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동쪽입니다. 5조장 부원의 인솔하에 뒤를 쫓고 있습니다. 동굴을 나오자마자 추격을 시작했으니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
“좋아. 포진은?”
“지시하신 대로 아래쪽으로 몰고 갈 진형을 완성해 놓았습니다. 동쪽으로 도망쳤지만, 결국에는 남쪽으로 진로를 변경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꼬마가 추격대를 뿌리치고 계속해서 도망갈 수 있다면 말이지요.”
설검대원은 마른 비가 곧 포획될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못 잡는다.”
“네?”
“너희들로는 그 꼬마를 잡을 수 없어. 기껏해야 방향을 바꾸게 하는 정도겠지.”
“…….”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다.
하지만 설검 장로가 못 잡는다고 판단했다면 그럴 것이다.
실제로 이전까지의 추격에서 설검대는 마른 비를 따라잡지 못했고, 설지굉조차 퇴로가 없는 동굴에서 소년을 놓쳤다.
와족 족장의 아들은 재빠른 데다 일신에 지닌 무력도 뛰어난 모양이었다.
“박쥐 떼를 남김없이 베느라 기운을 많이 소모했다. 기력을 회복할 테니 호법을 서도록.”
무리하면 쫓지 못할 것은 없으나 그건 상책이 아니다.
잡지는 못하더라도 설검대가 야만인 소년을 놓칠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바닥난 기운을 회복하고 만전의 상태로 따라붙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리라.
설검대원들이 주변을 에워싸는 걸 느끼며, 가부좌를 튼 설지굉이 눈을 감았다.
퍼억! 우지끈!
등 뒤에서 날아든 검기가 나무를 때리자 거목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갔다.
쒜에엑! 퍼버벙!
“큭!”
검이 날아들고, 위력적인 장법(掌法)과 수공(手功)이 목숨을 위협한다.
마른 비는 달리는 내내 쏟아지는 맹공을 견뎌야만 했다.
‘다섯.’
근접하여 공격을 퍼붓는 자들의 숫자다.
대다수의 적들은 숲에 들어선 이후 자신의 기동력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뜀박질에 능한 사람들이 있었고, 무리를 앞질러 따라붙은 다섯 명이 마른 비를 잡기 위해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휘릭!
대리에서 암습자를 떨쳐냈듯 여기서 자르고 간다.
등 돌린 마른 비가 번갯불을 펼치고, 순식간에 적들의 후방을 점한 뒤 발을 차올렸다.
빠아악!
‘발?’
발차기를 막아낸 건 검이 아니었다.
상대는 아예 검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10년 전, 점창에 몸담기 전부터 연성해 온 고유의 무공을 여전히 간직한 이들.
외부에서 유입되었기에 삼대 제자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지만, 뛰어난 무력으로 말미암아 주력 전투 부대에 편입된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른발로 마른 비의 공격을 상쇄한 설검대원이 연달아 왼발을 찼다.
쐐애액―!
검격에 뒤지지 않는 예리함이다.
소년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걸렸어.”
빠악!
“으윽!”
이번엔 주먹이다.
어느새 마른 비의 뒤를 잡은 또 다른 설검대원이 정권을 뻗어왔다.
몸을 비틀었지만, 타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투검에 당했던 왼쪽 어깨.
노리고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시큰거리는 어깨를 움켜쥔 마른 비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번갯불을 발동했다.
“그 희한한 경공. 무척이나 빠르지만, 유효 거리가 짧더군.”
몇 번이나 본 기술을 간과할 리 없다.
적들은 번갯불의 최대 이동 거리를 눈치채고 있었다.
퇴로를 한정시키기 위해 쏟아낸 주먹과 발.
소년이 움치고 뛸 공간은 한정돼 있으며, 거리를 감안해 공간을 선점하면 잡을 수 있다.
번갯불로 이동하자마자 검이 내리꽂히니, 기겁한 마른 비가 허리를 꺾었다.
“으윽…!”
드러눕다시피 꺾은 상체 위로 검이 스친다.
잘린 앞머리가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고,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지금 쫓아오는 적들은 하나같이 만만한 자가 없었다.
쐐애액!
빗나간 걸 깨닫자마자 검을 회수한 상대가 마른 비를 세로로 쪼개왔다.
나려타곤(懶驢打滾).
게으른 당나귀가 땅바닥에서 뒹구는 모양새는 무림인들에게 수치나 다름없는 회피 동작이다.
하지만 마른 비는 그런 건 알지도 못했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할 뿐.
데굴데굴 땅바닥을 구른 소년이 흙투성이가 되어 몸을 일으켰다.
파앙!
일어나자마자 재차 번갯불을 발동해 뒤로 빠진다.
한 명도 쉽지 않은데 무려 다섯.
이대로 더 부딪혔다가는 분명 죽고 만다.
멀찍이 거리를 둔 마른 비에게 의도된 조롱이 날아왔다.
“족장의 아들이라더니 요리조리 도망만 칠 건가? 와족 놈들의 수준을 알 만하구나.”
‘산’이나 ‘안개 걸음’이라면 발끈하여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른 비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등을 돌려 도주할 뿐이다.
“칫!”
꼬맹이치고 놀라운 무력을 지녔지만, 덤벼오면 잡고도 남는다.
문제는 지금처럼 도주할 경우에 따라붙기가 영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도발을 해봤지만 꼬마는 걸려들지 않았다.
잠깐 부딪히는 사이 거리를 좁힌 동료들의 기를 느끼며, 다섯의 설검대원이 발을 놀렸다.
‘곧 해가 뜰 거야.’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 마른 비가 하늘을 힐끗 올려다봤다.
동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자연지형에 익숙하다는 이점과 어둠에 구애받지 않는 밤눈 덕에 적들에게 따라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적들의 추격 속도는 상승할 것이고, 그럼 뿌리치기가 훨씬 어려워질 거다.
‘위쪽이 두터워.’
추격대의 기운은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넓게 포진한 적들이 토끼몰이 하듯 시시각각 다가온다.
또다시 발이 멈추는 사태가 빚어진다면 다수의 적들이 북쪽에서부터 들이닥칠 게 틀림없었다.
도주하는 방향을 바꿔야만 했다.
‘남쪽으로.’
마른 비가 동쪽으로 계속해서 이동한다면 동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와족의 전사들과 조우할 가능성이 있다.
당연히 마른 비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고, 자신을 남쪽으로 몰기 위한 포진임을 눈치챌 수 없었다.
그저 적들의 기운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달릴 뿐이다.
다만 진로를 틀기 전, 조금이라도 적들의 발을 늦추고 자신이 향하는 곳을 알 수 없도록 손을 쓸 필요는 있었다.
‘저 다섯 명에게 따라 잡히더라도 시도해야 해. 잘되어야 할 텐데.’
“후으읍―!”
깊게 들이마신 숨으로 맑은 호흡과 자연기를 사지에 퍼뜨렸다.
동굴에서 상당한 뇌력을 소진한 바람에 머리가 지끈대지만, 남은 뇌력을 이번에 몽땅 쏟아붓는다.
걸음을 멈춘 마른 비가 보산에서 마주쳤던 한 마리 야수를 떠올렸다.
‘일체화와 언령의 연계.’
일체화의 대상은 대리로 북진하는 중에 힘을 겨뤘던 불곰이다.
놈의 호흡과 자연기를 떠올리고, 녀석이 발산했던 특유의 기운을 모방한다.
의태.
보산을 휘어잡았던 불곰의 기세가 대리 숲 한복판을 떨쳐 울렸다.
『크워어어엉!』
뇌리를 파고드는 의지의 전파.
언령을 사용한 이상 소리까지 흉내 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마른 비는 그렇게 했고, 성난 불곰의 포효와 격렬한 맹수의 기세가 사방으로 줄기줄기 뻗어나갔다.
“뭐 하는 거야? 저놈?”
마른 비를 쫓던 다섯 명의 눈이 의문에 휩싸였다.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도 모자란 녀석이 걸음을 멈추더니 두 팔을 들어 올리고 기이한 행동을 한다.
갑작스레 꼬마의 기운이 돌변하더니, 흡사 야생의 맹수와 같은 거친 기운을 뿜어냈다.
뒤이어 맹수를 흉내 낸 울부짖음이 그들의 뇌리에 꽂혔다.
“음…!”
“뭐야, 이건? 전음?”
“아냐, 달라. 귀가 아니라 마치 머릿속을 직접 파고드는 것 같은…!”
마른 비의 언령에 노출된 검사들이 주춤했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기묘한 음공(音功)이다.
아니, 음공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머리를 울리는 소리에 놀랐을 뿐 어떤 위해도 가해지지 않았으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을 마친 소년이 어지러운지 비틀거리는 게 보였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로선 고맙군. 산개해! 이번에 잡는다!”
“깨액!”
‘깨액?’
알았다는 대답 대신 튀어나온 건 기묘한 울음소리다.
뒤이어 수풀을 뚫고 날렵한 동체가 설검대원을 덮쳤다.
“뭐냐!”
촤아악!
반사적으로 내친 검이 시커먼 물체를 갈랐다.
몸통이 둘로 갈린 고라니가 털썩 쓰러지며 더운 피를 뿜었다.
“갑자기 웬?”
두두두두―!
마른 비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전방위적인 소란이 일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불곰의 위협을 담은 언령.
숲 곳곳에 숨죽이고 있던 야생 짐승들이 까마득한 포식자의 서슬에 놀라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푸드득!
사사사삭!
펄쩍, 펄쩍!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기운들이 폭주하며 무질서하게 내달린다.
불곰에 의태한 마른 비의 포효는 야수들의 생존 본능을 건드렸고, 공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짐승들이 숲을 어지럽게 수놓았다.
심지어 손가락만 한 벌레들마저 사방팔방으로 날아오르며 새벽을 기다리는 숲의 고요를 깨뜨렸다.
“저 꼬마, 무슨 짓을 한 거야?”
“놓치면 안 돼! 잡아!”
“옆! 옆부터 봐! 짐승들이 몰려온다!”
‘됐어! 성공이야! 윽…!’
야수 제어에 능숙하지 못한 마른 비는 연달아 대규모 언령을 쏟아낸 통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아찔함을 맛봐야 했다.
혹사당한 뇌가 비명을 지르고, 시야가 흐려지면서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댈 정도다.
하지만 성공이다.
머리를 흔들어 간신히 초점을 맞춘 마른 비가 상황을 살폈다.
‘잠시뿐이야. 지금 저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야 해.’
“꾸이익!”
두두두두!
한옆을 보니 다급하게 발을 놀리는 멧돼지가 눈에 들어왔다.
설검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달리다가 고라니를 반 토막 낸 검사의 서슬에 놀라서 이쪽으로 방향을 튼 녀석이다.
달리는 방향은 남쪽.
상당한 덩치에 발도 잽싸다.
아주 적당하다.
저놈에게 간다.
일체화로 지형지물에 녹아든 마른 비가 지형의 결을 타고 흐르고, 뜀박질하는 멧돼지의 몸통에 찰싹 달라붙었다.
“꾸이익?!”
『놀라지 마. 그대로 달려.』
우선은 멧돼지의 기운과 호흡에 동조한다.
그리고 바닥을 드러낸 뇌력을 박박 긁어 언령을 발했다.
‘큭…!’
밀착한 하나의 개체에게 의사를 전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다.
한동안 두뇌를 쉬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고도 어려우리라.
다행히 의사는 전달되었고, 마른 비에게 동질감을 느낀 멧돼지는 안도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포식자의 엄포에 놀라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던 녀석은 마른 비를 매단 채 필사의 질주를 감행했다.
“놓쳤단 말이냐!”
부원이 고개를 숙인 다섯 명에게 호통을 쳤다.
설지굉이 없는 지금, 족장의 아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건 빼어난 경공을 지닌 이 다섯뿐이다.
그저 줄기차게 따라붙으며 압박을 주고 발을 늦추기만 하면 되는 것을.
그게 그리 어려웠단 말인가.
마른 비의 뒤통수를 놓쳐 버린 설검대는 전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북쪽!”
“절대 아닙니다!”
“서쪽은?”
“목을 걸겠습니다.”
“서쪽엔 나도 있었다. 서쪽은 확실히 아니야. 동쪽은 어떤가?”
마른 비를 앞질러 동쪽을 막은 설검대원은 없었다.
하지만 마른 비에게 가장 가까이 있던 다섯 명 중 한 명이 고개를 들며 대꾸했다.
“아마 아닐 겁니다. 날뛰는 짐승들 때문에 발이 묶인 와중에도 동쪽만은 저희 모두가 주시했습니다. 북쪽에 몰린 설검대원들의 기를 감지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생각됩니다.”
정황상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한 추측이었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렇다.”
결정을 내린 부원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남쪽을 기준으로 1열 횡대! 서로의 간격은 3장! 전속력으로 경공을 펼치되 기감을 퍼뜨려 절대 놓치지 않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설검대 전원이 남쪽을 바라보며 길게 늘어섰다.
설검대 3개 조, 150여 명.
3장의 간격을 두고 서면 약 4리에 조금 못 미치는 거리를 샅샅이 훑는 게 가능하다.
해가 떠올라 시야도 확 트였다.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지금부터 따라붙으면 놓칠 리가 없었다.
“가자!”
반드시 잡고 말겠다는 의지가 뚝뚝 묻어나는 호령이다.
부원의 명령을 기점으로 설검대가 추격을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