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동굴은 야생 짐승들이 안락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어둠은 인간과 피식자들에게는 두려움을 주지만, 먹이사슬 상부에 자리한 야생의 포식자들에게는 사냥을 용이하게 하는 매개이자 휴식을 돕는 포근한 장막과 같다.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
전면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되는 곳.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은신과 휴식이 용이한 곳.
당연히 대부분의 동굴에는 주인이 존재하며, 깊고 안락한 곳일수록 강력한 포식자가 웅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정도로 조건이 좋은 동굴이라면 대개 곰이나 호랑이 같은 정점의 포식자가 거주한다.
하지만 밤눈을 발동한 마른 비는 동굴 바닥 곳곳에서 그런 거대 육식동물의 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동굴에 자리 잡으려고 들어왔다가 죽임을 당한 놈들이 틀림없었다.
‘제대로 들어왔어.’
멀리서도 냄새로 알 수 있었다.
‘놈들’ 특유의 분뇨 냄새.
단일 개체로서 강대한 녀석이 한 마리 웅크리고 있었다면 제어도 어려울뿐더러 저 무지막지한 노인에겐 오히려 위협이 되기 힘들다.
심지에 불이 붙듯 시커먼 어둠 속에서 수를 헤아리기 힘든 핏빛 눈동자가 하나둘씩 켜졌다.
동굴의 주인.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흡혈박쥐 떼가 자신들의 보금자리에 진입한 침입자들을 가늠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일체화!’
지금이다.
달려들기 전에 적을 꼼꼼히 살피는 야생 동물의 습성.
동굴에 진입한 후 공격받기 전까지 약간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설지굉을 동굴로 유인하기 위해 마른 비는 본연의 자연기를 숨기지 않았다.
탐색을 마친 놈들이 떨어져 내리기 직전에.
노인이 동굴 중앙에 위치한 바로 지금!
마른 비의 호흡과 자연기가 흡혈박쥐의 그것에 급격히 동조됐다.
“끼익?”
마른 비를 노린 녀석들이 묘한 동질감에 주춤한 사이, 녀석들의 뇌리에 직접 꽂히는 뜻과 의지를 전달한다.
『침입자!』
소년의 언령이 동굴에 메아리쳤다.
“음?”
덤벼보라는 듯 뚜렷하게 감지되던 야만인 소년의 기가 급격히 사그라졌다.
그 자리를 메운 건 진입 전부터 동굴에서 감지되던 미물들의 기운이었다.
“어디서 이따위 사술을!”
심상치 않다.
갑자기 기운이 사라진 건 둘째치고 방금 전 동굴을 울린 기묘한 기의 준동!
중원 무인들과의 싸움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질감이었다.
설지굉은 노련한 무인이었고, 이변을 눈치챈 순간 검을 뽑고 달려들었으나, 마른 비는 이미 지형의 결을 따라 자리를 이탈한 뒤였다.
“끼이익!”
급작스런 움직임.
적대적인 감각.
뇌리에 스며든, 침입을 알리는 경고!
날개를 편 동굴의 주인들이 설지굉에게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혈편복(血蝙蝠)?”
중원에서도 깊은 산속의 동굴을 찾으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놈들이다.
눈을 잠식한 붉은색이 훨씬 짙고, 크기가 두 배 가량 클 뿐.
“이게 무슨?!”
반백년을 강호에 몸담으며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을 접한 설지굉이지만, 박쥐 떼에게 습격을 당한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중원의 짐승들은 그와 마주치는 순간 불에라도 덴 듯 알아서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
당연한 일이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철칙하에 살아가는 야수들은 상대의 기운을 감지하는 게 곧 생존과 직결되며, 덤비면 죽을 게 뻔한 적에게 달려들 리 없기 때문이다.
한데 자신을 떼거지로 공격한다?
“이것들이 감히 이 설지굉을 뭘로 보고!”
노인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섰다.
미물이라는 표현도 아까운 것들이 건방지게 자신에게 달려들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야만인 꼬마의 도발보다도 더욱 피가 거꾸로 솟는 일이었다.
“카아압!”
피핏! 피피피핏!
양단할 필요도 없다.
가볍게 상처를 입히는 걸로 족하다.
짐승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을 최우선 순위에 두기 마련이며, 그렇기에 상처를 입으면 물러난다.
끝도 없이 달려드는 박쥐 떼를 모두 베는 것.
못 할 건 없지만 미련한 짓이며, 그런 의미에서 설지굉의 판단은 적절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려든 짐승의 습성을 몰랐던 게 그의 패착이었다.
“키익! 키이익!”
상처를 입고 떨어져 내린 박쥐들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놈들은 분노하여 바닥을 기면서까지 설지굉에게 달려들었다.
상처를 입지 않은 놈들도 피를 보자 흡혈에 대한 욕구가 샘솟는지 광분하여 날뛰었다.
설지굉에게 더욱 격렬하게 달려드는 건 물론이고, 피를 흘리며 땅을 기는 동족에게 수십 마리가 달려들어 물어뜯고 피를 마셨다.
“뭐, 뭐 이런 것들이?!”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사방팔방에서 날아드는 박쥐 떼에게 틈을 허용하고 물어 뜯겨 쓰러졌으리라.
하지만 설지굉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두르며 한 마리의 접근도 불허하고 있었다.
그저 더욱 새빨갛게 변하여 이제는 핏빛을 띠는 박쥐 떼의 눈과 광기에 질렸을 뿐이다.
푸드득, 푸득―!
“끼이익!”
“까불지 마라! 하찮은 벌레나 다를 바 없는 것들아!”
촤차차아아악!
점멸하는 수백 쌍의 핏빛 눈동자와 그 빛을 반사하는 백색의 검.
시커먼 어둠 속에서 휘둘러진 검이 소름 끼치는 붉은 선들을 어지러이 흩뿌렸다.
‘서두르면 안 돼.’
박쥐 떼에 일치시킨 호흡과 자연기.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여기서 조금만 어긋나도 노인은 바로 알아챌 거다.
노인에게 달려드는 박쥐들이 시야를 가려주고, 동굴을 울리는 날갯짓이 이동 시의 소리를 덮는다.
결정적으로 피를 보고 흥분한 박쥐 떼의 기가 사방에 넘실대며 마른 비의 기척을 완전히 숨겨주었다.
‘이것만으론 안 돼.’
박쥐 떼의 집요함에 기가 질린 설지굉은 달려드는 족족 토막을 내고 있었고, 이대로 가면 아무리 사나운 놈들이라도 결국은 물러서고 만다.
놈들의 생존을 향한 본능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노인을 곤란하게 만들 한 수.
동굴 바닥의 결을 탄 마른 비가 설지굉의 등 뒤로 다가갔다.
‘큰 걸 노리면 자연기가 흔들려.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으아아아아! 죽어! 죽어!”
설지굉은 괴성을 질러가며 박쥐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피잇, 피핏! 촤차차착!
박쥐 떼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경계.
노인의 검권(劍圈)이다.
배후에서 달려드는 놈들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정확히 양단하는 설지굉의 검은 매서웠다.
피피핏!
마른 비의 오른손이 검권의 경계 바로 앞에 놓였다.
‘스치기만 해도 돼. 가장 빠른 일격.’
소년의 손이 새의 부리를 그린다.
‘올빼미 사냥.’
속도와 정확성, 그리고 날카로움에 중점을 둔 그믐의 기예.
연격을 위한 힘의 배분을 포기한 채 오직 한 번의 내뻗음에 모든 걸 담는다.
‘강습(強襲).’
패애애액!
검이 박쥐를 베고 지나간 찰나의 틈.
어둔 날개의 부리를 모방한 인간의 손이 단 한 번, 최속의 일격을 떨쳐낸다.
사냥감에게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올빼미의 급습처럼.
설지굉의 배후를 잡은 마른 비가 빛살 같은 섬격을 토해냈다.
“나올 줄 알았다!”
박쥐 떼를 움직인 기묘한 기술.
와족 고유의 기예라는 야수 제어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걸로는 자신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걸 서로가 안다.
도주? 동굴을 나서려 하면 모를 리 없다.
지금이야 박쥐들 틈에 묻혀 기를 읽어내기 힘들지만, 동굴 입구로 다가가는 기운이 있다면 보나마나 그놈일 테니까.
틀림없이 온다.
이 혼란을 이용한 급습이.
그리고 그것은 분명 혼신을 다한 묵직한 일격이리라.
설지굉은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핫!”
방어와 반격이 동시에 가능하도록 있는 대로 기를 때려 부은 검은 웅장한 잿빛 검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박쥐의 습성을 몰랐듯 설지굉은 마른 비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다.
그는 차라리 속도에 중점을 둔 본래의 검을 그었어야 했다.
피잇!
‘응?’
묵직한 일격이 아니다.
짧게 치고 빠지는 단타가 설지굉의 팔뚝을 긁자마자 곧바로 회수됐다.
‘뭐야, 이건?’
기껏 잡은 기회에 이따위 얄팍한 공격이라니.
소년은 처음부터 작심한 듯 생채기 하나만을 내고 뒤로 빠졌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 네놈은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를…!”
“키이이이익!”
박쥐 떼가 일제히 울부짖었다.
녀석들의 눈은 피를 뚝뚝 떨굴 듯 짙붉은 광망을 흘리고 있었다.
‘뭐야? 이것들이 갑자기 왜?’
설지굉의 눈이 아래로 향하고, 자신의 팔뚝에서 또르르 흐르는 액체 한 방울을 시야에 담았다.
‘피?!’
동족들의 피 냄새를 맡고도 흥분했던 녀석들이다.
이종(異種)의 혈향이 주는 감미로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내리는 동족들을 보며 사냥을 포기하려던 순간, 꽃망울이 터지듯 피어오른 신선한 피 한 방울이 박쥐들의 눈을 뒤집었다.
“키이아아악!”
콰아악!
마른 비에게 반격을 하느라 벌어진 틈.
검권을 파고든 박쥐 떼가 설지굉에게 달려들었다.
콰악! 콰콱! 푸욱!
“크아아아악!”
날카로운 이빨이 피부를 쑤시고, 억센 턱이 살갗을 깨문다.
새까맣게 몰려든 놈들이 설지굉의 전신을 뒤덮었다.
“끅! 크악! 이 빌어먹을 것들이…… 감히!”
천하의 회안검이 언제 이런 수모를 겪었던가.
박쥐 떼를 떨쳐내기 위해 피부에 내공을 둘러치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설지굉의 모습은 광인 그 자체였다.
퍼얼럭!
모든 무리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인간조차 그럴진대 하물며 짐승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지금껏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리를 지키던 녀석.
설지굉의 피 냄새에 반응한 우두머리가 날개를 폈다.
“끼이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일반적인 혈편복의 네다섯 배에 달하는 우두머리가 떨어져 내렸다.
“너 이 새끼! 반드시 죽인다아아아!”
입구를 나서는 마른 비의 뒤로 동굴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이 터지고, 광분한 노인을 시커먼 그림자가 덮쳤다.
“설검 장로님은?!”
질주의 흔적을 뒤쫓아 온 설검대원들은 동굴에서 나오는 마른 비를 발견했다.
“크아아악!”
동굴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비명 소리.
설지굉이 틀림없었다.
“이, 이게 무슨 상황이냐?!”
경악에 휩싸인 부원이 말을 절었다.
설지굉의 지시대로 위쪽을 두텁게 보강하여 소년을 아래쪽으로 몰아갈 포진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저 명령을 이행한 것일 뿐, 상황은 이미 끝났으리라 여겼다.
소년을 뒤쫓아 간 것은 차기 대장로로 유력한 설검 장로였다.
“이, 일단 잡아! 6조는 동굴로 들어가고, 나머진 전부 꼬마를 쫓아라!”
마른 비가 도주하는 걸 본 부원이 빠르게 지시했다.
설지굉이 염려되어 남긴 1개 조를 제외하고, 나머지 3개 조가 마른 비를 쫓기 위해 움직였다.
‘분명히 살아나올 거야.’
땅을 박차며, 마른 비가 동굴을 힐끗 돌아봤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한 괴물 같은 노인네였다.
회심의 한 수였지만, 저런 인물이 고작 박쥐에게 당할 리 없다.
동굴에서의 일전은 허를 찌른 기책일 뿐 처음의 각오와 달리 노인을 쓰러뜨리기는 요원했다.
박쥐 떼를 전멸시킨 노인이 기력을 회복하고 쫓아올 때까지 잠시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해.’
마른 비의 눈이 번쩍이고, 두 다리가 가쁘게 숲을 가로질렀다.
“카아악! 이노오옴! 이 쥐새끼 같은 꼬맹이가!”
광분에 찬 노호성이 한밤의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백이었던 설지굉의 전신은 짐승의 핏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의복은 곳곳이 찢겨나가 맨살을 드러냈고, 드러난 피부는 할퀴고 물린 자국으로 처참했다.
뚝… 뚝…….
대체 몇 마리를 벤 걸까.
박쥐들의 피로 뒤덮인 검은 눅진한 핏덩이가 엉겨 붙어 예기를 잃어버렸다.
설지굉의 왼손에는 목을 잃은 커다란 짐승이 들려 있었다.
도저히 박쥐라고 보기 힘든 크기의 그것은 끝까지 덤벼들던 혈편복의 우두머리였다.
“빌어먹을 짐승 놈들이 감히 날 애먹여?”
툭- 피피핏!
설지굉이 들고 있던 짐승을 눈앞으로 던져 올리고, 피가 눌어붙은 검이 숨진 녀석의 몸을 종횡으로 가로질렀다.
푸화학!
핏물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지만, 설지굉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금수 따위가 어딜…!”
사방에서 달려들며 피를 탐하는 놈들도 짜증이 났지만, 방금 조각낸 우두머리는 짐승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악했다.
혈편복들을 돌진시켜 주의를 분산시키고,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에서 빈틈을 찔러왔다.
허나 내공을 둘러친 이상 제대로 물리지만 않는다면 큰 피해를 입을 리 없다.
그걸 눈치챈 녀석은 그때부터 눈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이까짓 미물에게 하마터면 눈을 잃을 뻔했지 않나!’
설지굉의 왼쪽 눈썹 부분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이빨과 발톱에 기를 집중시키다니? 짐승 따위가 어찌…!’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혈편복의 우두머리는 미약하게나마 기를 다루고 있었다.
버러지와 다를 바 없는 미물이 기를 운용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심지어 녀석은 공격의 순간마다 발톱과 이빨에 기운을 응집시키며 달려들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들이야? 이 운남의 짐승들은?’
반사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왼쪽 눈을 잃었을 거다.
설지굉이 울화를 폭발시키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 설검대원이 다가와 상처 부위에 금창산(金瘡散)을 뿌렸다.
‘사지를 절단하는 걸로는 모자라. 온갖 고문을 병행해서 말 그대로 목숨만 붙여 놓고 끌고 간다.’
설지굉의 회색 눈동자가 시퍼런 한광을 머금었다.
“애새끼는 어디로 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