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고마워!”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거리에 이르자, 멧돼지는 뜀박질을 멈췄다.
녀석의 몸에 매달려 있던 마른 비가 훌쩍 뛰어내리며 인사했다.
“후우…….”
불과 일각 전까지만 해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 정도 눈속임으로 노련한 적들을 따돌리기는 힘들겠지만, 시야에 적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위안이 될 줄은 몰랐다.
‘금방 쫓아올 거야.’
대리의 민가와 고성의 성벽 위.
잠시 마음을 놓는 바람에 적들이 거리를 좁히는 걸 허용했다.
이제는 방심하지 않는다.
목숨이 오가는 실전을 거듭하며 소년은 부쩍 성장하고 있었다.
마른 비가 지체 없이 남쪽을 향해 발을 놀렸다.
‘한 명 한 명이 만만치 않지만, 특히 그 노인.’
살벌함과 집요함이 묻어나는 잿빛 눈동자.
절대로 포기할 자가 아니다.
박쥐 떼에게 곤욕을 치렀겠지만, 슬슬 기력을 회복했을 거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따라붙고 있을 노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무런 준비 없이 또 마주치면 그땐 빠져나가지 못해.’
마른 비의 얼굴에 깊은 고민이 서렸다.
‘도와줄 사람은 없어. 남쪽으로 죽어라 달려도 마을까지 가기 전에 붙잡히고 말 거야. 생각해! 적들의 추격을 뿌리칠 방법. 적들에 비해 내가 우위에 있는 것.’
지형을 읽는 안목.
자연에 녹아드는 은신.
그리고… 야수에 대한 지식과 친화력.
‘적들을 끊어낼 수 있는 장소!’
마른 비가 여규에게 문자를 배우던 순간을 떠올렸다.
‘와…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어쩌면 이렇게 아는 게 하나도 없냐? 무식한 것도 정도가 있지, 세상에…….’
“와아, 나도 놀라워. 나 진짜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흥미를 갖게 되자 마른 비는 습자지가 먹물을 빨아들이듯 문자를 습득했고, 잡다한 지식들도 하나씩 배워나갔다.
그 중에는 방위를 가늠하는 법과 독도법(讀圖法)도 있었다.
등고선이니 축척이니 하는 어려운 것들은 들어도 잘 모르겠다.
그저 운남의 지형이 빼곡하게 수놓인 한 장의 종이에 감탄할 뿐이다.
나고 자란 고향의 지형들과 성년식 기간 중 두 발로 걸어온 지역들이 그려진 운남의 지도는, 마른 비의 협소했던 시야를 넓히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여규가 주섬주섬 꺼낸 한 권의 서책을 보고, 마른 비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이 넓은 운남이 고작 이 정도 크기라고?’
운남을 넘어 북쪽에 펼쳐진 한족들의 땅에 대해서는 그믐 할아범에게 수차례 들었다.
하지만 넓다 넓다 말로만 들었지, 이토록 광대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한족들이 말하는 중화를 기준으로 운남은 남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조그만 땅일 뿐이었다.
‘원나라가 세워지고 서역과의 교류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졌어. 지금 우리가 보는 중화전도(中華全圖)는 세계의 전부가 아니야. 북으로는 몽골 초원, 동으로는 고려, 남서쪽으로는 천축(天竺)과 토번(吐蕃)……. 서쪽으로는 아직 얼마나 많은 미지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지 아무도 몰라. 세상은 넓어, 비아야.’
언덕에 홀로 서서 대리를 처음 내려다보았을 때.
문명을 접하고 마른 비를 둘러싼 껍질이 깨졌던 것처럼, 지도를 통해 접한 세계는 운남에 갇혀 있던 마른 비의 세상을 한순간에 열어젖혔다.
‘맙소사!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운남은, 아니, 한족들이 중화라 일컫는 드넓은 영토조차 광활한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경험하지 못한 일들과 맛보지 못한 음식들, 보지 못한 풍경들이 상상의 지평선 너머에서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꼭… 모든 곳을 돌아볼 거야!’
첫사랑의 설렘에 밤잠 못 이루는 소녀처럼, 마른 비의 젊은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아차!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지!’
인상적이었던 순간이 떠오르는 바람에 본래의 목적을 잊었다.
마른 비의 눈앞에 여규와 함께 들여다봤던 운남의 지도가 떠올랐다.
‘대리를 나와 동쪽으로 이동했었어. 그리고 지금 가는 방향은 남쪽. 이대로 쭉 내려가면…….’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적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곳.
그런 장소를 찾아내지 못하면 적들에게 잡혀서 죽거나, 질질 끌려가는 비참한 결과가 기다릴 뿐이다.
두뇌를 맹렬하게 회전시킨 끝에, 마른 비는 부족 회의에서 들었던 그믐의 말을 가까스로 떠올릴 수 있었다.
‘웅대한 산맥과 드높은 봉우리, 끝이 보이지 않는 골짜기와 몇 살인지 짐작조차 어려운 고목의 숲. 그 험난한 대자연에는 치명적인 독물들이 똬리 틀고, 사나운 맹수들이 먹잇감을 찾아 배회하지. 운남의 심장이란 비유가 아깝지 않은, 치열한 생존 경쟁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전쟁터. ……은 그런 곳이다.’
기억을 더듬으며 멍하게 흐려졌던 마른 비의 눈이 또렷한 초점을 찾았다.
‘거기야! 거기로 가야 해!’
어떠한 외부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지금, 자신이 삶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거기뿐이다.
승부수를 던질 장소를 정했다.
남은 건 전력으로 달리는 것뿐.
마른 비의 다리에 대자연의 숨결이 팽팽히 깃들었다.
“허억, 허억…!”
숲을 가로지르는 육신이 피로에 휘청이고, 폐는 심각한 공기의 결핍에 허덕이며 거친 호흡을 토해낸다.
몸 곳곳에 새겨진 검상(劍傷)에는 흘러내린 피가 시꺼멓게 말라붙어 있었다.
4일? 5일?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한 토막의 쪽잠도 허락받지 못한 데다 연이은 뇌력의 개방으로 더 이상 사고라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극심한 긴장과 초조함, 굶주림, 탈진, 정신을 마비시킬 정도의 수면 부족…….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달릴 뿐, 마른 비는 언제 거꾸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더 이상은 못 가…! 제발 멈춰라, 꼬맹이!’
‘이러다 우리가 먼저 미쳐 버리겠어…!’
‘조금만, 조금만 쉬었다 가자…….’
남쪽으로 내달린 끝에 겨우 마른 비를 따라잡은 설검대도 마찬가지였다.
계곡이 나타나면 잠시 물을 마시고, 스쳐 지나는 짐승을 잡아 생으로 씹으며 마른 비를 추격했다.
잠은 잘 수가 없었다.
죽어라 따라붙어도 아슬아슬하게 뒤를 쫓는데, 발을 멈췄다간 놓칠 게 분명했다.
차라리 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도망갔다면 모를까.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소년의 뒷모습은 설검대원들이 발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였다.
‘네 번이나 기회가 있었는데!’
밤은 소년의 시간이었다.
점점 울창해지는 수림, 눈에 띄게 험해지는 지형…….
밤에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뒤를 쫓아도 어둠에 방해받지 않고 질주하는 소년을 잡을 수 없었다.
거리를 좁히는 건 낮이다.
기력이 다해가는지 소년의 속도는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고, 내력의 우위에 선 설검대는 밤 동안 멀어졌던 거리를 해가 떠 있는 동안 바싹 좁혔다.
마른 비를 공격할 기회를 잡은 것도 한 번을 제외하면 모두 낮이었다.
하지만 척 봐도 탈진 직전인 소년은 어떻게든 기를 쓰고 빠져 나갔다.
십 대 중반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무력도 성가시지만, 야수 제어라는 와족의 기예가 골칫덩이였다.
무슨 조화를 부리는지 위험할 때마다 사방의 짐승들이 직간접적으로 소년을 도우는 바람에 설검대는 번번이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쳐야만 했다.
‘게다가 저 꼬마, 점점 싸움에 능숙해지고 있어.’
충돌이 일어나고, 사선을 넘을 때마다 야만인 소년은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급기야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으려 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검에 머리를 들이밀 정도로 영악해졌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설검대는 검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만으로는 못 잡아.’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이 그렇다.
자신들은 소년의 도주로를 파악하고 다른 곳으로 새지 못하게 압박을 가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부원이 아직껏 합류하지 못하고 있는 설지굉을 떠올렸다.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소년이 잠 한숨 자지 않고 몇 날 며칠 동안 질주하리라고는.
설지굉이 아무리 빠르다지만, 익숙하지 않은 지형에서 한참 먼저 출발하여 쉬지 않고 달리는 그들을 단시간에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곧 합류할 거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이 지긋지긋하고 괴로운 술래잡기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부원의 애타는 생각이 전해지기라도 한 걸까?
마치 불렀냐는 듯 저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왔어!’
꾸벅꾸벅 졸며 달리던 마른 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보다 더욱 사납고 흉포해진 기세.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겠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노인이 자신을 때려잡기 위해 맹렬히 따라붙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아직도 멀었…… 아!’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어서 깨닫지 못했다.
만천하에 팽팽하게 들어찬 이 기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고목과 바람이 제멋대로 헝클어놓은 수풀들.
세월이 다듬은 고대의 암석들이 투명한 대기에 진녹의 자연기를 흐드러지게 피워 올린다.
한 모금의 호흡을 들이킨 것만으로도 기진맥진했던 육신에 생명의 불씨가 점화되는 듯했다.
절대적인 열세에 몰린 마른 비가 선택한 반격의 땅.
무수한 적들을 꼬리에 단 채 소년이 애뢰산(哀牢山)에 진입했다.
애뢰산
《“용케 잘 찾아왔네?”
천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고산.
작열하는 태양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쉰내 나는 땀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불쾌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눈앞의 남자를 만나기 위해 중원을 횡단한 노고에 비하면 이 정도 더위쯤은 우스울 뿐이다.
이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쏟은 그간의 노력들이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후우……. 엄청나게 머네요. 죽는 줄 알았습니다. 드디어 뵙는군요.”
이 순간을 고대하며 수많은 말들을 준비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나온 건 멋대가리 없고 평범한 한마디였다.
태양을 등지고 앉은 남자가 환히 웃었다.
“반가워.”
“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수왕.”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 아래 탄력 넘치는 근육이 꿈틀댄다.
그의 자유로운 성향을 상징하듯 적당한 길이로 풀어헤친 머리칼이 바람에 넘실댔다.
정(正), 사(邪), 심지어는 마(魔)까지도.
이 남자를 자신들의 부류로 끌어들이기 위한 갖은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고, 무엇으로도 옭아맬 수 없는 그의 특질을 재차 확인했을 뿐이다.
애초부터 수왕은 편협한 잣대로 사람을 구분 짓는 중원인들의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남자였다.
변방 중의 변방인 운남이 낳은 기린아.
중원에 나온 이후 그가 만들어낸 일화들은 일일이 열거하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다.
온갖 곳을 쏘다니는 그의 방랑벽 때문에 절친한 지인이나 동료들이 아니고서야 얼굴을 구경하기가 힘들다.
인구(人口)에 끊임없이 회자되지만, 너무나 만나기 힘든 남자.
그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부터 설렘으로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규에게 서신을 받았어. 저번에 창산에도 방문했다던데.”
“네. 그날 많은 이야기를 들었죠. 고검에 이어 수왕까지. 동료들이 억세게 운 좋은 놈이라고 부러워하더군요.”
“운은 무슨. 만나서 나도 좋아. 삭월, 맞지? 월주가 그렇게 배짱이 두둑하다던데. 기회가 되면 인연이 닿길 바라.”
“……!”
그간 만났던 자들은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힐난하기 바빴다.
그걸로 그치면 다행이다.
면전에서 웃는 낯을 내비쳤던 자들이 헤어지자마자 밀고라는 비수를 들이대는 경우도 허다했다.
중원에서 평범하게 자란 자들과는 거쳐 온 인생의 궤적이 다르기 때문일까?
두 신성(新星)은 독특한 성장 배경만큼이나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험난한 대지를 가로지른 노고가 인연이 닿길 바란다는 한마디에 말끔히 씻겼다.
“월주에게 조심하라고 전해줘. 당신들이 상대하는 그 사람, 정말 보통이 아니라고. 무서운 사람이야.”
“아! 그러고 보니 만나신 적이…!”
불과 수년 전의 일이지만, 전설처럼 회자되는 일화다.
‘그자’와 수왕의 만남.
거기서부터 비롯된 사건들.
‘그나저나 그 사람이라니…….’
저렇게 대놓고 지칭하는 건 처음 봤다.
수왕의 뿌리가 한족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아무리 커다란 은혜를 베풀었다 한들 한족이었다면 저런 거침없는 발언은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 남자의 행보는 놀라운 구석이 있었다.
“아, 혹시나 해서 말인데… 말투 때문에 기분 나쁜 건 아니지? 이해해줘. 부족의 어른들을 제외하면 존대는 쓰지 않거든. 많이 오해들을 하더라구.”
“무슨 말씀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응, 이해해줘서 고마워. 난 당신도 말 좀 편히 했으면 좋겠는데.”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강호에서는 어디까지나 명성과 실력이 우선이지요. 저 같은 무명소졸이 수왕에게 말을 놓았다고 하면 난리가 날 겁니다. 더군다나 제가 연하입니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당신, 전해지는 기운이 맑아서 참 좋아. 친구 하자.”
앞으로 슥 내민 주먹이 눈길을 끈다.
중화 남부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와족식 간이 인사법이다.
유행을 퍼뜨린 장본인이 인사를 청해오니 감개무량할 따름이었다.
주먹을 마주 내밀어 맞부딪히며 말했다.
“수왕의 친구 제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되겠군요. 그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전 고리타분한 사람인 데다 제 배포로는 불가능한 제안이에요. 뜻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한족들의 예의란 거 참… 피곤해. 알겠어. 강요하지 않을게.”
시원시원한 데다 꾸밈없는 미소가 번진다.
듣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남자였다.
예의가 없다고 싫어하는 자들도 있지만, 그가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과 교우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자유분방함 때문이리라.
“천축으로 가시는 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먼 곳까지 발걸음하시는 이유가…?”
“별거 없어. 그냥 여행이야. 부처가 처음으로 설법했다는 녹야원(鹿野苑)이 보고 싶어져서.”
“……금시초문이군요. 수왕께서 불도(佛道)에 관심이 있으셨다니…….”
“응? 아냐, 그런 거. 패 아저씨가 죽기 전에 가보고 싶다고 하도 노래를 불러서 기억에 남더라고. 천축에 다녀온 사람들이 남긴 답사기를 읽어봐도 그렇고. 뜻깊은 장소라니 한번 가보는 거야. 요즘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천축의 음식이 특이하다고 하니 맛볼 겸 겸사겸사.”
“수왕의 행보에 영향을 미치는 자라니. 패 아저씨라는 분은 대체…….”
“아우, 그냥 이름 불러. 수왕은 무슨, 낯간지럽게. 패문강 아저씨 몰라? 자기 말로는 중원에서 꽤 유명하다던데?”
“……본인의 입으로 유명하다고 했다고요? 수왕의 앞에서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하다니 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패문강…? 그러고 보니 낯익은 이름이긴 한데……. 패문강… 잠깐, 패문강?! 서, 설마 저 북벽(北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아, 맞는 것 같아. 별호가 북벽이라고 했던 것 같네.”
“맙소사!”
항상 별호로 불리는 남자이기에 쉽게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북벽이라니!
북벽이라면 유명한 정도가 아니다.
수왕이 그렇듯 최소 중원십좌에 버금가는, 아니, 무인들을 줄 세우기 좋아하는 상당수의 인사들이 조심스레 십좌의 위에 올려놓는 몇 안 되는 남자인 것을.
북벽과도 인연이 있었던가.
수왕의 인맥 범위를 짐작하는 건 포기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다녀와서 자랑해야지. 그 아저씨, 놀려먹는 재미가 있거든.”
“북벽과 언제 인연을…! 그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북벽이 본인의 입으로 유명하다는 말을 했다고요? 그런 농담까지 건넬 정도면… 두 분께서 상당히 친한 모양입니다.”
“뭐 그냥저냥. 처음에 만났을 땐 대판 싸웠었지. 다짜고짜 무기부터 뽑더라고.”
“드, 듣고 싶습니다! 수왕 대 북벽이라니! 세기의 결전이나 다름없네요! 저… 이런 걸 물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누가 이겼는지요?”
“음… 혼자 싸웠을 땐 밀렸지. 그땐 어렸거든. 그 아저씨 진짜 무지막지해.”
수왕이 졌다?!
초근거리 백병전에서는 천하를 통틀어 명실공히 최강을 다툰다는 수왕이?!
“아… 그렇군요. 과연 북벽…! 어? 잠깐만요. ‘혼자 싸웠을 때’라는 말씀은?”
호쾌한 미소가 입가에 그어졌다.
한옆에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는 눈길을 따라가니…… ‘그것’이 있었다.
짐승, 그것도 맹수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맑은 눈빛이 나무 위에서 번쩍인다.
수왕만큼이나, 아니, 어떤 면에선 수왕보다도 유명한 그의 반려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할 말을 잊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일인일수를 한꺼번에 마주한 순간이다.
야생의 흉맹함을 담고 있으면서도 티 없이 맑은, 이율배반적인 눈동자가 홀릴 듯이 다가왔다.
“함께… 싸워보셨나요?”
검사가 검을 쓰고, 궁사가 활을 들 듯 와족에게 있어 반려수란 영혼을 나눈 벗이자 전투력을 배가시키는 병기와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기억한다.
함께 싸웠다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뭐, 밀리진 않았지.”
수왕은 씨익 웃었다.
답변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 전투를 직접 관전하지 못한 게 한없이 아쉬울 뿐.
“그나저나 왜 보자고 한 거야?”
“월주님과 인연이 닿길 바란다는 말씀. 그 한마디로 뵙고자 한 목적은 이뤘습니다.”
“잉? 고작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고작이 아닙니다. 저희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죠. 월주님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깊이 숙인 고개로 마음을 전했다.
공적인 임무는 달성했다.
그렇다면 이젠 사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킬 시간이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있겠는가.
“개인적인 질문을 좀 드려도 될까요? 묻고 싶은 것이 참 많습니다.”
“응. 얼마든지.”
“그럼 우선… 수많은 사건의 중심에 계셨는데, 중원에 나온 이후의 행보는 널리 알려져 있죠. 그전의 일이 궁금합니다. 가령 어린 시절, 점창파와 충돌했던 일이라던지……. 아! 처음 곤란을 겪으신 게 언제인가요? 목숨이 위태로웠다거나 하는.”
“죽을 뻔한 거? 음… 맨 처음이라면… 점창파 설검대에게 쫓겼을 때의 일이겠네. 대리에서 시작해서 애뢰산까지 잠 한숨 못 자고 도망쳤는데…….”
한가하다는 말이 맞는 듯 했다.
수왕은 반나절에 걸쳐 모든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해 주었다.
하품을 연발하던 그의 반려수가 적당히 하라는 눈초리로 날 째려볼 때까지.》
혼세록(混世錄) 대담 편
「수왕(獸王) 마른 비」
삭월 월목대원 태인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