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62화 (62/463)

62화

서릿발 같은 기세가 집무실을 잠식한다.

대리 한복판에서 사형 여럿이 사제를 핍박하는 현장을 두고 본 것.

외인에게 제자들이 목숨을 잃은 것.

사제된 자가 사형을 공격해 기절시킨 것.

적의 도주를 도운 것까지.

모든 게 문제투성이다.

봉검은 듣는 순간 깨달았다.

일전에 연무장을 지나치면서 보았던 광경.

이대 제자들이 대련을 빙자해 여규를 폭행했던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이 정신 나간 녀석들이 이제는 밖에 나가서까지 무리지어 여규를 괴롭힌 모양이었다.

족장의 아들이라는 와족 소년은 여규와 친구 관계라고 하니 보다 못해 도왔겠지.

원승, 그 녀석은 정파의 본분을 잊어버린 요즘 젊은 세대 중에서 협에 가장 가까운 녀석이다.

그 녀석이 끼어들었다면 여규를 핍박한 사형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단한 게 틀림없다.

그래서 여규를 해하려 한 교방과 웅보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물었고, 그렇기에 기세를 발산하여 응목대원을 몰아붙였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넌 대체 뭘 한 것이냐고.

네놈이 나섰으면 막을 수 있었던 일을, 당장 뜯어말리지 않은 이유가 정녕 무엇이냐고.

그것은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지 못한 응목대원에 대한 훈계이자, 일선에서 뛰는 무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응목대주에 대한 질타인 동시에, 사문의 뒤틀림을 방기한 장문인을 향한 일갈이었다.

육십여 성상 오롯한 정도의 길을 걸어온 노장의 질책이 집무실을 강타했다.

“죄, 죄송합니다. 대장로님.”

그제야 봉검의 의중을 파악한 응목대원이 고개를 숙였다.

족장의 아들이 출현한 것은 차후의 문제다.

내부에서 곪고 있던 종양을 방치한 게 가장 무거운 잘못이었다.

그것은 곧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정도(正道)에 대한 이야기였다.

“알았으면 되었다. 그게 어찌 너만의 잘못이겠느냐. 보다 무거운 책임은 윗사람들에게 있는 것을. 몰아붙여서 미안하구나. 고생했다. 나가 보거라.”

잘못은 지적하나 책임의 무게를 명확히 한다.

또한 자신이 과했음을 시인하고 손아랫사람에게도 깔끔히 사과한다.

봉검의 이름이 세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

알아듣지 못했을 리 없다.

봉검의 호통이 결국 자신들을 향한 질책이었음을.

응목대주는 고개를 숙였고, 공지량은 서늘한 눈동자로 봉검을 바라봤다.

“이대 제자들의 과오는 차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오, 장문인.”

한 번 언급한 이상 같은 말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고, 그거면 충분하다.

몸을 돌린 봉검이 당면한 사안으로 화제를 넘겼다.

“두 녀석이 목숨을 잃었소. 그리고 그들을 살해한 건 외인이외다. 인과를 명확하게 밝힌 후에도 그 아이에게 허물이 없다면 돌려보내야 할 것이오. 허나 그 전에는 시비를 가리기 위해서라도 이 일에 연루된 제자들과 와족의 소년을 산으로 데려옴이 마땅해 보이는구려.”

명확한 판가름이 나기 전까지는 제자들을 살해한 자를 이대로 돌려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공지량이나 지석인과는 다른 목적이지만, 마른 비를 포획하는 데에는 봉검도 동의하는 바였다.

“행여나 그 아이를 전쟁에서의 인질로 쓸 생각을 지닌 누군가가 있다면, 그 생각은 접어야 할 겁니다. 구파일방은, 점창은! 그런 비열한 짓거리를 하지 않기에 정파의 기둥인 것이니까.”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운검이 말했다.

장문인을 믿고자 했으나 몇 년 만에 마주한 그에게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음험한 기운이 감지됐다.

그리고 두 명의 대장로가 공지량과 지석인의 얼굴에서 마른 비를 인질로 쓸 의도를 읽지 못했을 리 없다.

운검과 공지량의 눈빛이 마주쳤다.

‘흐흐, 끝까지 제멋대로구나. 늙은이들.’

꽉 깨문 어금니가 빠드득 마찰음을 울려낸다.

공지량의 양악에 굵은 선이 새겨졌다.

‘놓쳐선 안 돼. 여기서 다툴 시간이 없어. 우선 잡고 본다.’

공지량이 힘주어 다물었던 턱의 힘을 풀며 지그시 웃었다.

“물론입니다. 장로님들. 그들을 데려올 인원을 바로 파견하겠습니다. 지 대주, 명령을 하달하게. 대기 중인 응목대 절반과 호검대(湖劍隊)를….”

“아니, 내가 가겠소. 장문인.”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작달막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머리는 물론이거니와 눈썹까지 하얗게 센 덕분에 창산에 내려앉은 흰 눈을 연상케 하는 그는, 무복과 신발은 물론이거니와 검대와 검갑, 검파(劍把)까지도 하얀색 일색이었다.

외양도 특이하지만 더욱 시선을 사로잡는 건 눈동자였다.

잿빛.

짙은 회색을 띤 눈동자가 흰자위 정중앙에 고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공허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한 그 색깔은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가 위축될 만큼 기이했다.

“설검 장로님…!”

봉검의 질책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석인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존재 자체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노인이 좌중을 둘러봤다.

“몇 년 만인데도 여전하시군. 제자들을 죽인 놈을 상대로 시비를 가린다? 그게 무슨 개소리요, 봉검 장로? 전쟁이 시작되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지. 우린 무인이고, 무인의 도리는 이기는 것이요. 그 같잖은 명분과 원리 원칙을 지키는 게 아니라.”

눈썹을 꿈틀거린 봉검이 설검을 향해 몸을 돌리고, 두 노인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어찌 이런 자를 장로에 임명했단 말인가…!’

설검을 보는 봉검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설검 장로는 차갑고 냉정한 성격이지만, 성품이 악하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악인이라면 아슬아슬하게나마 정파로 분류될 수 없었을 터.

하지만 힘과 권력에 대한 과도한 욕심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 처리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또한 상대를 자극하는 저 도발적인 태도.

구파의 장로 직위를 꿰차기에는 지나치게 모가 난 사람이었다.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부터 그랬다.

봉검은 10년 전 설검 장로를 처음 대면한 순간을 떠올렸다.

‘당신들이 봉검, 운검 장로요?’

이제 막 문파에 발을 디딘 자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대뜸 건넨 말이었다.

‘이야기 많이 들었소. 나, 설지굉이외다. 영입 제의를 받고 오늘부터 점창에 몸담게 되었소. 내 무공은 점창에서 받은 것도 아니고 연배도 비슷하니 쓸데없는 배분이니 항렬이니 따지지 맙시다.’

‘허… 허허. 우선 반갑소이다. 사천성과 귀주성을 떨쳐 울린 회안검(灰眼劍)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허나 밖에서 만났다면 모를까, 한 사문에 몸담게 된 이상 그것은….’

‘그 몸담게 된 게 내가 입문 신청을 한 게 아니라니까? 점창으로부터 요청받아 이 오지까지 내려온 것이오. 나는 당신들에게 선배 대우를 할 생각이 없으니 그리 아시오.’

‘허허, 이 무슨 경우 없는….’

‘곧 같은 장로의 신분이 될 것이오. 나는 그만한 능력이 있고, 그것을 증명해 드리지. 그럼 가오.’

제 할 말만 냅다 던지고 사라지는 설지굉을 보며, 봉검과 운검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한데 실제로 몇 년 지나지 않아 장로직에 올랐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자이지만, 그 실력 하나만은 진짜였다.

겸손 따윈 안중에도 없는 오만한 태도.

직설적인 걸 넘어 무례로 점철된 거침없는 화술.

그건 분명 정파인의 모범과는 거리가 멀지만, 적어도 젊은 제자들에게만큼은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정파에서 강조하는 예의를 허례허식으로, 그 도량과 마음가짐을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에게 설검은 파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장문인. 설(雪)자를 독점하는 걸 허가해 주시오.”

그는 봉우리, 구름에 이어 창산의 삼대 절경인 눈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주로 젊은 제자들로 구성된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설검대를 조직했고, 수제자인 정황과 함께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을 키워냈다.

실력과 야욕, 정치적인 감각에 이르기까지 설지굉은 분명 난 인간이었다.

“내가 직접 가서 족장의 아들이란 놈의 사지를 잘라 창산으로 끌고 올 것이오. 물론 정성껏 지혈해서 명줄은 붙여 놓도록 하지. 놈은 야만인들을 동요시킬 소중한 인질이니까.”

막아서면 검이라도 뽑아 들 기세였다.

회색빛 눈동자가 살벌하게 봉검을 노려봤다.

봉검과 운검이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공지량이 한발 빨랐다.

“인질로 쓸 것인지, 시비를 가리는데 그칠 것인지, 그것은 차후의 문제. 우선 놈을 잡아와야 하지 않겠소? 필요한 병력을 마음껏 차출해 쓰시오, 설검 장로.”

“필요 없소, 장문인. 남은 설검대를 이끌고 갈 터이니.”

거칠게 걸어간 설검이 봉검과 운검의 사이를 밀치듯 지나쳤다.

“남은? 남은 설검대라니?”

대장로들은 설검이 왜 저리 격앙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지석인에게 정황과 설검대 절반이 몰살했다는 보고를 듣고서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보고에 설검대가 선공을 가했다는 이야기는 쏙 빠져 있었다.

* * *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린 소년이 적의 배후를 급습한다.

충돌 직전, 급속하게 끌어올린 자연기가 마른 비의 오른발에 집중됐다.

‘암습?!’

기의 준동을 감지한 준일이 황급히 몸을 돌리며 두 팔을 들어 올려 방어 태세를 취했다.

콰드득!

뒷목을 노리고 내리꽂힌 족격.

공격을 막아낸 오른팔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밀려드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준일은 한 토막의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왼손으로 검을 옮겨 쥔 그가 허공에 뜬 소년을 차갑게 노려봤다.

‘막았어?!’

마른 비의 얼굴이 굳었다.

이걸로 끝냈어야 했다.

끝낼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적은 공격 직전 끌어올린 찰나의 자연기를 감지하고 기민하게 대응해왔다.

‘죽는다…!’

체공 상태라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적은 휘두르는 대로 어디든 벨 수 있다.

준일의 검이 허공에 떠 있는 마른 비의 몸통을 노렸다.

‘집중해. 차분하게. 읽지 못하면 죽어!’

패애액!

‘결!’

이 역시 결이다.

혼신을 기울인 집중력이 시간을 쪼개고, 대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검의 진로를 읽는다.

다가오는 방향, 힘의 세기, 공기를 거스르는 검의 흐름…!

오동나무로 된 서까래의 결을 읽듯 마른 비의 오감이 대기의 결을 느꼈다.

보인다!

검이 지나칠 지점이.

느껴진다!

몸을 빼내야 할 활로가.

스아아악!

정면으로 깊숙이 회전한 마른 비의 등줄기 위로 검이 사납게 스쳐지나갔다.

‘됐어!’

암습이 실패했을 때 위기를 예감했다.

검을 옮겨 쥐는 적을 보며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발휘한 경이적인 집중력은 그간의 부단한 단련을 발판으로 새로운 경지를 열어젖혔다.

너른 하늘이 호언장담했던 마른 비의 잠재력이 생사의 간극에서 바야흐로 개화했다.

뻐어어억!

검을 피해낸 회전 그대로.

모아 찬 두 발이 준일의 안면에 직격했다.

얼굴뼈가 뭉개진 응목대의 부조장이 줄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허물어졌다.

“후우- 후욱―.”

체력 소모가 많은 공방은 아니었다.

하지만 잠시나마 죽음을 엿본 마른 비의 등은 뭉클뭉클 솟아오른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여규를 지키기 위해 죽인 두 명과 자신을 노린 한 명.

잠시 숨 돌릴 틈을 얻은 지금에 와서야 살인의 여파가 진하게 밀려온다.

중선오격, 산 허물기, 허공에서 두 발로 내뻗은 발차기…….

죽은 자들이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지은 표정과, 육신이 적을 타격한 순간의 감촉이 지독히도 생생했다.

‘짐승을 죽였을 때와는…… 달라.’

인간을, 동종을 살해했다는 자각이 마른 비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생명에 경중을 매기는 것이 그릇되다 욕한다면 할 말은 없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소중한 건 마찬가지지만, 그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른 비의 다리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저기 있다!”

여규와 원승을 지나쳐 온 점창의 제자들.

그들이 멍하니 서 있는 마른 비를 발견하고 외쳤다.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퍼져 대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 꼭꼭 숨어 있었다.

건장한 체격인 데다 운남 토착부족의 외모를 지닌 마른 비가 아무도 없는 거리에 홀로 서 있으니 발견이 안 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밤이 내려앉은 대리.

민가의 새까만 밤거리에 장소성(長嘯聲)이 울려 퍼지고, 마른 비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산개했던 점창의 제자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야 해!’

바로 도주했어야 했는데 갑작스레 밀려온 살인의 후유증 때문에 시간을 지체했다.

마른 비가 자신을 잡기 위해 포위망을 좁혀오는 적들을 훑었다.

“후으읍―.”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셔 폐부에 채워 넣고, 억지로 힘을 주어 떨리는 다리를 수습한다.

‘반드시 빠져 나간다!’

마른 비의 얼굴에 각오가 담기고, 두 발은 힘차게 대지를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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