크윽!”
“뭐냐, 이건?”
미리 경고를 듣지 못했다면 휩쓸릴 뻔했다.
날아드는 공격을 방어했지만, 검을 든 손아귀가 찢어져 피를 내비치고 있었다.
세 명의 점창 제자가 여규의 앞을 막아선 건장한 청년을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어깨? 방금 어깨로 공격한 건가?’
‘이런 체술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도 없는데?’
‘뭐야, 이놈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가운데 당혹감에 물든 눈빛들이 교차한다.
처음 청목이 달려들기 전부터 여규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녀석이다.
사문에서 따돌림 받던 꼬마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야만인과 어울리는구나, 비웃었다.
하잘것없는 존재라고 판단했고, 실제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청년이 선보인 독특한 체술은 자신들 셋을 한꺼번에 밀어낼 만한 거력을 담고 있었다.
검을 쥔 손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세 명의 제자는 바짝 긴장하여 정체불명의 청년을 신중하게 살폈다.
“끼어들지 말라니까.”
여규가 마른 비의 널따란 등을 보며 툴툴댔다.
말은 그렇게 해도 위험했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
문내의 일인 건 맞지만 어차피 사형들도 도를 한참이나 넘었고,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규는 잠시만 친구에게 기대기로 했다.
‘반말?’
‘이 커다란 놈이 여규 저놈 또래라고?!’
마른 비를 탐색하던 세 쌍의 눈에 놀라움이 번졌다.
야만인 청년, 아니, 소년의 키는 이미 성장을 마친 자신들에 비해 조금 작은 정도였다.
호흡의 박자를 따라 살아 있는 듯 약동하는 오밀조밀한 근육과 건강하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가 충만한 생명력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가만 보니 얼굴만은 앳되다.
소년의 풋풋함이 남아 있는 얼굴과 꽉 짜인 육체는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우러지며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까는 왜 눈에 안 들어왔지?’
마른 비는 야생에서의 꾸준한 단련을 통해 자연기의 조율과 호흡의 일체화를 완전히 몸에 붙여 놓았다.
어딜 가든 주변 환경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마른 비의 습관을 그들이 알 리 없었다.
“규야. 네가 끼어들지 말래서 꾹 참았어. 근데 더 이상은 안 되겠어. 네 사형이란 사람들, 진짜 나쁜 놈들이야.”
내내 움찔거리는 몸을 진정시키느라 무던히도 애썼다.
부당한 폭력의 행사와 적반하장의 태도, 살의를 띤 공격, 심지어 다수의 핍박까지.
여규는 한 식구라 했지만, 이런 놈들은 절대로 식구가 될 수 없다.
그렇게 확신한 순간, 마른 비는 주저 없이 나섰다.
막돼먹은 불한당들을 노려보는 소년의 눈은 준엄한 질책을 담고 있었다.
“이건 우리 점창파 내부의 문제다! 야만인 주제에 감히 대 점창의 행사에 끼어들고도…!”
“시끄러. 너흰 나빠. 하나만 선택해. 다친 저 사람을 데리고 돌아가든가, 여기서 다 눕든가.”
“이…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나같이…!
예상치 못한 급습과 묵직한 일격에 놀랐지만, 여규의 친구라면 십 대 중반의 꼬마일 뿐이다.
제대로 된 싸움을 경험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여규가 움직이지 못하니 놈은 혼자다.
침착하게 붙는다면 절대로 밀릴 리가 없었다.
계산을 끝낸 눈들이 빠르게 교차하고, 쾌속하게 움직인 세 개의 신형이 마른 비를 둘러쌌다.
그들은 마른 비를 중앙에 둔 세모꼴의 포위진을 완성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오지랖 때문에 넌 여기서 죽는 거다!”
상단, 중단, 하단.
세 방향에서 일시에 짓쳐드는 합격술이다.
이십여 년간 함께 다니며 동고동락한 그들은 눈빛 하나만으로도 죽이 척척 맞았다.
목표에 이르는 속도까지 일치시킨 세 자루의 검이 마른 비의 육신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몸을 뺄 곳이 없어!’
대인 합격진을 처음 겪는 마른 비다.
세 명이 하나가 된 듯 내쳐오는 검은 세 개이되 동시에 하나였다.
점창 제자 세 명은 합격진을 이룸으로써 셋의 역량을 단순히 합친 것 이상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었다.
‘공중?’
인체의 상단, 중단, 하단을 동시에 가르는 검.
남은 퇴로는 허공뿐이다.
마른 비가 도약을 위해 무릎을 굽힌 순간, 너른 하늘의 조언이 뇌리를 스쳤다.
‘너무 뻔하다.’
대련 내내 아버지가 누차 지적한 부분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라면 상대 역시 예측하기 쉽다는 뜻.
허공으로 치솟는 즉시 궤도를 비튼 검이 날아들 거다.
이 합격진은 의도적으로 도약을 유도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예측 불가능한 회피.’
상단, 중단, 하단을 동시에 저미는 검.
그 말은 각 부분을 가르는 검은 하나뿐이란 뜻이다.
거기다.
거기에 활로가 있다!
마른 비가 주춤했던 자세 그대로 사뿐히 뛰어올랐다.
“걸렸어!”
이 포위진에 갇힌 자는 십중팔구 위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리고 진형이 노리는 바가 거기에 있었다.
상대가 위로 치솟는 즉시, 각자가 한 귀퉁이를 담당하는 가상의 삼각 포위진을 허공에 다시 생성하는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상대의 세 방위를 압박하며 날아드는 검.
머리 위의 허공이야말로 이 포위진의 절대 사지(死地)다.
희희낙락한 교방이 승리의 웃음을 터뜨렸다.
“엇?!”
그러나 야만인 소년은 뛰어오르긴 했지만 허공으로 치솟지 않았다.
대지를 가볍게 밀어낸 소년은 자신의 몸통이 위치했던 지점에서 짧은 도약을 멈추었고, 곧 중단부로 날아오는 검의 궤적을 따라 몸을 수평으로 누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대지와 수평이 되게 몸을 눕혔으니 상단과 하단을 노린 검은 피할 수 있다 쳐도 중단을 가르는 검이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를 쪼개놓을 거다.
교방은 소년의 회피 동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깃털 날리기.’
허공에서 나풀대는 깃털은 산들바람에도 쉬이 몸을 맡긴다.
발이 빠져드는 지형에서 기동하기 위해 고안한 기술이며, 그 요체는 순간적으로 체중을 무(無)에 가깝게 흐트러뜨리는 데 있다.
그리고 발끝에 디딤돌 삼을 무언가가 닿는 순간, 자연기로 몸을 띄워 올려 전진하는 것이다.
너른 하늘과 그믐 정도 되는 전사들은 깃털 날리기 하나만으로도 수면 위를 내달린다.
중원에서 일컫는 최상승의 경공술,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원리와 맥을 같이 하는 기예였다.
그렇다면 날아드는 검을 디딤돌 삼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기동에 목적을 두고 만들어진 기예일지라도 응용하기에 따라 회피 기술로도 얼마든지 활용가능하다.
번뜩이는 기지가 이루어낸 발상의 전환이었다.
야수들의 쾌속한 움직임을 잡아내던 동체 시력이 날아드는 분광검의 궤적을 세밀하게 쪼갰고, 맹수들의 일격을 흘리던 감각이 발바닥에 검이 닿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했다.
패애애액!
상단과 하단을 노린 검이 수평으로 누운 마른 비의 위아래 허공을 찢으며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중단을 노린 검은 포위진을 탈출하기 위한 훌륭한 발판이다.
검속에 맞춰 깃털 날리기를 발동한 두 발이 검날을 딛자, 곧 소년의 몸은 검이 흐르는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놓쳤어!”
교방의 경악성이 시장 거리를 울린 순간, 마른 비는 지면에 착지해 있었다.
“저기다!”
깃털 날리기가 유(柔)에 기반을 둔 운신법(運身法)이라면, 철저히 강(剛)에 치중한 운신법도 존재한다.
뿌리 내리기와 비슷한 방식이되 더욱 거세고 강렬하게!
자연기를 수직으로 내리꽂아 대지와 충돌시키고, 충돌 시의 폭발력을 기동을 위한 추진력으로 전환한다.
단거리 고속 이동 기예, 번갯불.
잔상조차 허용치 않는 와족 비전의 돌진기가 마른 비의 존재를 지웠다.
“엇! 어, 어디에?!”
야만인 소년의 형체가 꺼진 듯 사라지고, 교방은 소년의 번쩍이는 눈동자를 턱밑에서 발견했다.
탓!
경쾌한 발돋움과 함께 마른 비의 몸이 수직으로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