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차차창!
검과 검이 부딪치고, 서로 다른 의지가 휘감기며 불꽃을 토한다.
제압하려는 자와 버티려는 자.
순식간에 끝날 줄 알았던 2 대 11의 격전은 팽팽한 국면을 유지하며 장기전에 접어들고 있었다.
‘여규,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이대 제자 금원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점창에 입문하기 전, 중원을 떠돌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원승이 강한 건 당연하다.
유협이란 별호처럼 그는 협을 숭앙하는 남자다.
원 치하에서 고통 받는 걸로도 모자라 사마의 무리들에게까지 쥐여 짜이는 민초들을 위해 원승은 제 한 몸 아끼지 않고 협의 길을 걸었다.
지금 같은 시대에 그런 오지랖을 부리면서도 살아남았다는 건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제 한 몸 건사하는 것은 물론이요, 불의를 저지르는 다수의 무리들을 제압할 만한 실력이 있다는 것.
점창에 들어와 기본공을 견실히 갈고 닦은 원승은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호국영이 금원에 더해 열 명의 인원을 남긴 것이다.
원승이 아무리 노련하다 해도 다수를 당해낼 순 없을 테니까.
‘여 사제의 무력이 예상외구나!’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스승도 없이 수련한 열네 살짜리 꼬마가 이토록 눈부시게 성장했을 줄이야.
청목이 쓰러졌다는 대목에서 어느 정도 짐작을 했고, 그래서 직접 나섰다.
호국영과 함께 젊은 이대 제자들 중에서 수위를 다투는 자신이 말이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여규를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건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면 한참을 더 싸워야 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규야. 내 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널 믿고 방문한 친구를 돌려보내고 싶겠지. 인질로 잡힐 수 있는 상황이니 더더욱. 하지만 사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전쟁을 앞두고 있어. 설령 너의 친구가 인질로 쓰이더라도 사문의 식구들이 피를 덜 흘릴 수 있다면 그리 해야 해.”
금원이 차분하게 여규를 설득했다.
그는 외롭게 성장한 어린 사제를 상처 입히기 싫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금원은 여규가 이만 물러나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다짜고짜 배부터 걷어차고 살검을 내뻗는 인간들을 보다가 금 사형을 보니 감사한 마음까지 드네요.”
금원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던 여규가 말했다.
제대로 이야기 한번 나눈 적 없지만, 여규는 금원에 대해 알고 있다.
그는 청목이나 호국영 같은 인간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존중을 표함이 마땅하다.
비록 검을 들고 대치하는 중이지만, 여규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그를 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금 사형. 목숨을 위협받았다고는 해도 청 사형에게 상처를 입힌 점.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적장의 아들을 도주시킨 점. 그리고 사형께 검을 겨누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제가 사문에 큰 죄를 짓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금원은 검까지 내린 채 여규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사형. 그 녀석은 제 손님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대리에 들어왔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가 되어 주었고요. 저는 점창의 제자이며 의(義)를 숭앙하라 배웠습니다. 친구가 인질로 쓰일 걸 뻔히 알면서도 넘기는 건 제 기준에서 불의입니다.”
잠시 말을 멈췄던 여규가 금원을 바라봤다.
“제가 아는 점창은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를 인질로 잡는 치졸한 짓 따윈 하지 않습니다. 인질을 써야만 승리할 수 있다면 차라리 정면으로 맞부딪혀 당당하게 패배함이 옳습니다. 힘이 모자란 것은 수치는 될 수 있을지언정 불의는 아닌 까닭입니다.”
밤이 내려앉은 대리의 한복판에서, 소년은 말한다.
그것은 유구한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치 않을 옳은 길에 대한 선언이었다.
“사형. 우리는 의와 협을 수호하는 정파입니다.”
왜 모를까.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어쩔 수 없다는 한마디로 애써 외면해왔을 뿐이다.
금원은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열 명의 검사들에게 둘러싸여 기진맥진했던 원승은 격동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대협. 이 원승, 대협께서 보여주신 그날의 기백을 오늘 다시 목도합니다. 대협의 아들이 저토록 훌륭히 성장하였습니다. 벅차오르는 이 심정을 어찌해야 할까요.’
평생을 바쳤으나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했던 원승이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삶의 목적을 잃은 채 폐인처럼 중원을 떠돌았다.
하지만 보았다.
자신을 좌절시켰던 강고한 벽, 그 벽에 스스로를 내던져 깨부수는 사내를.
그리고 오늘 다시 목격했다.
그의 기개를 이은 아이를.
원승은 자신에게 허락된 여생을 저 앞에 달빛을 이고 선 소년과 함께하리라 다짐했다.
“개소리를 아주 알차게 지껄이고 있구나.”
퍼억!
쏟아지던 달빛이 흐려진다.
무자비한 일격에 정도를 논하던 소년의 의식이 끊어졌다.
온통 백색 일색인 노인이 싸늘한 눈으로 여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 설검 장로!’
원승의 얼굴이 더 이상 딱딱해질 수 없을 만큼 경직됐다.
뒷목을 쳐서 기절시킨 것이니 여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도주 중인 마른 비다.
지금 뒤따라간 이, 삼대 제자들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상황이 아닌가.
한데 이 시점에 난데없이 설검 장로라니?
추격대로서 떠올릴 수 있는 최악의 인물이나 다름없었다.
“반역자들이로군.”
스르릉―
검갑 째 여규를 내리쳤던 설지굉이 검을 뽑았다.
첨예하게 뻗치는 살기.
기절시키는 걸로 끝내는 게 아니었던가!
원승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즉결 처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겠지.”
“자, 잠깐!”
다급해진 원승이 검을 크게 휘둘러 자신을 압박하던 검사들을 밀어냈다.
검을 들어 올리던 설지굉이 원승을 돌아봤다.
“뭐냐?”
“삼대 제자 원승입니다! 입문 전에는 강호의 동도들이 유협이란 허명으로 불러 주었습니다!”
원승은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묻지도 않은 별호를 꺼내 들었다.
그가 듣기로 설지굉은 오만한 성정만큼이나 자신과 말을 섞을 상대의 자격을 따진다고 들었고, 무인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은 결국 무력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력이 뛰어나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것.
바로 별호였다.
“유협? 들어본 것 같군. 온갖 곳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협객놀음에 빠진 얼간이. 점창에 와 있었나?”
모욕적인 언사다.
그리고 점창에 입문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딱 한 가지를 의미한다.
신경 쓸 가치가 없다는 것.
설지굉에게 있어 원승은 말 그대로 들어만 보았을 뿐 관심을 가질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내 힘으론 멈춰 세울 수 없다.’
자존심이 상할 일이지만, 원승은 동요하지 않았다.
강호를 떠돌 때 자신이 이름을 알린 것은 무력보다는 협행 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반면에 설검 장로는 일신에 지닌 무력만으로 사천과 귀주, 2개 성에서 명성을 떨쳤던 남자다.
그의 기준에서 자신 정도의 무인은 널리고 널렸으며, 딱히 관심을 기울일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자신의 자존심 따윈 하나도 중요치 않다.
설검 장로가 치켜든 손을 내리게 하는 것.
원승의 모든 신경은 백색의 광휘를 뿜는 검에 쏠려 있었다.
“예. 그 얼간이가 맞습니다. 설검 장로님, 여 사형이 결과적으로 사문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은 맞지만 거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너 따위가 나를 가로막겠다는 건가? 들을 가치도 없다.”
검을 든 손이 정점에 올랐다.
설검 장로는 듣던 대로 지독히도 오만한 자였다.
결국 원승은 그를 멈추기 위해 하나의 이름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여휘!”
“……?”
“제 이름은 몰라도 점창고검 여휘는 아실 겁니다! 여 사형은 그의 아들입니다!”
“……십좌?”
십좌(十座). 그 이름.
천하에 산재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인들 가운데 오롯이 빛나는 열 개의 별.
만인이 인정하는 천하 십대고수를 일컬음이다.
기라성 같은 무인들의 최정상에 자리한 중원십좌(中原十座)는 천하 어디를 가도 통하는 이름일 수밖에 없었다.
“……이 꼬마가 여휘의 아들이라고?”
설지굉이 2개 성에서 알아주는 수준이라면, 여휘는 이미 시대에 이름을 남긴 남자다.
실제 붙어보지 않았으니 고하가 어찌 될지는 몰라도 설지굉은 봉검과 운검에게도 앞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여휘라면 다르다.
설지굉에게 있어 원승이 기억할 만한 자가 될 수 없듯이, 고검의 앞에서 회안검의 이름 따윈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마찬가지니까.
설지굉의 손이 여규를 내려치기 직전에 멈췄다.
“여휘. 말로만 듣던 그 여 장로의 아들이란 말이지. 한데 그런 녀석이 사문에 반역을 했다? 재미있군.”
설지굉은 여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수년 전 여휘가 중원에서 잠깐 돌아왔을 때, 설지굉은 장로가 되기 위해 밖에 나가 온갖 궂은일들을 처리할 시점이었고, 그가 복귀했을 때 여휘는 이미 떠난 후였다.
그리고 설지굉이 장로에 임명된 후부터 지금까지, 여휘는 황실에 투신하여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보다 뛰어난 무인에 대한 예우인지, 십좌의 이름 앞에서 움츠러든 것인지, 그냥 단순한 변덕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회색빛 눈동자가 알 수 없는 일렁임을 담았고, 설지굉은 그의 애검을 납검했다.
‘후우…….’
여규의 안전을 확보한 원승은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
“처벌은 미루도록 하지. 원승이라 했나? 하지만 너와 여 장로의 아들이라는 이 꼬마. 너희 두 놈이 사문의 적을 살려 보낸 건 변치 않는 사실이야. 산에 돌아가 처분을 기다리도록.”
“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설검 장로님.”
할 만큼 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었고, 이제 마른 비가 살아나는 건 하늘에 달렸다.
무엇보다 원승은 여규의 안전이 먼저였다.
코웃음 친 설지굉이 동쪽을 바라보며 명했다.
“너희 열한 명. 이놈들을 본산으로 압송하라.”
“예! 설검 장로님!”
“나와 설검대는… 쥐새끼를 잡으러 간다.”
잿빛 눈동자가 살벌한 한기를 담고 빛났다.
* * *
빨리 가지 않으면 잡히고 만다.
성벽과 숲의 거리를 가늠하는 마른 비를 보며 호국영이 비릿하게 웃었다.
“가게 둘 것 같나? 못 간다, 야만인.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야.”
외모는 굉장히 말끔한데 말을 섞을 때마다 인상을 찡그리게 하는 남자다.
자연기가 전해주는 감각이 차가운 비늘로 뒤덮인 뱀을 그렸다.
절대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최대한 거리를 두고 싶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마른 비는 떠오른 생각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너, 진짜 별로다.”
호국영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어디서 이런 말을 들어보았던가.
백족이란 출신 성분과 젊은 세대에서 손꼽히는 무예, 수려한 외모.
사람들은 자신이 부러워 질시를 보낼지언정 감히 폄하하지 못했다.
“다리로 끝내려 했건만… 팔 하나를 더 가져가지.”
불쾌할 정도로 축축한 살의가 대기를 어지럽힌다.
마른 비는 보면 볼수록 눈앞의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팔이 불편해. 싸워서 단시간에 제압하긴 어려워. 그렇다면…….’
목적은 어디까지나 도주다.
일일이 쓰러뜨릴 필요가 없단 뜻이었다.
‘빠르게 치고 빠진다.’
자연기를 담은 두 다리가 번갯불을 튕겨냈다.
번쩍!
적의 얼굴이 급격히 확대된다.
깊게 낮췄던 자세가 높아지며, 오른발 진각과 동시에 비튼 허리를 축으로 산 허물기를 펼쳤다.
‘그럴 줄 알았지.’
정면.
만반의 준비.
보고로 접했던 기술.
맞아주는 게 바보다.
뒤로 훌쩍 물러나 간격을 벌린 호국영이 백운검으로 응수했다.
“멍청한 놈!”
쐐애액―!
간격을 놓쳤다.
이대로라면 검에 스스로 몸을 가져다 대는 거나 마찬가지다.
호국영이 비틀린 미소를 짓는 순간, 마른 비의 오른발 축이 급격히 회전했다.
끼이이익!
성벽을 이루는 석재와 단단히 뿌리내린 오른발이 마찰음을 터뜨리고, 마른 비의 몸이 우측으로 휘돈다.
바깥으로 한 바퀴 회전한 것만으로 빼앗던 간격을 되찾으니 꼴 보기 싫은 미소가 단숨에 지워졌다.
‘바위 부수기.’
빙글 회전하여 호국영의 좌측 공간을 점유한 마른 비가 강렬한 일권을 뻗어냈다.
잡스러운 기교를 배제한 순정한 일격.
오로지 정면으로 적을 깨부수기 위한 오른손 정권이 거센 파공음을 떨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