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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59화 (59/463)

59화

“효시라니? 무슨 일인가, 이게?”

“저 위치면 대리 한복판입니다. 와족이 벌써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는데…….”

공지량과 지석인은 난데없이 솟은 효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엄중한 시기에 보랏빛 연무가 쓰일 일은 오직 하나, 와족의 출현뿐이다.

하지만 수뇌부가 이끄는 와족의 전사들은 창산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진격해 오는 중이다.

그들이 지금 대리에 나타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별동대인가?’

그럴 가능성도 현저히 낮다.

그간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추측건대 전투가 벌어지기 전, 와족이 보유한 정예 전사의 숫자는 기껏해야 삼백 명 안팎이었다.

운남 각지에서 출몰한 맹수들을 막느라 그들은 별동대를 따로 운영할 여력이 없었다.

설령 별동대를 꾸렸더라도 창산을 습격할 일이지 대리 한복판에서 서성거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정찰병을 발견했을 확률이 가장 높겠군.’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지석인은 이, 삼대 제자들이 대리를 향해 출동하는 걸 지켜보며 상황을 가늠했다.

똑똑. 벌컥!

“장문인! 보랏빛 연무라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오?”

그저 문을 두드리는 격식을 갖추는 정도로 충분하다.

공지량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최소한의 예만 갖추고 집무실 문을 열어젖힐 수 있는 두 남자.

봉검과 운검 장로가 오랜 은거를 깨고 공지량을 찾았다.

‘아차! 장로님들께서도 보신 거구나!’

지석인이 움찔하고, 공지량은 그에게 짧은 눈짓을 주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년간 후원에서 칩거했던 두 장로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보랏빛 연무는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공지량이 뒷짐을 풀고 두 장로를 돌아봤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장로님들. 수년 전에 여 장로의 파문 건을 이야기하며 뵈었을 때가 마지막이지요, 아마?”

봉검이 눈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장문인은 일부러 저 말을 꺼낸 게 틀림없다.

아직 잊지 않고 있노라고.

실제로 자신들이 칩거한 이후, 장문인은 한 번도 자신들을 찾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이 좀생이 같은…!’

봉검이 울컥하여 한마디 내지르려는 찰나, 운검이 앞으로 나서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장문인. 오랜만에 뵙는데 인사를 드리는 것도 잊었소이다. 보랏빛 연무에 놀라는 바람에 그만. 어찌된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소?”

수년 만에 얼굴을 마주했고, 지나간 일을 들추어 상황을 악화시킬 필요는 없다.

보랏빛 연무가 오른 이상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니까.

그런 면에서 선수를 친 운검의 행동은 꽤나 적절한 면이 있었다.

“흠. 보랏빛 연무가 뜻하는 건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적을 발견했다는 뜻이지요.”

“적이라니? 감히 점창에 칼을 들이댄 자들이 있단 말이오?”

“그간 사문의 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제자들 모두가 전투 준비 태세에 들어가 있는데도 두 분께선 유유자적 세월을 낚고 계셨나 보군요.”

서로가 알고 있다.

두 장로가 여휘의 파문에 반대한 이후, 그들에게 들어가는 모든 정보를 공지량이 의도적으로 차단시켜 왔다는 것을.

하지만 공지량은 모르고 있다.

봉검과 운검이 뒤로 물러나 답답한 생활을 지속해온 것은 그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점창의 상황을 알 수 있고, 개입할 수 있음에도 두 장로는 그러지 않았다.

봉검가와 운검가는 물론이거니와 각 가문에 상주하는 봉검대와 운검대조차 산에서 멀찍이 떨어뜨린 채 수련에만 매진케 했다.

그 모든 것이 장문인에 대한 두 사람 나름의 배려였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유자적?’

한 토막의 소식도 전해지지 않게 지시한 게 본인이면서 저따위 뻔뻔한 말을 내뱉다니!

봉검의 얼굴은 벌게져서 곧 노기를 토해낼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먼저 나서서 충돌을 막은 건 운검 장로였다.

“허허… 그리 보았다면 그건 좀 서운하구려. 그나저나 감히 점창에 검을 들이댄 방자한 녀석들이 누구요, 장문인? 중원에서 쫓겨난 사파 녀석들이라도 운남에 흘러들어 온 겝니까?”

공지량이 곧 보게 될 장로들의 반응을 기대하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와족. 와족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지요.”

“뭐, 뭐라?!”

“와족! 와족이라 하셨소이까, 지금?”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그들이지만, 이번만큼은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30년 전, 와족과의 전쟁에서 선봉에 섰던 두 사람이다.

아직 봉검과 운검의 이름을 달기 전.

차기 봉검과 운검으로 확실시되는 후기지수였던 그 때.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운남의 소수부족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했고, 당대의 운검과 봉검은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오.’

비슷한 또래의 와족 사내는 자신들에게 첫 패배를 안기고도 목숨을 빼앗지 않은 채 등 돌려 멀어져 갔다.

‘우리의 잘못이었어.’

문파의 힘을 키운다는 목표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 정도를 벗어났다.

아창족의 터전을 힘으로 침범했고, 전투가 벌어지자 그들을 몰살했다.

그건 분명 씻을 수 없는 과오였다.

“왜… 왜 그들과 다툼이 벌어진 것이오, 장문인?”

갑자기 튀어나온 운남의 원시부족에게 겪은 치욕적인 패배.

전쟁이 끝나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했다.

규격외의 맹수들이 날뛰는 땅에서, 아무 대가도 없이 힘없는 소수부족들을 지켜주는 운남의 수호자.

그들은 의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대대로 의협을 행해온 자들이었다.

봉검과 운검은 패배의 아픔보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궈야만 했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그들이라면 아무 이유 없이 점창과 충돌할 리가 없었다.

“그 미개한 야만인 놈들이 다짜고짜 침공을 시작했지요.”

“그럴 리가! 노부가 아는 그들은…!”

“장로님께서 기억하는 그들이 아닙니다. 저 역시 어렸지만 그 싸움에 참전하지 않았습니까? 30년이란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하지요.”

‘한심한 늙은이들 같으니…!’

욱일승천하던 점창을 20년 가까이 주저앉힌 와족이다.

대장로들은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모양이지만, 공지량은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치욕스런 패배를 안긴 적.

게다가 문명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야만 부족이 아닌가.

하지만 굳이 속마음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전쟁의 원인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게 하고, 두 장로의 참전을 유도하는 걸로 충분했다.

“정당히 주고받은 토지 매매 건에 대해 트집을 잡더군요. 저는 행여나 있을 오해를 피하기 위해 유립이까지 사절로 보내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허나 족장이란 자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식의 서신을 보내왔지요. 그리고 끝내 침공을 시작한 겁니다.”

“……내 장문인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나 이런 중대한 사안이라면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하오. 사건의 정확한 내용을….”

“장로님. 그들은 이미 창산을 향해 밀어 닥치고 있습니다. 길어야 2주 후면 도착할 것이고, 양측의 명운을 건 전투가 벌어지겠지요. 되돌리기는 늦었습니다.”

봉검과 운검 장로가 사안을 파고든다면 자신이 벌인 협잡에 가까운 행위들을 금세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전투는 끝난 후이고, 운남에서 유일한 걸림돌인 와족은 전멸해 있을 테니까.

광활한 땅과 운남의 특산품들이 점창의 손에 확실하게 들어올 것이며, 무엇보다 금광을 소유하게 된다.

혹시 누가 아는가.

전쟁의 와중에 늙은 장로들이 운명을 달리할지.

그래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건 이 전쟁에 봉검과 운검 장로,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봉검대와 운검대의 힘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전쟁만 끝나고 나면.

어찌 되든 상관없다.

“왜 이런 엄청난 일을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사문의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건 두 분이십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그건 장문인을…!”

“상황이야 어찌 됐든 저는 두 분을 존중합니다. 안 그래도 알려 드리려던 참이었지요. 지 대주가 전쟁에 대한 내용을 두 분께 전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습니다. 안 그런가, 지 대주?”

“예, 맞습니다. 장문인. 보고드릴 내용을 이렇게 서류로 정리해서 찾아뵈려던 참이었지요.”

지석인은 어느새 글자가 빽빽하게 적힌 문서를 곱게 접어 양손에 들고 있었다.

“흐음…….”

미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지만 지금은 따지고 들 수 없다.

장문인은 철저하게 준비했고, 자신들은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와족이 창산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다는 내용은 두 장로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곧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두 분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지요. 장로님들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합니다. 제가 못마땅하더라도 점창의 제자들을 위해 함께해주셨으면 합니다.”

방금 전까지 불만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며 몰아세우더니, 갑자기 태도를 전환하여 이제는 힘을 빌려달란다.

그 순간 공지량의 눈빛은 귀인을 등용하기 위해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위정자의 그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허어…!’

지석인은 필요한 가면을 제때 골라 쓰는 데 있어 공지량을 따라갈 사람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알겠소. 장문인. 끔찍한 일이 또다시 벌어졌구려. 전쟁이 시작됐다 하니 인과관계를 따지는 일은 잠시 미뤄두겠소. 미력한 노구들이 보탬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소이다.”

공지량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삐이익― 펑!

또다시 솟아오른 효시가 이번엔 붉은 연무를 피워 올렸다.

* * *

여규와 원승에게 작별 인사를 한 마른 비는 대리고성의 동쪽 성문을 빠져 나가기 위해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를 잡으려는 점창의 제자들은 분명 창산이 위치한 서쪽에서 쏟아져 내려올 것이다.

마른 비가 진로를 동쪽으로 잡은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큰길은 위험해. 집들이 모여 있는 뒷길이나 골목 쪽으로!’

시장 골목을 벗어나 민가가 집중된 지역에 접어든 순간, 좌측 건물의 지붕에서 검은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촤아악!

“큭!”

위에서부터 어깨를 찍어오는 검을 간신히 비켜냈지만, 완전히 흘리진 못했다.

마른 비의 좌측 어깨 뒤쪽으로 새빨간 혈선이 그어졌다.

‘벌써 따라붙었어?! 아니, 그보다 이렇게 다짜고짜?’

원승의 조언이 맞았다.

암습자는 아무런 예고 없이 공격해왔다.

그리고 그 검은 아까 쓰러뜨린 두 명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치명적이었다.

“차앗!”

본능적으로 쳐낸 날짐승 떨구기가 검을 회수하는 적에게 날아가 꽂혔다.

스팟-!

‘피했어?!’

깔끔한 적중을 자신했다.

하지만 상대는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회심의 반격을 무위로 돌렸다.

스르륵-

회피와 동시에 거리를 벌린 암습자가 민가의 어딘가로 스며들었다.

‘검은 수리 전사들의 은신!’

시장 거리에서 쓰러뜨린 놈들처럼 정면으로 검을 맞대는 부류가 아니다.

암습을 주력으로 삼는 검은 수리들처럼 은밀한 공격에 특화된 자가 분명했다.

‘굳이 싸울 필요 없어.’

시간이 촉박하니 무시하고 달린다.

도주를 위해 땅을 박차고 집 하나를 지나는 순간, 울타리 사이로 시퍼런 검이 번뜩였다.

촤악!

“크윽!”

야생에서 갈고 닦은 감각으로 겨우 몸을 틀어 피했지만, 허리 부근에 상처가 남았다.

바위 부수기로 반격을 시도해봤으나 적은 이미 간격을 벗어나 지형지물에 녹아든 후였다.

‘이차 공격은 염두에 두지도 않아. 한 차례 검을 내지른 후엔 뒤도 안 돌아보고 몸을 뺀다.’

철저히 암습에만 치중한 전투 방식이다.

얄미울 정도로 효율적인 싸움법이었다.

‘시간이 없는데…… 발이 묶였어.’

달려 나가려는 순간마다 맥을 끊는 암격이 날아든다.

마른 비의 얼굴에 난감함이 차올랐다.

‘꼬맹이가 이런 매서운 공격을…!’

작은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준일은 철렁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감이 엄청나게 좋아. 이동하는 와중에도 암습을 감지하고 피해낸다. 감각이 거의 동물적인 수준이군.’

응목대의 부조장인 자신이 저런 꼬마 하나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다.

암습의 이점 덕분에 선공권은 자신에게 있지만, 딱 거기까지.

수많은 임무에 투입되고 전장을 누벼온 무인의 감이 말한다.

일격 이후에 바로 몸을 빼지 않으면 당하고 말 거라고.

마른 비의 생각과 달리 준일은 이차 공격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고 있는 거였다.

‘놓쳐선 안 돼. 시간만 끌자. 지원 병력이 곧 올 거야. 근데 이놈들은 효시를 띄운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

무려 와족 족장의 아들이다.

무조건 잡아야 한다.

한데 지원군은 여태껏 감감무소식이었다.

마른 비만큼은 아니지만 준일도 초조한 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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