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파아아앙!
“키아압!”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필사적인 기합성이 성벽 위를 울린다.
세 번 연달아 지른 백운장(白雲掌)으로 겨우 경력을 상쇄했지만, 그럼에도 힘에서 밀린다.
호국영의 몸이 붕 떠오르며 점창 제자들이 달려오는 대리고성 안쪽으로 추락했다.
“이 야만인 새끼가아아아!”
실로 집요한 남자다.
호국영이 내력을 때려 부은 검을 집어던졌지만, 헛된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
고개를 살짝 꺾자 검이 스쳐 지나가고, 볼에 옅은 혈선 하나가 남았다.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가야 돼!’
넓게 펼친 야생의 숲을 둘러보며, 소년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탈출할 수 있다.
무사히 빠져나가고야 만다.
그렇게 되뇌며 성벽 아래에 착지한 마른 비다.
하지만 달려 나가기 전, 그의 고개가 성벽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 대리 쪽으로 홱 돌아갔다.
‘뭐, 뭐야, 이건?’
멀리서 무지막지한 기운이 감지된다.
삼백 명의 추격대를 송사리 떼로 느껴지게 할 만큼 거대한 기운이 급속도로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느낌상 상당한 거리가 남았음에도 그자가 내지른 게 분명한 고함이 대리 동쪽을 뒤흔들었다.
“당장 문이나 열어라! 이 쓸모없는 쓰레기들아!”
제자들에게까지 막말을 내뱉는 자.
설지굉이 본격적으로 마른 비의 뒤에 따라붙었다.
“쯧!”
설지굉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짧게 혀를 찼다.
동문으로 설검대를 내보내 마른 비를 추격시키고, 싸움의 현장을 둘러보는 그의 얼굴엔 한심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
사방에 널린 검들을 주섬주섬 회수하는 이, 삼대 제자들은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삼백 명이 달려들고도 꼬맹이 하나를 잡지 못했는데, 무슨 말을 할까.
설지굉이 고개를 푹 숙인 그들에게 짧게 명했다.
“멍청한 놈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 즉시 창산으로 복귀해라. 족장의 아들이란 꼬마는 나와 설검대가 잡아올 테니.”
“설검 장로님. 저도 동행하고 싶습니다.”
한 발 앞으로 나선 자.
호국영이었다.
자신이 직접 족장의 아들을 잡기 위해 사형제들에게 검을 집어 던지라 명했다.
소년이 성벽 중턱에서 검을 피하느라 발이 묶인 사이 전속력으로 거리를 좁혔고, 결국 부상을 입은 소년과 일대일로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잡기는커녕 성벽 아래로 밀려나는 치욕을 맛봤다.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그는 수치심에 휩싸여 있었고, 이 실패를 어떻게든 만회해야만 했다.
“넌 뭐냐?”
하지만 설지굉의 물음에 호국영은 할 말을 잃었다.
‘날 모른다고?’
백족 출신에, 운검 장로에게 사사 받았고, 이대 제자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자신을?
설검 장로는 상대할 가치가 있는 자만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을 모른다는 것.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호국영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침착해라. 흥분해선 안 돼.’
성질대로 나섰다가는 뒷감당이 어렵다.
설검 장로는 본산의 제자라고 봐주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 최연소 장로에 취임하여 당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야! 그때도 기억을 못 하는지 보자고.’
호국영이 분을 누르며 억지로 웃었다.
장문인이 약속한 장로직은 전쟁이 끝난 후의 일.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건 그때 해도 늦지 않다.
우선은 당면한 문제, 족장의 아들을 잡는 일에 한 발을 걸치고, 치욕을 만회하는 게 중요했다.
“이대 제자 호국영입니다. 백족 출신이고, 운검 장로님께서 무공을 다듬어 주셨습니다. 이대 제자 중에서는….”
“시끄럽다. 별호가 뭐냐?”
구구절절한 자기소개보다는 무림인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증표, 별호를 묻는 게 빠르다.
하지만 운남을 벗어난 적 없는 호국영이 별호가 있을 리 없었다.
“주, 중원행을 떠나지 못하여 별호는 아직…….”
“본산으로 꺼져라.”
오늘은 수치와 모욕의 연속이다.
호국영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쓸모가 있으실 겁니다! 이래 봬도 이대 제자 중에서는…!”
“아까 야만인에게 일대일로 밀려서 성벽 아래로 떨어진 머저리가 네놈 아니었나? 사형제들이 마련해준 기회를 홀랑 날려먹고도 그딴 말이 나오나? 실력만 없는 게 아니라 뻔뻔하기까지 한 놈이군.”
‘봤던 건가…!’
자신의 눈으로는 점으로도 보일까말까 했던 거리다.
그 먼 거리에서 달리며 자신의 얼굴까지 확인했다는 것.
놀라운 안력(眼力)이다.
그리고 그건 설지굉의 무공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했다.
‘이, 이…!’
대꾸할 말이 있을 리 없다.
호국영은 그저 온몸을 푸들푸들 떨 수밖에 없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제자들을 인솔해 산으로 복귀해. 족장의 아들은 내가 잡아 올 것이야.”
휙 돌리는 등에서 한기가 풀풀 묻어났다.
설지굉은 한 번 실패한 자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족장의 아들을 잡아들이는 공을 나눌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며, 죽어버린 수제자와 설검대를 위한 복수도 해야 했다.
그리고 족장의 아들은 복수를 위한 첫 제물로써 딱 알맞은 존재였다.
명을 내린 설지굉이 추격을 위해 땅을 박찼다.
허탈함과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점창의 제자들은 그 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 *
쒜에엑!
나무와 나무를 타 넘는다.
계곡을 건너뛰고, 벼랑 위로 솟구치며, 비탈을 가로지른다.
자연의 품 안에 뛰어든 마른 비는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거침없이 질주했다.
‘거리를… 벌릴 수가 없어!’
그럼에도 추격자들을 떨쳐낼 수가 없다.
지형의 결을 따라 최단 거리를 달리고 있지만, 적들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대리에서 쫓아오던 엉성한 녀석들과는 수준 자체가 다르다.
새로 따라붙은 적들은 하나하나가 정련된 전사들인 게 틀림없었다.
‘큰일 났네…….’
마른 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십 대 중반이라고 하지 않았나? 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난감한 건 설검대 5조장 부원도 마찬가지였다.
와족이 중원의 내공심법과 전혀 다른 형태로 기를 운용한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방식을 취하든 기의 축적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결국 시간일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라도 십 대 중반에 쌓을 수 있는 내공의 양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여규가 청목을 쓰러뜨렸듯 실제 검을 맞대는 실전에서 타고난 전투 감각을 지닌 자들이 내공의 우위를 지닌 자를 제압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장기전으로 돌입하거나 지금처럼 경공으로 주력(走力)을 견주는 일에 있어 내공의 우위는 그야말로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 뭐가 문제지?’
부원은 설검대가 야만인 소년을 좀처럼 따라잡지 못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비천십이표는 뛰어난 경공이다. 주법(走法)에서 밀릴 리는 없어. 지형! 지형에 능숙한 거야. 저 소년은.’
검을 던져 한동안 발을 묶긴 했지만, 대리에서는 호국영조차 소년을 따라잡았다.
숲으로 진입하기 전, 성벽과 숲 사이에 있는 벌판을 달리며 머지않은 시간 내에 잡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숲에 들어서는 순간, 소년의 기동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마치 숲이 소년의 질주를 도와주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반면 자신들은 벌판을 달릴 때에 비해 온갖 장애물에 제약을 받으며 추격 속도가 늦춰졌다.
‘익숙함.’
소년은 자신들보다 자연의 지형지물에 훨씬 더 익숙했다.
마치 어떤 지형과 장애물이 튀어나올지를 미리 읽어내는 것 같다.
그 결정적인 차이가 설검대로 하여금 숲에 들어온 지 한 시진이 넘도록 마른 비를 따라잡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파아앙!
그러나 소년은 결국 잡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지형지물 따위 무시하고 압도적인 속도로 소년에게 따라붙을 수 있는 자.
파공음을 흘리며 달려온 설지굉이 선두에서 뛰고 있는 부원에게 합류했다.
“아직도 못 잡은 건가?”
발을 멈추지 않으며, 설지굉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꼬마가 생각보다 훨씬 빠릅니다.”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는다.
부원은 오래도록 설검 장로를 보아왔고, 그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는 걸 경멸한다.
그가 알아서 판단할 거다.
역시나 상황을 가늠한 설지굉이 입을 열었다.
“지형지물에 익숙한 모양이군. 벌판을 달릴 때만 해도 너희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건만. 게다가 이 어둠. 와족은 운남의 밤에 적응을 끝낸 거겠지.”
숲속은 빛 한 점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무 사이로 얼핏 비치는 어슴푸레한 달빛만이 간간이 시야를 틔울 뿐, 칠흑 같은 어둠이 사위를 지배했다.
설지굉 같은 고수라면 모를까.
설검대원들로서는 마른 비가 달리는 소리와 흔적을 뒤쫓는 정도가 한계였다.
“까다롭군. 너희들이 쉽게 따라붙지 못할 만하다. 족장의 아들이라더니 아주 제법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는 설지굉의 입에서 마른 비에 대한 칭찬이 흘러나왔다.
부원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제 크기를 찾았다.
“이 방향으로 쭉 가면 와족 놈들의 진군 경로와 맞물리게 된다. 혹시 모르니 병력을 위로 퍼뜨려서 놈을 아래쪽으로 몰도록. 내가 쫓아갈 테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오만한 성정이지만, 일에 착수한 이상 만에 하나의 가능성마저 차단한다.
설지굉이 수년 만에 장로가 될 수 있었던 건 철두철미한 일 처리 덕분이었다.
마른 비가 추격을 뿌리칠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먼저 가서 잡는다. 뒤따라오도록.”
“네, 장로님.”
쒜에에엑!
시커먼 어둠을 헤치고 설지굉의 신형이 설검대를 앞질러 나아갔다.
‘온다!’
절로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 기운.
대리고성을 나설 때 접근했던 무시무시한 자다.
자연기를 끌어모아 밤눈을 발동한 마른 비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엄청나게 빨라! 머지않아 나타날 거야.’
올 줄 알았다.
그리고 따라잡힐 걸 예상했다.
원래는 다른 인원들을 멀찍이 떨어뜨려 두고 마주할 생각이었지만, 적들은 하나같이 녹록잖았다.
‘어쩔 수 없어. 계속 달려도 결국은 잡힌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느니 선공의 이점이라도 가져가는 게 낫다.
설령 둘러싸여 죽게 되더라도 승부를 걸어야 할 시점이다.
숲에 들어선 이후 계속 찾고 있던 곳.
특유의 음습한 냄새와 한 점의 빛도 머물지 않는 공간.
지형의 결을 읽고, 후각에 집중한 마른 비가 멀지 않은 곳에서 원하던 장소를 찾아냈다.
‘여기서 승부를 건다!’
마른 비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놈이 미친 건가?”
설지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른 비의 선택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어야 할 놈이 닫힌 공간으로 기어들다니.
소년의 흔적이 이어진 곳은 시커먼 어둠이 자리한 동혈(洞穴)이었다.
‘어둠 속에서 싸워보자? 십 대 중반이라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였군.’
와족이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다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2개 성에서 이름을 떨칠 정도의 무인이 고작 어둠 때문에 전력이 반감될 리 없다.
아니, 밝은 곳만큼 자유롭진 않겠지만 다가오는 급습을 놓칠 정도로 허술하지 않다.
야만인 소년은 크게 실수한 것이다.
“응해주지.”
철저히 하려면 뒤따라오는 설검대에게 정면을 봉쇄하게 한 후 들어감이 옳다.
하지만 설지굉이 염려하는 건 예상치 못한 도주의 가능성이지, 전투에서 자신이 손해를 보리란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막다른 공간.
일대일의 상황.
저런 꼬맹이가 자신 있으면 들어와 보라는 듯 기다리는데, 들어가지 않는다면 목을 매달고 죽는 게 낫다.
설지굉은 검도 뽑지 않은 채로 동굴에 진입했다.
‘왔어!’
동굴의 깊디깊은 안쪽.
통로를 울리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마른 비가 숨을 죽였다.
‘따라 들어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
그저 막연한 느낌이었을 뿐이다.
기운에선 그 사람이 지닌 고유의 성정이 전해지기 마련이고, 노인에게서는 넘치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밝지 않고 다소 비틀린 느낌을 준다.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자만과 오만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따라 들어오리라 믿었지만, 그저 느낌이었을 뿐 입구에 버티고 서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면 무조건 사로잡힐 상황이었다.
‘다행이야. 어떻게든 쓰러뜨리고 빠져나간다!’
마른 비의 입술이 열리고, 와족 비전의 야수 제어, 그 매개가 되는 언령이 동굴을 메우고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