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못 갑니다.”
이백에 가까운 무인들을 가로막은 소년.
겉모습은 엉망일지라도 눈빛 하나만큼은 형형하게 타오른다.
사형제들 앞에 버티고 선 여규는 그와 같았다.
삼대 제자 원승 또한 결연한 얼굴로 그 옆을 받치고 있었다.
창산에서 몰려나온 점창의 제자들이 어이없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여규, 원승. 네놈들이 정녕 미친 거냐?”
쫙 갈라지는 무인들 사이로 호국영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꽤 시일이 지났고, 창산의 명의들이 달라붙은 덕에 잎의 노래에게 당했던 어깨는 불편함이 없어보였다.
“아뇨. 미친 건 여기 누워 있는 이놈들이겠죠, 호 사형.”
여규는 호국영의 사나운 기세를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받아넘기고 있었다.
이채를 띤, 하지만 곧 무시무시하게 변한 눈동자가 여규를 훑었다.
이제는 옅은 살기까지 흘려내는 그가 여규를 난도질할 듯이 노려봤다.
“시건방진 말대꾸는 여전하구나. 다급한 상황이니 너에 대한 처벌은 뒤로 미루겠다. 보라색에 이어 붉은색 연무까지 올랐어. 적들은 어디에 있지?”
“적……. 와족이니 적인 건 맞겠네요. 하지만 그 이전에 제 친구입니다. 전쟁이 터졌다는 것도 모르고 제 손님으로서 대리에 온 거였고요. 여기 쓰러져 있는 사형이란 작자들이 저를 죽이려 할 때, 제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지요. 나중에 전장에서 만나게 될지라도 그건 차후의 일. 저는 녀석을 무사히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친구? 친구라? 와족이 말이냐? 그놈이 첩자로서 너에게 접근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하나? 이 엄중한 시기에 적진에 들어온 게 그저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였다고? 어떤 멍청한 놈이 그런 짓거릴 하겠느냐?”
“제대로 보셨네요. 멍청한 놈 맞습니다. 멍청한 데다 무식하기까지 하죠. 거꾸로 묻겠습니다. 호 사형이 첩자라면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도 듣지 못한 저 같은 외톨이에게 접근하겠습니까? 무슨 이득이 된다고? 게다가 목숨을 걸고 싸움판에 끼어들어서 저를 살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게 첩자가 할 행동인가요?”
호국영이 얼굴을 씰룩거렸다.
그의 눈자위에 붉은 살의가 깃들기 시작했다.
“모를 일이지. 여규 네놈이 놈과 내통을 했을지도. 넌 청목을 상처 입혔고, 적을 무사히 돌려보내기 위해 사형제들의 앞을 막아섰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죄를 저질렀단 말이다! 조금이라도 처벌을 경감시키고 싶다면 당장 비켜라.”
“제가 보았습니다.”
한 발 앞으로 나선 원승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청 사형은 다짜고짜 시장 거리 한복판에서 여 사형의 배를 걷어차고 구타를 시작했지요. 검을 뽑은 것도, 살의를 품은 것도 청 사형이 먼저였습니다. 청 사형이 쓰러지자 남은 세 명의 사형들이 달려들었고, 와족의 소년은 여 사형을 지키기 위해 난입했습니다.”
“어찌 됐든 사제가 사형에게…!”
“설마 살의를 품고 달려드는 상대에게 죽어주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겠지요? 여 사형이나 그 소년이나 정당방위였을 뿐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건대 거짓은 없으며, 그 소년 또한 첩자가 아니라는 데 제 목을 걸겠습니다.”
정대한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와 대리를 수놓는다.
여휘에 비해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나, 점창에 입문하기 전, 드높은 협의로 호북성 일대에서 유협(遊俠)이라 불렸던 원승이다.
원 치하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하고 자괴감에 빠져 정처 없이 떠돌던 그였으나, 여휘를 만난 이후 길었던 방황을 끝냈다.
저 공지량조차 원승의 명성과 실력을 높이 사서 삼대 제자인 그를 공유환 곁에 붙여 두었을 정도다.
오랜 침묵의 시간을 넘어 진면목을 드러낸 그의 앞에서 점창의 제자들이 움츠러들며 물러섰다.
치부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건 물의를 빚은 당사자였다.
부상당한 어깨를 움켜쥔 채 구석에서 눈치를 보던 청목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개, 개소리하지 마라! 어찌 됐든 여규 저놈은 사형인 나에게 검을 들이댔어! 어디서 감히 삼대 제자 따위가 세치 혀로 모두를 농락하려 하느냐! 네, 네놈도 완기를 공격하여 기절시켰지! 곱게 물러나 죗값을…!”
“그럼. 사제란 이유 하나만으로 부당한 핍박을 감내하란 말입니까? 사형이 죽이려 들면 저항 없이 목을 내줘야 한단 말이오?”
서른이 될 때까지 강호를 누비며 지겹도록 실전을 겪은 원승이다.
그 후 점창에 입문한 지 수년.
기존의 무공에 점창의 기본공을 더해 일취월장한 그의 기세를, 반듯한 청석 바닥 위에서 노닥거리던 청목 따위가 받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잔뜩 위축된 청목이 말까지 더듬으며 뭐라 웅얼거렸다.
“그, 그래도 여규 저놈은 용서할 수 없는…. 그 와족 놈은 교방과 웅보를 죽였…. 그놈, 그놈 와족 족장의 아들인데…. 잡아야 하는데…….”
“뭐라고?!”
점점 기어들어가는 청목의 음성 중 절대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를 잡아낸 호국영이 거칠게 외쳤다.
“청목! 방금 뭐라고 했냐! 다시 똑바로 말해 봐!”
“네… 네? 어떤 걸 말입니까?”
“족장의 아들? 방금 족장의 아들이라고 했나?!”
“아, 네… 알고 오신 거 아닙니까…?”
호국영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효시에 장착된 보랏빛 연무가 터진 후 연달아 올라온 붉은빛 연무.
한데 막상 내려와 보니 여규의 친구라는 와족 꼬마 한 명이 나타난 것일 뿐 붉은빛을 쏘아 올릴 만큼 중대한 사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꼬마가 족장의 아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붉은 연무가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었다.
상황을 지켜본 두 명의 응목대원 중 준일은 말을 전할 겨를 없이 마른 비를 뒤쫓았고, 다른 한 명은 바로 창산의 장문전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출동한 이, 삼대 제자들이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호국영의 눈이 희열로 번들거렸다.
‘하늘이 나를 연이어 돕는구나! 그 꼬마만 인질로 잡으면…!’
호국영이 앞에 버티고 선 원승을 힐끗거렸다.
‘여규는 문제가 안 돼. 까다로운 건 원승. 입문하기 전에 이름을 날렸다고는 들었지만, 아까의 기세!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보다도 윗줄이야. 그렇다면…….’
계산을 마친 호국영이 원승에게 눌려 뒤로 물러선 제자들에게 명을 쏟아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금원! 열 명을 남길 터이니 여규와 원승, 저 ‘내통자’ 두 놈을 제압해라! 부상을 입혀도 상관없다! 나중에 산으로 끌고 가 장문인 앞에서 엄히 다스릴 것이야! 나머지는 전부 나를 따른다! 무슨 수를 쓰든 그 꼬맹이를 사로잡아야 해!”
언어의 힘은 강력하다.
호국영은 여규와 원승을 내통자라고 단정 지어 말했고, 그것은 그들과 대치한 점창 제자들의 뇌리에 박혀 들었다.
사문을 배신한 내통자.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청목의 처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저들은 사형제를 상처 입혔다.
곧 전장에서 마주할 적장의 아들, 더군다나 사형제를 둘이나 살해한 범인을 감쌌다.
그리고 그자를 탈출시키려고 또다시 사문의 식구들과 맞서고 있다.
내통자라는 혐의를 받고도 남을 일인 것이다.
호국영이 힘주어 말한 세 글자는 원승의 기세에 눌려 주춤했던 제자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그 분노는 온전히 여규와 원승에게 향했다.
“쳐라!”
점창의 제자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 * *
‘쓰러뜨려야 돼.’
적을 눕히지 못하면 전진은 없다.
몸을 숨긴 암습자는 도주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떨쳐낼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마치 이건…….’
성년식이 시작됐을 때.
마을을 나와 처음으로 원시림에 진입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이쪽은 훤히 노출된 반면, 적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싸우고 싶어도 선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적의 시야에서 사라져 동등한 상황을 만드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도시 밖이었다면…….’
이곳은 마른 비에게 익숙한 산과 들, 숲이 펼쳐진 자연 지형이 아니다.
바닥에 깔린 돌과 좌우에 꽉 들어찬 건물들, 심지어 기둥 하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인공적인 조형물들이 뿜어내는 숨결은 지금껏 마른 비가 경험한 대자연의 호흡과는 전혀 다른 세기와 박자로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미약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가늘어.’
이 모든 것들은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문제는 인간의 손을 타며 강제로 잘리고 깎여 변형되는 사이, 본연의 호흡과 기운을 잃어버렸다는 것.
만개한 대자연에 비하면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어버린 지형지물이다.
그것들이 내쉬는 호흡과 박자는 감각이 뛰어난 마른 비조차 느끼기 힘들 정도로 가늘고 더뎠다.
‘무조건 해내야 해!’
나무와 땅, 동물들의 숨결을 느끼고 일체화를 이루었던 것처럼 인공물로 가득 찬 이 낯선 곳의 호흡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하나가 되어 지형에 스며들어야 한다.
해내지 못하면 적들의 손에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관조.’
최단 시간 내에 적응하여 지형에 녹아든다.
그리하여 막아선 적을 거꾸러뜨리고 활로를 열 것이다.
감았던 눈을 번쩍 떴을 때, 소년은 시가전(市街戰)에 돌입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기운이 너무 미약해.’
대자연 안에서 조화롭게 생동하던 자연물들과 인간의 손을 탄 인공물들은 뿜어내는 숨결의 밀도와 기운 자체가 달랐다.
마른 비는 잘리고 깎이며 부수어진 자연물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그래도… 자연기는 분명히 존재해.’
하지만 그 안에도 자연기는 흐르고 있다.
만개한 대자연의 그것에 비할 수 없을 뿐.
다행히도 타물과의 일체화에 있어 기운의 세기는 중요한 게 아니다.
다양한 지형지물이나 다종의 생물이 내뿜는 고유의 호흡과 자연기를 느끼고, 거기에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야생에서 터득한 관조를 통해 마른 비는 도시를 구성하는 인공물들의 가는 숨결을 읽어냈다.
‘죽은 듯이. 한없이 가늘고 더디게.’
마른 비의 심장 박동이 현저히 느려지고, 들이마시고 내쉼을 알기 어려울 만큼 호흡이 잦아들었다.
스아악―
우두커니 서 있던 마른 비가 발을 뗀 순간.
소년의 신형이 골목 사이로 빨려들 듯 스며들었다.
‘아니?!’
준일은 마른 비를 암습하기 위해 서서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야만인 소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주를 포기한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고, 그건 검을 찔러 넣을 최적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인질로서 비할 데 없는 가치를 지닌 대상이니 죽여선 안 된다.
대신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부상을 입혀서 무력화시키리라.
곧 시작될 전쟁에서 승리에 기여할 포석을 마련한다면 차기 응목대주도 꿈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깨를 노리며 검을 뻗은 순간, 소년은 발걸음을 내딛었고, 한순간에 골목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뭐야? 은신을 수련했던 건가?’
놀랍다.
하지만 그 뿐이다.
경지에 이른 은신술이란 절대로 하루아침에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무공 연마가 그렇듯이 몸을 숨기는 기예 또한 지난한 수련과 목숨을 건 실전, 충분한 세월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고작 십 대 중반의 꼬맹이가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없어?!’
준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없다.
아니, 기감에 잡히지 않는다.
소년은 분명 골목 어딘가로 숨어들었건만 오감은 물론이고 확장시킨 기감에도 걸리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런 꼬맹이가 은신을 제대로 터득했다고?’
불가능하다.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소년은 준일의 상식을 일거에 허물었다.
기감을 아무리 예리하게 가다듬어도 준일은 마른 비의 기척을 감지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