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61화 (61/463)

61화

‘호흡.’

지붕의 뼈대를 이루기 위해 일정 간격마다 배치한 서까래는 운남에 자생하는 오동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다.

잘리고 깎인 오동나무는 야생의 녀석들과 같은 호흡을 잘게 내쉬고 있었다.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희미했지만, 야생에서 갈고 닦은 마른 비의 기감은, 그리고 야생초가 더해져 극적으로 확장된 감각은 그 숨결의 높낮이와 박자를 정확하게 잡아냈다.

‘자연기.’

본래 오동나무는 무던하고 편안한 느낌의 기운을 뿜는다.

하지만 팔다리가 잘리고 몸통까지 반으로 분질러져 지붕을 위한 재료가 되어버린 녀석은 특유의 자연기가 변질되어 버렸다.

텁텁하고 성마르다.

신경질적이고 거칠다.

야생의 식물들에게서는 느끼기 힘든 감각이었다.

하지만 동조한다.

느끼기가 어렵지, 감지에 성공한 이상 감응으로 넘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른 비의 호흡과 자연기가 오동나무의 그것에 일치된 순간, 촘촘하게 늘어선 목재들 사이로 새로운 서까래 하나가 더해졌다.

‘이, 이럴 수가…! 못 찾아. 완전히 녹아들었어!’

오감은 물론이거니와 탐색을 위한 기감을 아무리 끌어올려도 야만인 소년의 위치가 잡히지 않는다.

소년은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분명히 이 주변에 있어. 한데…!’

찾을 수 없다.

눈앞에 있던 녀석을 놓치다니.

잔뼈가 굵은 무인도 아니고 고작 십 대 중반의 꼬마를?

준일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귀식대법(龜息大法)인가?’

중원에서 이름을 날리는 살수라면 누구나 체화시킨 암살자들의 기본공.

기를 통해 신체의 활동을 극한까지 억제시켜 죽은 것과 다름없는 가사상태에 접어든다.

바로 옆에서도 숨 쉬는 걸 알아채기 힘들 만큼 가늘고 낮게 호흡하며, 호흡을 제외한 모든 생명 활동을 정지시킨다.

목표가 나타날 때까지.

완벽한 은신을 위해 일시적으로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적이 존재를 알아채기 힘들어지며, 가사 상태에서 깨어나 육체를 활성화시키는 시간이 단축된다.

몸을 숨기는 건 물론이거니와 적에게 발각될 확률을 비약적으로 낮춰주는 기공.

살수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첩보대원이나 정찰대원까지 귀식대법을 수련하는 이유였다.

‘아냐. 깨어나는 건 몰라도 가사상태로 빠져드는 건 시간을 필요로 해. 그리고 귀식대법은 시전 중에 움직이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놈은 도주를 해야 해. 이건 귀식대법이 아니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다.

아무리 잘 숨었다 해도 지원군이 도착하는 순간, 야만인 소년은 잡힐 수밖에 없다.

정 못 찾을 경우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과 지형을 들어 엎으면 되기 때문이다.

‘단목(鷻目)이라고 했었지. 정보를 다룬다는 와족의 무력 집단. 그들이 암습을 할 때 사용한다는 은신술이 틀림없어. 그렇다면…… 이동 중인가?’

수리의 눈 전사들의 은신술 역시 마른 비의 그것처럼 지형지물과의 일체화에서 비롯된다.

자연기를 정제하여 내공을 쌓고, 그 내공에 맞는 심법으로 은신에 돌입하는 중원의 무인들과 달리 와족 전사들은 순수한 자연기를 그대로 활용한다.

중원의 은신술과는 궤를 달리하는 와족 특유의 기예이며, 그것은 꾸준한 이동이 가능하다는 보고를 읽은 기억이 있다.

준일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거리를 벌리려 할 게 틀림없어. 어느 정도 멀어진 후에 내달리면… 잡을 수 없다! 동쪽. 꼬마는 분명히 동쪽으로 갈 거야.’

그의 눈이 민가의 밀집 지역을 넘어 대리고성의 동문을 향했다.

이대로 있다간 놓치고 만다.

다소의 기척을 흘리더라도 따라가야만 했다.

준일이 담벼락을 타고 미끄러지듯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움직였다!’

마른 비가 몸을 숨긴 지붕 아래의 담벼락.

그늘이 져 어두운 벽면, 그중에서도 땅과 담벼락이 직각으로 만나는 지점에서 검은 그림자가 꿈틀대고 있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미세한 변화다.

하지만 은신 중에 몸을 움직이는 것치고는 상당한 속도였다.

마른 비의 눈이 적의 이동 경로를 앞질렀다.

‘동쪽! 도주한다고 생각하고 쫓기 시작한 거구나! 움직이지 않고 시간을 끌었으면 곤란할 뻔했어. 다행이야.’

이쪽만 훤히 드러난 상황에서 대등한 조건을 만들려 했을 뿐인데, 상대가 오해하고 자신의 위치를 드러냈다.

마른 비에게는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암습은 상대가 훨씬 더 능숙해. 대치하는 상황으로 가면 안 돼. 기회는 단 한 번! 상대의 주의가 정면에 쏠려 있을 때 배후에서 급습한다. 그걸로 저 사람을 쓰러뜨리고 가는 거야.’

마른 비의 눈이 처마 밑으로 늘어선 서까래들을 따라 가상의 이동로를 그렸다.

끝이 하늘을 향해 들린 추녀까지만 가면.

적이 지나칠 경로, 그 위의 공간을 선점할 수 있다.

‘시간이 없어!’

적은 담벼락을 타고 계속해서 이동 중이었다.

다행히도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서까래가 줄지어 있고, 서까래 바로 밑에 길게 놓여 지붕의 하중을 지탱해주는 도리 또한 오동나무다.

자연기와 호흡은 현 상태를 유지하면 된다.

그러면 발각될 리 없으며, 기척을 흘리지 않고 이동하는 일만이 남는다.

그리고 마른 비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결.’

수평으로 길게 놓인 도리를 타고 소년의 몸이 흐르기 시작했다.

야생에서 그물무늬비단뱀을 모방하며 수시로 변하는 대지의 결마저 읽어냈던 마른 비다.

인간의 손을 타고 말끔하게 다듬어진 목재의 결을 파악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웠다.

일말의 기척도 흘리지 않는 인간 뱀이 지붕 밑의 어둠을 가르고 순식간에 추녀까지 도달했다.

‘하나… 둘…….’

담벼락을 타고 꿈틀대는 그림자는 마른 비보다 느렸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이동하는 걸로 보아 머리 위에 도사리는 어둠을 알아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셋!’

인공 지형에서의 은신과 기동을 터득한 소년이 추격자를 물리치기 위해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 * *

“붉은빛 연무?!”

단순한 점창의 적대 세력을 확인한 거라면 보랏빛 연무로 족하다.

붉은색은 촌각을 다투는, 훨씬 더 중차대한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공지량과 지석인, 봉검과 운검의 얼굴이 일시에 굳었다.

“장문인. 붉은빛이라면 적들이 쳐들어왔다는 뜻이 아니겠소이까?”

전쟁에 가담하기로 결정한 봉검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봉검대와 운검대를 소집할 기세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봉검 장로님. 적들이 이 시점에 들이닥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지석인은 그가 발한 언어에 확신을 담고자 노력했지만, 눈빛은 가늘게 떨렸고,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깃들었다.

보랏빛에 이은 붉은빛.

웬만해선 연이어 올라올 연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 대주. 그럼 이 시점에 저 색깔이 의미하는 바가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장문인, 우리는 봉검대와 운검대를 소집하겠소.”

미심쩍은 부분이 존재하지만, 가세하기로 한 이상 모든 의문을 뒤로 미룬다.

사문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는데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녹슨 감각을 되살리는 게 문제군.’

30년 전, 자신과 운검을 눕힌 와족의 사내를 떠올리며 봉검이 문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했다.

“장문인! 급보입니다! 와족 족장의 아들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온 응목대원의 보고에 문을 나서려던 봉검의 발이 멈췄다.

“족장의 아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공지량이 미간을 좁혔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명료하게 정돈되어 있던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졌다.

족장의 아들이란 말이 지금 왜 튀어나온 건지 도무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와, 와족 족장의 아들이 지금 대리에 나타났습니다!”

“……뭣이라?”

이게 무슨 소린가.

와족 족장에게 아들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있다고 해도 그런 중요한 인물이 지금 대리에 나타날 이유가 없지 않나.

집무실 전체에 혼란을 동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말을 잃었던 공지량이 입술을 뗐다.

“족장의 아들이 대리에 왜? 무슨 목적으로? 정찰대? 별동대? 아니지. 본대가 저 아래에 있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중요한 인물을 사지(死地)에……. 족장의 아들인 건 확실한가? 그게 사실이라면 그자가 이끄는 야만인 놈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냐?”

공지량이 연달아 질문을 쏟아냈다.

“혼자입니다.”

“……네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공지량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저, 정말입니다. 장문인! 정말 혼자 나타났습니다!”

“이 엄중한 시기에 족장의 아들이 혼자 대리에 왔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좋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그, 그게… 이대 제자 여규의 친구라고……. 둘이서 대리 구경을…….”

“…….”

진노한 눈동자가 응목대원의 전신을 후벼 팔 듯 노려봤다.

‘이놈이 마환산(魔幻散)이라도 하는 건가?’

대리와 곤명 일대에는 운남에 자생하는 붉은 꽃을 빻은 후 코로 흡입하거나 태워서 피우는 소수부족들이 있다.

본디 심한 상처를 입은 환자에게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해 사용해온 민간처방의 일환이었으나, 그것이 주는 환각 작용을 알게 된 자들은 쾌락, 또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마환산을 애용해왔다.

그들과 어울리다 접한 마환산에 중독되어 폐인이 된 제자가 나온 후로, 점창파에선 마환산을 엄금해왔다.

응목대원의 보고는 공지량으로 하여금 한참이나 잊고 있던 마환산을 떠올리게 할 만큼 현실성이 없었다.

“와족 족장의 아들이 여규와 친구 관계다, 그래서 점창의 영역까지 여규를 만나러 와서 대리를 구경 중이다. 전쟁을 앞둔 이 삼엄한 시기에 말이지. 내가 이해한 게 맞는 거냐?”

딱딱하게 굳어진 공지량의 얼굴에는 이제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보고를 믿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응목대원이 꿀꺽 침을 삼킨 후 차분하게 말했다.

“장문인. 믿기 어려우실 거라는 걸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여규도, 족장의 아들이라는 소년도, 전쟁이 터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족장의 아들은 여규를 해하려고 달려드는 교방, 웅보를 막아섰고, 결국 그 둘을 살해했습니다. 뒤이어 원승은 그 소년을 공격하는 완기를 기절시켰지요. 그리고 여규와 원승은 소년의 도주를 도왔습니다. 5조 부조장 준일이 뒤를 쫓고 있습니다. 장문인, 놓치지 않으려면 속히 지원을….”

“뭣이라? 누가 죽어?!”

“여규? 휘의 아들 여규를 말하는 게냐? 교방과 웅보가 규를 해하려 했다는 게 무슨 소리냐?!”

“여규와 원승이 적을 도왔단 말이냐?!”

사방에서 경악 섞인 외침이 튀어나왔다.

장문인에 응목대주만으로도 어려운데 봉검과 운검, 두 명의 대장로까지 있는 상황이다.

사문의 최고위 인사 네 명이 쏟아내는 매서운 기운에 응목대원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 그것이…….”

“네 이노옴! 똑바로 말하지 못하겠나! 교방과 웅보가 규를 해하려 했다는 게 무슨 소리야!”

쩌렁 울리는 노호성이 집무실을 집어삼켰다.

눈썹이 하늘로 치솟은 봉검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응목대원을 노려봤다.

운검과 더불어 점창 최고수로 뽑히는 그가 내력을 개방하자 집무실이 지진이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씨발… 내가 했냐고……. 왜 나한테……?’

봉검의 진노를 정면으로 받은 응목대원은 다리가 떨려 서 있기도 힘들었다.

운검이 한 발 앞으로 나서 자제시켰고, 그제야 기세를 낮춘 봉검이 응목대원을 다그쳤다.

“이 정도로 휘청거리다니? 엄살 부리지 말고 당장 고해라! 아니, 그 전에 네놈은 뭘 한 게야? 그런 걸 보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숨어 있다가 이리로 달려왔다고? 네놈이 정녕 점창의 제자가 맞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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