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끼루룩, 끼룩.
하늘을 배회하는 날짐승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적신다.
스스스―
찌륵, 찌르륵.
바람의 손길에 수풀이 춤추고, 흔들리는 잎에서 뛰어오른 귀뚜라미가 더욱 깊숙한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꿀꺽.
애뢰산의 초입.
엉클어진 덤불 속에서 몸을 낮춘 마른 비가 말라붙은 침을 억지로 삼켰다.
소년은 바짝 긴장하여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이상해. 이건… 너무 조용해.’
만개한 자연이 보보마다 영기 어린 숨결을 토한다.
몇 날 며칠을 잠 한숨 못 자고 달려온 통에 기절 일보 직전이었는데, 충만한 자연기에 고무되어 한바탕 날뛰고 싶어질 정도로.
하지만 고요하다.
무수한 생명의 기운이 감지되는데도 사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운남의 수많은 지형들을 거쳐왔지만 이토록 적요한 침묵이 감도는 곳은 처음이었다.
하늘을 나는 날짐승이나 풀벌레의 소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원시림 곳곳에 몸을 숨긴 동물들.
땅을 기는 길짐승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호흡 소리가 새나가는 것조차 억누르고 있었다.
‘추격대로부터 멀어지려면 달려야 하는데……. 안 돼. 왠지 기척을 흘려선 안 될 것만 같아.’
야생의 본능이 격렬한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절대 존재를 드러내선 안 된다고.
주의를 끌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최대한 자연에 녹아들라고.
수풀의 호흡과 자연기에 감응한 마른 비가 본능의 조언을 따랐다.
‘이 느낌… 강력한 무언가가…….’
스르륵―
“크아아앙!”
무언가가 미끄러져 내리는 소리.
야수의 맹렬한 포효가 애뢰산의 초입부를 뒤흔들었다.
우지직!
“샤아악!”
끔찍한 소리가 연달아 터진다.
단단한 비늘이 통째로 찢기는 파열음.
격렬히 울부짖는 무언가가 장대한 몸체를 세웠다.
‘뭐, 뭐가 이렇게 커?’
풀숲에 숨어 있던 마른 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아아아악!”
쿠쾅! 와지끈!
최소 7장 길이는 될 법한 비단구렁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몸뚱이를 휘돌리기 시작했다.
뱀의 꼬리에 부딪힌 나무들이 줄기째 부러져 나가고, 요동치는 몸통에 눌린 대지가 진동하며 신음을 토했다.
비단구렁이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는 건 붉은 털을 지닌 표범이었다.
표범 특유의 날렵함보다는 사자의 그것에 비견되는 우람한 몸체가 눈길을 끈다.
성년식을 떠나기 전, 삼정산에서 때려잡았던 표범보다도 월등히 커다란 놈이었다.
운남에서 나고 자란 마른 비조차도 이토록 거대한 짐승들은 본 적이 없다.
거수(巨獸)들의 사투는 뒤따르는 추격대를 잊게 할 만큼 치열하고 살벌했다.
“샤아아악!”
비단구렁이가 사납게 날뛰었지만, 붉은 표범은 뱀의 몸통에 발톱을 박아 넣고 단단히 달라붙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누가 보아도 비단구렁이는 곧 쓰러질 듯 위태했다.
깨물린 목덜미에서 철철 흘러내리는 피가 노랗고 흰 뱀의 비늘을 붉게 적셨다.
표범이 사냥에 성공하겠구나, 생각한 순간 비단구렁이의 눈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캬아아아악!”
뱀이 발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구렁이가 몸체를 수직으로 꼿꼿이 세웠다.
잠시 멈췄던 뱀은 머리 뒤에 달라붙은 고양이를 응징하기 위해 지면을 향해 거꾸로 몸을 내리꽂았다.
쿠아아아앙!
고공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하강 속도.
묵직한 걸 넘어 육중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무게.
그대로 압사당하면 척추는 물론이고 전신의 뼈가 바스러지고 만다.
지면에 충돌하기 직전, 표범은 발톱과 이빨에 힘을 풀고 날아올랐다.
부아앙― 퍼억!
노렸던 바다.
머리부터 지면에 충돌했지만, 구렁이는 별 피해를 입지 않은 듯했다.
잽싸게 꼬리를 휘둘러, 날아오른 표범을 그대로 후려친다.
얻어맞은 녀석이 튕겨져 나가 그대로 바위에 처박혔다.
쿠아앙!
“크… 르르…….”
등줄기에 가해진 충격이 고통스러운 듯 표범의 콧잔등이 일그러졌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녀석이 뱀이 있던 자리를 노려봤다.
“……?!”
치명적인 실수다.
녀석은 몸을 일으키는 즉시 자리를 피했어야 했다.
슈르르르! 우드득!
삽시간에 거리를 좁힌 비단구렁이가 몸통으로 표범을 휘감더니 전신을 조였다.
뼈가 부러지다 못해 산산조각으로 갈리는 섬뜩한 소리가 배어나온다.
장대한 덩치를 자랑하던 표범은 울음소리 한 토막 남기지 못한 채 주둥이를 쩍 벌리고 절명했다.
콰악!
아가리를 벌려 표범의 머리를 덮친 뱀은 녀석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뱀의 몸통이 불룩하게 튀어나오며 바스러진 사냥감의 형태가 고스란히 두드러졌다.
‘자연기!’
위기에 처했을 때 비단구렁이의 눈에서 번쩍인 푸른빛.
놈은 인식하지 못한 것 같고, 아직 미약한 수준에 불과하지만 방금 그건 자연기의 발현이 분명했다.
‘신체 한 부분에 일시적으로 힘을 집중시킨 정도가 아니야. 분명 호흡으로 받아들인 자연의 기운을 조율하고 제어했어! 대망에 이어 또 한 마리 수식어가 붙는 뱀이 출현하는 건가!’
위기를 맞아 잠시 번뜩이고 사라졌을 뿐이지만, 한번 성공한 이상 언젠가는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될 확률이 높다.
나약한 육체를 지닌 인간과 달리 자연이 내린 강건함을 타고난 맹수가 자연기까지 터득하게 된다면 그 강력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게 당연하다.
이놈은 차후 운남에 이름을 떨칠 맹수가 될 게 틀림없었다.
‘진입하자마자 이런 괴물을 마주치게 될 줄이야.’
겨우 산의 초입일 뿐이다.
한데 운남 전역을 돌아도 찾아보기 힘든 괴수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운남의 심장.
왜 할아범이 애뢰산을 그렇게 비유했는지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쿠어어엉!”
놀라기엔 한참이나 일렀다.
표범을 포식하고 승리의 쾌감을 만끽하는 비단구렁이의 후방에서 흉포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퍼억!
맹렬하게 휘둘러진 앞발이 뱀의 머리를 후려쳐 땅으로 내리꽂았다.
콰자작!
비단구렁이의 대가리가 맹수의 앞발과 지면 사이에 끼어 납작하게 눌리더니 그대로 터져나갔다.
‘이, 이럴 수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두 손으로 입을 막은 마른 비의 눈에 아찔할 만큼 거대한 동체가 비쳐들었다.
부들부들 경련하는 비단구렁이.
그리고 두 발로 대지에 버티고 선 채 녀석을 오연하게 내려다보는 야수.
웅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한 덩치의 곰이었다.
짙은 갈색을 띤 털이 빳빳하게 곤두서서 안 그래도 비할 데 없는 몸집을 더욱 커 보이게 만든다.
바위도 분쇄할 듯한 누런 이빨들 사이로 진득한 침이 흘러내리고, 하나뿐인 외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저건?’
한데 녀석의 날카로운 이빨들 중 송곳니 하나가 비어 있었다.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어 보이지만, 우측 가슴팍부터 좌측 어깨에 걸쳐 움푹 함몰된 상처도 보인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
절대로 평범한 놈이 아니다.
마른 비는 금세 이런 외견에 부합하는 곰 한 마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이놈! 흉웅(凶熊)이잖아?!’
마른 비의 기억이 수년 전의 어느 날을 더듬었다.
강건한 신체 곳곳에 깊은 상처를 입은 ‘우둔한 땅’이 마을로 복귀한 날을.
그는 별거 아니라며 씨익 웃었지만, 시뻘겋게 파인 곰의 발톱 자국은 보는 이가 아찔해질 만큼 살벌했다.
이틀간의 격전 끝에 쓰러뜨린 흉웅의 이빨은 코걸이로 가공되었고, 우둔한 땅이 운남 전역에서 인정받을 만한 전사임을 증명하는 증표가 되었다.
또한 우둔한 땅은 흉웅과의 목숨을 건 결전 끝에 천둥바위를 터득할 수 있었다.
‘저놈 영역은 금평(金平)일 텐데 왜 애뢰산에?’
금평은 운남 전체를 놓고 볼 때 동남쪽에 위치한 땅이다.
운남 정중앙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애뢰산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터.
확고하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녀석이 이 먼 곳까지 와서 어슬렁댈 이유가 없었다.
‘설마… 영역을 빼앗으러 온 건가?’
각성을 위한 필수 조건.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과 생존을 향한 갈망도 중요하지만, 보다 핵심이 되는 것은 강렬한 염원이다.
동족에게 인정받고 무리에 복귀하고 싶었던 기형 원숭이는 괴후가 되었다.
들끓는 맹수들로부터 무리를 지키고자 했던 코끼리는 전상이 되었다.
그리고 마주한 모든 생물을 거꾸러뜨리고 싶었던 난폭한 곰은 흉(凶)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호승심과 비슷한 감정이다.
매우 드물게도 생존을 넘어, 싸움 그 자체를 즐기는 괴팍한 곰이 마른 비의 눈앞에 있었다.
‘산군이었던 푸른 눈의 새끼를 죽인 게 흉웅인가?’
마른 비는 수리의 눈 회의 때 그믐이 했던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다.
20년 이상 산군으로 군림했던 푸른 눈의 새끼를 죽이고 애뢰산을 접수한 녀석.
비단구렁이를 일격에 쳐 죽였을 때의 엄청난 기운을 감안하면, 우둔한 땅과 싸웠을 때보다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게 틀림없다.
그리고 더욱 강해지기 위해 애뢰산을 찾은 것이리라.
운남의 심장.
매 순간 치열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곳.
펄떡이는 심장이 신선한 피를 내뿜듯 만개한 자연이 농도 짙은 자연기를 흩뿌리는 곳.
자연기를 다루는 존재라면 이곳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차츰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흉웅이 여기까지 온 게 틀림없다.
더 강해지기 위해.
더 강한 존재와 싸우기 위해.
“으적, 우적.”
사냥을 마친 흉웅이 비단구렁이를 포식하기 시작했다.
습격이 성공하자마자 기를 꺼뜨려 존재감을 숨긴 채였다.
영악한 곰 녀석은 자연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한 야생의 철칙에도 충실했다.
“전면에 야생 짐승입니다! 부대주!”
“무슨 놈의 덩치가…!”
“……곰? 저거 곰이 맞아? 뭐가 저렇게 커?”
‘이런, 벌써!’
놀라운 광경에 시선을 뺏긴 사이, 적들이 따라붙었다.
마른 비가 몸을 숨긴 수풀에서 고작 20장가량 떨어진 곳에 일렬로 죽 늘어선 설검대의 신형이 어른거렸다.
“먹히고 있는 뱀도 엄청난 크기로군. 이 땅의 짐승들은 도대체가…….”
흉웅을 건너 마른 비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곳.
눈이 동그래진 5조장 부원이 흉웅의 포식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세 정신을 차린 그가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그래 봤자 곰일 뿐이다. 머뭇거릴 때가 아냐. 계속 전진한다. 꼬마를 찾아라!”
“알겠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췄던 설검대가 지체 없이 전진했다.
그리고 진형을 이루고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지만… 이해해라. 우리의 수색로에 있던 네가 운이 없었을 뿐이야.”
앞을 가로막은 곰을 반 토막 내고 추격을 재개하기 위해 설검대원이 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쒜에엑―!
애뢰산에 진입하기 전, 설검대에 합류한 설지굉은 진형을 앞질러 나와 마른 비를 수색 중이었다.
동굴에 들어갔다가 호되게 당했던 그는 눈이 벌게진 채 소년을 찾고 있었다.
파앗!
그리고 설지굉은 잠시 번뜩였다 사라진 폭발적인 기의 준동을 놓치지 않았다.
‘그놈이다!’
거친 기세는 야생 짐승에게서 느껴지는 기운과 흡사했지만, 야만인 소년은 박쥐 무리까지 움직이게 만든 전례가 있다.
또 무슨 기묘한 짓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찰나에 번뜩였던 막강한 기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이 아니라면 갑자기 이런 엄청난 기운을 뿜어낼 존재가 없지 않은가.
기를 감지한 즉시 설지굉은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렸고, 곧 멀리서 야생 짐승에게 짓쳐 드는 설검대를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저건 뭐야? 곰?’
생전 처음 보는 육중한 뱀.
그리고 그 뱀의 대가리를 으적으적 씹고 있는, 두 눈을 의심케 할 만한 크기의 곰.
급속도로 거리를 좁히며, 설지굉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덩치가 엄청날 뿐 곰에게선 딱히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진 않았다.
특이한 건 적의를 가지고 달려드는 설검대를 보면서도 미동도 없이 식사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짐승을 훑던 설지굉의 시선이 하나뿐인 곰의 눈에 닿았을 때.
그리고 푸르게 타오르는 안광을 보았을 때.
그는 전신을 타고 오르는 한기에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꼈다.
“머, 멈춰! 당장 뒤로 물러서라!”
찰나에 스친, 형언할 수 없는 위화감.
그것은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무인만이 감지할 수 있는 미묘한 감각이었다.
뱀을 물어뜯던 자세 그대로.
흉웅이 오른쪽 앞발을 들었다.
그리고 휘둘렀다.
콰우웅―
공기를 밀어젖히는 굉음이 산중을 적신다.
발톱이 긋고 지나간 대기에 시퍼런 다섯 줄기의 선이 환영처럼 떠오르고, 날파리를 쫓듯 앞발을 휘둘렀던 곰은 대수롭지 않게 식사를 계속했다.
“어?”
잠시간의 적막.
그림처럼 정지되었던 풍경이 흐르고, 횡으로 6등분된 생명체들이 영문도 모른 채 후두둑 무너져 내렸다.
푸화하학!
폭발하듯 터져 나온 핏물이 붉은 안개를 피워 올리는 광경은 일순 아름답다는 착각이 들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비단구렁이를 물어뜯는 흉웅의 반경 3장 안에서 숨을 내쉬는 생명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뭐…….”
눈을 부릅뜬 설지굉이 부들부들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히려 뒤늦게 물안개처럼 번지는 피를 목격한 설검대원들이 너도나도 고함을 질렀다.
“이, 이게 무슨 사술이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빌어먹을! 네 명이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