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소년의 눈은 상대의 인체 정중앙에 가상의 선을 그려놓고 있었다.
쾌애애액!
초격(初擊)은 오른발로 시작한다.
내뻗어진 발차기가 낭심을 가격하고, 연이어 내지른 왼발이 단전을 파괴한다.
다시 차올린 오른발이 명치를 짓이기고, 왼발은 재차 목젖을 뭉갠다.
마지막으로 오른발이 날아가 인중에 작렬하니, 이것이 바로 중선오격이다.
오직 인간을 부술 목적으로 만들어낸 그믐의 살상기가 교방의 신체를 산산이 바스러뜨렸다.
‘죽었어…….’
중선오격을 깔끔히 적중시킨 마른 비가 다리를 잘게 떨었다.
이 타격감… 이 감촉…….
발끝에 확실한 느낌이 남았다.
보나마나 즉사다.
연습 상대로 삼았던 불곰과 달리 인간의 몸은 중선오격을 견뎌낼 수 없다.
한 방만 허용해도 목숨이 오가는 급소 다섯 곳에 발차기를 꽂았으니.
실제로 교방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쿵!
‘내 손으로… 사람을 죽였어…….’
화통달을 도왔을 때와는 다르다.
살수들을 제압하긴 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첫 살인.
다리에서 시작된 떨림이 몸 전체로 번진다.
의지를 벗어나 경련하는 육신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의식마저 멍해지려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꼭 기억해라. 비아야. 싸우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언젠가는 싸워야만 하는 순간이 올 게다. 비아, 네가 살의를 품었다면 상대방도 너를 죽일 기세로 달려든 거겠지. 그렇다면 절대 망설이지 마라. 죄책감이나 후회도 살아 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우선 제압하고, 그 뒤에 힘들어해라.’
중선오격을 전수한 후.
양팔을 꽉 붙잡고 신신당부하던 그믐 할아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정신 차려. 아직 안 끝났어!’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사람을 죽인 건 처음이지만, 마른 비는 그 냉엄한 명제를 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야생에선 매 순간순간이 목숨을 건 생존 경쟁이며, 먹는 사냥꾼과 먹히는 사냥감이 있을 뿐이다.
‘망설이면 죽어.’
주마등처럼 스치는 상념.
죄책감이든 아쉬움이든 후회든 간에 싸움을 끝내고 생각한다.
육신의 떨림이 잦아들고, 바닥에 착지한 마른 비가 적들을 돌아봤다.
“교방아!”
“이 새끼가아아!”
교방의 죽음을 본 완기와 웅보는 이성을 잃었다.
큰 기술을 연달아 사용한 마른 비는 지쳐 있었고, 시간을 두고 차분히 압박한다면 아직 승기는 그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완기와 웅보는 나이에 비해 실전에 익숙치 않았다.
이익 관계가 어지러이 얽히며 온갖 다툼에 휘말리는 중원의 문파들과 달리, 마땅한 적이 없는 점창은 실전을 경험할 기회가 드물다.
부족한 경험과 미숙한 자제력.
냉철한 판단을 내리고 평정을 찾기에는 흩뿌려진 피가 너무도 진했다.
완기와 웅보는 손을 맞추지 않고 제각기 달려드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피슉!
“큭!”
동기의 죽음에 이성을 잃었다 한들 이십여 년간 연마한 점창의 무예가 녹록할 리 없다.
방어를 도외시한 채 공격 일변도로 달려드는 저돌성도 지친 마른 비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죽어어어어어!”
눈이 벌게진 채 휘두르는 검에 너 죽고 나 죽자는 동귀어진의 기세가 담겼다.
맞물려 돌아가는 합격진처럼 까다롭진 않지만, 섣불리 덤벼들면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기에 마른 비는 연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련과는 모든 게 달라.’
손을 맞춰 효율적으로 적을 살상하는 진형부터, 자신을 돌보지 않는 무모한 돌진까지.
야생 짐승들처럼 어느 정도 상처를 입히면 도망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을 상대로 한 실전은 예측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나도 각오해야 돼!’
모든 걸 찍어 누를 압도적인 무력이 있다면 모를까.
그저 약간의 우위를 점하는 정도로는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적을 상처 없이 제압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쪽 팔을 내준다.’
남은 힘을 집중하여 한 명을 쓰러뜨리고, 다른 한 명의 공격은 몸으로 받는다.
강피와 철골에 자연기를 둘러친다면 팔이 잘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
설령 잘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
소년은 빠르게 실전에 적응하고 있었다.
쒜에엑!
좌측.
두 눈에 자연기까지 깃들이며 달려드는 적을 힘껏 노려봤다.
눈으로 말한다.
내 너를 공격할 것이라고.
“바라던 바다! 야만인 새끼야! 덤벼어어어!”
흥분한 완기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천천히 간다.
낙엽 가누기와 구름 걷기를 동시에 발동하여 적의 이목을 흐린다.
그리고 한 가지만은 계속해서 암시한다.
반드시 너를 눕혀 놓겠노라고.
마른 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기만을 노려보며 좌측으로 전진했다.
“차압!”
완기 또한 전력을 다한 분광검을 눈부시게 쏟아냈다.
‘지금!’
우측에서는 완기를 지원하기 위해 웅보가 돌진해오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자연기가 지면에 내리꽂히며 강렬한 충격음을 터뜨렸다.
콰앙!
번갯불이 마른 비의 신형을 튕기고, 완기만을 노려보던 눈이 애초에 상정했던 목표로 옮겨간다.
“헛!”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야만인 소년 때문에 웅보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축 삼을 발도 필요 없다.
번갯불의 가속도와 적이 달려든 속도, 그리고 체중이면 충분하다.
속도를 등에 업고 자연기를 둘러친 어깨가 산을 허물어뜨릴 강대한 일격을 적에게 선사한다.
푸콰캉!
가로막은 검마저 부러뜨린 산 허물기가 웅보를 하늘 저 멀리 날려 보냈다.
가슴이 움푹 함몰된 걸로 보아 살기는 글렀다.
눈빛과 온몸으로 발산한 공격의 예고.
그리고 예상을 비트는 움직임.
아버지가 보셨다면 이번만큼은 혼나지 않을 것 같다.
“이 새끼가아아아!”
웅보마저 잃은 완기가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적은 이미 등 뒤에 도달했다.
공격 후에 찾아오는 찰나의 경직이 억겁처럼 느껴진다.
겨우 몸을 돌린 마른 비가 고갈된 자연기를 박박 긁어모아 왼팔에 집중시켰다.
“안 돼!”
간신히 움직일 힘을 회복한 여규가 땅을 박찼지만, 한참이나 늦었다.
마른 비는 눈을 부릅뜨고 곧 찾아올 통증에 대비했다.
퍼억!
깔끔하게 목 뒤를 내리친 수도(手刀)가 완기의 의식을 끊는다.
침통하면서도 무언가를 각오한 듯한, 복잡한 표정의 원승이 완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어…….”
예상치 못한 구원의 손길에 얼떨떨해진 마른 비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삐이이이익!
시장 거리 한구석에서 요란한 화살 하나가 날아올랐다.
효시(嚆矢).
‘우는 살’이라고도 불리며, 전장에서 미리 약조된 내용을 광범위한 지역에 전파할 때 쓰는 물건이다.
다만 이 효시는 단지 소리를 내며 솟구치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퍼엉!
충분히 날아오른 효시가 미리 장착돼 있던 폭죽을 터뜨리고, 이제는 제법 어둑어둑해진 대리의 밤하늘 위로 불똥을 퍼뜨렸다.
‘보라색?!’
불똥을 배경 삼아 아스라이 번지는 보랏빛 연무.
얼굴을 무섭게 굳힌 여규가 마른 비에게 소리쳤다.
“안 돼! 비아야! 뛰어!”
효시
《봉검(峰劍), 그리고 운검(雲劍).
세인들이 점창파를 이야기할 때 장문인보다도 먼저 떠올리는 절세의 무인들이다.
여휘와 여규라는 걸출한 부자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그 두 명의 대장로가 점창파를 대표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중원에서 운남으로 내려간 일단의 무인들이 창산에 자리 잡고 개파(開派)를 했던 순간부터, 그 이름은 점창의 상징이었다.
이미 중원에서 봉(峰)과 운(雲)의 별호를 얻은 두 명의 절정 무인이 초대 장문인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기실 별호에 검(劍)자가 들어가긴 하나 그것은 검을 썼던 초대 장문인에 대한 존경의 염인 동시에, 검만을 수련하는 점창의 특징을 반영하여 후대에 변형한 것이다.
원래 그들은 …… (중략) ……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무예를 후손들에게 전수했고, 그 명맥은 누대에 걸쳐 점창의 무공과 함께 발전하며 이어졌다.
특이한 것은 그들은 점창의 검을 익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광십팔수검을 위시하여 오랜 세월 훌륭하게 다듬어진 점창의 무학들을 참고만 할 뿐, 각 가문에서 차기 봉검과 운검으로 내정된 자는 가문에 전해 내려온 선조의 무공을 연성한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창의 진신무학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위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두 가문에서 배출한 당대의 봉검과 운검은 예외 없이 점창 최고수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고, 점창에 드리운 적들의 칼날을 막아내는 방패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봉검과 운검의 이름이 더욱 존중받는 것은 두 가문이 대를 이어 점창의 수호자를 자처할 뿐 어떠한 사리사욕도 내비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점창의 대장로이자 호법인 두 명의 무인은 …… (중략) …….
그러니 연자여, 점창의 문턱을 넘었을 때 검을 들지 않은 두 명의 노인을 마주친다면 한 걸음 물러서서 공경의 예를 갖출 것을 권하는 바이다.》
혼세록(混世錄) 인물편
「봉검, 그리고 운검」
삭월 월목대주 비아인 저
* * *
중원에 대한 향수일까.
아름다운 정원을 수놓은 꽃과 나무들은 운남에 자생하는 종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오래전, 점창파의 기틀을 닦은 시조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심은 중원의 화초와 수목들이었다.
공들여 가꾼 식물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새로운 토양과 기후에 완벽하게 적응했고, 본연의 청초함으로 정원을 찾은 이들에게 색다른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후우…….”
하지만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정자에 선 두 노인은 만발한 꽃들의 향연을 보면서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시름에 잠긴 노인들의 표정으로 보아 정원의 풍경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게 분명했다.
세월을 담은 미염(美髥)에서 그들의 근심이 하얗게 묻어나는 것 같았다.
“어찌 생각하시오? 운 장로.”
서릿발 같은 기세를 간직한 노인이다.
늙은이답지 않게 꼿꼿이 선 허리와 탄탄한 체구는 한창때의 젊은이 못지않다.
험준한 산악의 기운을 그 한 몸에 담은 듯 사위를 압도할 위엄이 후광처럼 뿜어져 나왔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봉 장로님의 생각과 같지요. 답답한 일투성이입니다.”
오직 점창을 위해 존재하는 이들.
봉검과 운검의 별호를 물려받는 순간, 그것이 여생 동안 불릴 자신의 이름이다.
종심을 바라보는 두 노인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놓은 지가 벌써 30년에 가까웠다.
평생을 점창만을 위해 살아왔거늘.
근 10년간 점창의 행보를 보고 있자면 자신들의 인생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성정이 괄괄하고 호방한 봉검 장로와 달리, 그 별호처럼 유유자적한 구름과 같다는 평을 듣는 운검 장로마저도 속이 미어지는 나날을 견뎌내고 있었다.
“현 장문인이 문제요.”
“…….”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다.
봉검의 직설적인 한마디에 운검이 암묵적인 수긍을 보냈다.
“도통 말이 안 되는 일들만 벌이지 않소이까. 전력 증강이라는 명목하에 외인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들인 게 벌써 10년이오.”
“…….”
“좋소, 백번 양보하여 그 일은 그렇다 칩시다. 제자들을 나누는 그 기준! 그 무슨 해괴한 짓거리란 말이오? 장문인의 제자는 일대 제자, 장로의 제자는 이대 제자, 나머지는 전부 다 삼대 제자라니? 배분이나 실력은 깡그리 무시한 채 이따위 기준을 적용한 이유가 무엇이겠소!”
“유환이를 차기 장문 자리에 앉힐 심산이겠지요.”
“그렇소! 혈족 승계라니! 사파 나부랭이들이나 할 법한 짓거리를 잘도!”
분을 못 이긴 봉검이 버럭 호통을 쳤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곱게 기른 백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후우… 말도 안 되는 일이 맞지요. 허나 여 장로를 파문한다는 장문인의 결정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뒤엎은 날 이후로, 장문인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믿고 지켜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언젠가는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을 날이….”
“그것도 어처구니가 없는 짓이오! 휘가 점창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했소이까! 현 장문인이 점창의 힘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 이의는 없소. 허나 점창이 구파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중원에서 이름을 떨친 휘가 있었기 때문이란 말이오! 한데 휘를 파문시키자니? 망발도 정도껏 해야 모른 척하지, 제지를 안 하게 됐소이까!”
봉검은 그간 쌓였던 울분을 토해내며 점점 격정적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의 흥분을 가라앉혀야겠다고 생각한 운검이 대화의 방향을 살며시 틀었다.
“그 아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지요?”
“누구 말이오?”
“여 장로의 아들 말입니다. 규.”
“아! 여규! 그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