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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70화 (70/463)

70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3장의 간격을 유지하던 설검대원들 중 흉웅에 근접했던 네 명이 검을 꽂아 넣기 위해 다가갔을 뿐이다.

일격에 짐승의 목줄을 따고 제 위치로 돌아오리라 생각했고, 각자가 담당한 영역에 집중할 뿐 아무도 그쪽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죽여!”

동료들의 죽음에 눈이 뒤집힌 설검대원들이 흉웅에게 달려들었다.

“뭐… 뭐냐, 저게…!”

그제야 설지굉이 억눌렸던 신음을 토해내듯 끊겼던 말을 마쳤다.

‘방금 전 대기를 찢은 무지막지한 기운…! 이, 이 머저리들이 아무도 못 느꼈단 말인가!’

암천을 밝히는 전광처럼 한순간 번뜩이고 사라진 기의 점멸은 설지굉을 전율케 했다.

비늘처럼 돋아 오른 소름에 살갗이 따가울 정도다.

박쥐 무리를 상대할 때와 달리 ‘고작 금수 따위가!’ 운운하는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곰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 저건 설지굉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짐승에 대한 개념 자체를 허무는 ‘무언가’였다.

“아, 안 돼! 이런 멍청한…! 못 들었나! 뒤로 빠지란 말이다!”

이란격석.

설검대원들은 달걀이요, 흉웅은 바위다.

자신을 노리는 인간들 앞에서 태연하게 식사를 하는 괴수는 설검대원들의 무공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설지굉의 고함이 허무하게 맴도는 허공을, 흉웅의 앞발이 가르고 지나갔다.

부아악―!

“크아악!”

“아악!”

그나마 비명이라도 지르고 간 것을 위안 삼아야 할까.

토막이 난 인간의 팔다리가 비산하고, 쏟아지는 내장들이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하며 더운 김을 뿌옇게 피워 올렸다.

영산(靈山)의 푸르른 초목 위로 후두둑 뿌려지는 새빨간 핏물은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마치 끔찍한 악몽의 한 자락을 끌어다 덧씌운 것만 같았다.

“어, 어…?”

하지만 현실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사변(事變)이 느닷없이 닥쳐오면 인간은 말을 잃는다.

조각난 육편들이 어지러이 널린 지옥도 한복판에서, 사고가 마비된 설검대 전원이 우두커니 멈춰 서 있었다.

와그작, 뿌득.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다시없을 충격을 안긴 짐승은 별반 감흥이 없는 듯했다.

어느덧 절반밖에 남지 않은 비단구렁이를 태연히 다시 씹어 먹을 뿐이다.

찌이익- 질근, 우두둑.

살을 찢고 뼈를 씹는 소리가 두텁게 내려앉은 적막을 저몄다.

설검대는 참혹함을 버무린 참담함에 휩싸여 그 모습을 넋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 흉악한 거수를 둘러싸고, 최정예를 자부하던 인간들이 일시에 멈춰버린 광경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저, 저건 대체…!’

영수(靈獸)? 악수(惡獸)?

뭐든 상관없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존재를 마주하는 바람에 얼이 빠졌었지만, 어쨌든 짐승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다.

가장 먼저 흉웅의 강대함을 눈치챘던 설지굉이 누구보다 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의 두뇌가 이 난데없는 국면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저 짐승의 힘이 정확히 가늠이 되질 않아. 저것이 공격할 때 뿜어냈던 터무니없는 기운! 싸워봐야 알겠지만 혼자서는… 베어 넘길 자신이 없다.’

‘합공한다면? 힘은 엄청나더라도 덩치와 근육의 형태로 보아 빠르진 않을 거야. 짐승인 이상 정교한 방어는 불가능할 터. 설검대와 진형을 이루어 사냥한다면 못 잡을 건 없다. 하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겠지.’

‘후퇴는? 가능해. 하지만 그러면 꼬마를 놓친다. 잡아 오겠다, 큰소리 떵떵 치고 나왔거늘……. 이 먼 곳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어. 결국 이 빌어먹을 산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정을 내린 설지굉이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육성을 흘리면 저 괴물의 주의를 끌 게 틀림없다.

기를 이용한 의사의 전달.

설지굉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이고, 절묘한 내공의 조율을 거쳐 설검대 전원의 귀에 꽂혀 드는 광범위 전음이 발해졌다.

「전원, 들어라. 이미 깨달았을 것이야. 곰의 탈을 쓰고 있을 뿐 저건 우리가 아는 짐승이 아니다. 잡고자 하면 못할 것은 없지만, 괜히 맞붙어 피해를 입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꼬마를 잡아야 해. 배를 채우는 놈을 이 이상 자극하지 말고 우회한다.」

흉웅을 둘러싼 설검대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저 표정.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다.

명령에 반감을 표하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낸 놈들이 괘씸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설검대는 아직 놈의 힘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고, 난데없이 출현한 짐승에게 동료를 잃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걸 용납하지 않는 설지굉이지만, 그는 강호에서 반백년을 구른 노고수이자 수백의 설검대를 이끌어온 지휘자이기도 했다.

지금은 강압보다는 설득이 필요할 때였다.

「우리가 출정한 목표가 무엇이냐? 족장의 아들을 사로잡아 전쟁의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고, 정황과 설검대의 복수를 하기 위함이 아니더냐.」

대원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저 짐승과 드잡이를 벌이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고, 야만인 꼬마까지 놓친다면? 명심해라. 우리는 전쟁을 앞두고 있다. 아무리 늦어도 하루 안에 꼬맹이를 잡아야 시간에 맞춰 복귀할 수 있어! 전쟁이 끝나면 내 반드시 저 짐승의 목을 베어 설검각(雪劍閣) 정문에 걸어놓을 것을 약속한다.」

앞뒤 없이 제멋대로 굴 것 같은 설지굉이지만, 그는 수년 만에 점창의 장로직을 쟁취한 남자다.

이치에 맞는 언변과 상황에 부합하는 설득은 동료의 피를 보고 흥분했던 설검대에게 평정을 되찾아주었다.

또한 순식간에 침착함을 회복한 설검대 역시 점창의 정예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됐어. 곧바로 추격을 재개한다.’

잠깐의 시간을 투자해 설검대를 정비하고 목표를 상기시킨 설지굉이다.

하지만 전음을 마치고 짐승에게 눈을 돌렸을 때, 설지굉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냐? 왜 나를?’

하나뿐이라 더욱 섬뜩한 외눈이 그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야수의 샛노란 안광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비추는 햇빛을 무색케 할 만큼 번뜩였고, 그 야생의 강렬함은 설지굉조차 주눅 들게 할 만큼 위압적이었다.

마치 무슨 짓을 꾸미는 거냐고 묻는 듯한 눈빛은 설지굉으로 하여금 상황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설마… 전음을 들은 건가?!’

기의 조율과 전파를 통해 소리를 전달하는 전음을 낚아채는 건 그야말로 초절정에 다다른 고수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제아무리 상식을 뛰어넘는 괴물이라 해도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럴 리 없지. 그렇다면… 기의 파장을 감지한 거군.’

그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다.

한낱 짐승이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자신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아니, 도리어 짐승이기에 쉬울 수도 있다.

저 괴물이 인간의 내공과 같은 기운을 활용한다는 건 확실하고, 인정하기 싫지만 그 수준이 최소 자신 이상이라고 한다면, 퍼져 나간 기의 흐름을 느끼고 미세한 공기의 진동을 눈치채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짐승 특유의 예민한 감각 덕분에 훨씬 수월하겠지.

‘짐승을 상대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불과 일다경 전만 해도 얼토당토않은 일이라 치부했을 터다.

하지만 직접 보았고, 몸소 경험한 일에서 눈 돌릴 만큼 아둔하지 않다.

인정해야 한다.

저 괴수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상대해야 할 강대한 존재라는 것을.

좌우로 슬금슬금 이동하는 설검대의 움직임을 느끼며, 설지굉은 흉웅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돌아서 쫓아올 생각이야.’

마른 비는 적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설지굉이 출현한 순간부터 오직 그만을 주시하던 소년은 노인의 입술이 달싹이는 걸 보았고, 대기에 퍼진 자연기의 일렁임을 느꼈다.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적들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곧 좌우로 퍼지기 시작한 설검대를 보며 마른 비는 확신했다.

‘내버려 둬선 안 돼.’

이대로 두면 얼마 못 가서 잡히고 만다.

계속 숨어 있는 바람에 설검대와 마른 비 사이의 거리는 도약 몇 번이면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지금은 흉웅에게 이목을 빼앗겨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만, 수색에 집중한다면 금세 발각되고 말 거다.

‘승부를 걸 시점이야.’

소년은 과감하게 일어섰다.

“어엇!”

“저, 저 녀석!”

설검대원들이 불쑥 나타난 마른 비를 보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흉웅의 앞에서 좌우로 퍼지기 시작한 설검대와, 흉웅의 건너편에 있는 마른 비.

모습을 드러낸 소년은 서서히 뒷걸음질 치며 설검대를 넓게 둘러봤다.

‘긴장하지 마. 천천히…!’

흉웅과의 일체화는 불가능하다.

저런 강력한 존재의 자연기와 호흡은 감응하는 자체가 어려울 뿐더러 설령 가능하더라도 절대 시도해선 안 된다.

이성이 미비한 여타 짐승들과 달리 각성한 녀석은 의지를 지니고 있고, 사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호흡과 기운을 흉내 내는 존재가 눈앞에 있다?

마치 생김새만 다른 또 하나의 나를 보듯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사고가 가능한 존재에게 그건 외적인 희롱을 뛰어넘는, 존재 자체에 대한 도발이나 다름없다.

마른 비는 흉웅이 아닌, 자연의 지형지물이 내뿜는 기운에 스스로를 동조시킨 채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꾸웅?”

수많은 인간들의 시선이 자신의 뒤편으로 쏠리자, 흉웅도 마른 비를 돌아봤다.

초목과 같은 기운을 발산하는 인간의 새끼가 한 발 두 발 멀어지는 게 보인다.

인간이 왜 저런 기운을 지녔는지 모르겠지만 싫지는 않은 느낌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건방지게 덤벼들었던 인간 무리의 기운이 펄펄 들끓고 있었다.

“자, 장로님!”

상황이 애매하다.

소년을 잡으려면 짐승을 넘어서야 하는데, 그러면 명령을 뒤집고 전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우회해서 잡으려 해도 급히 달려 나가야 하며, 그 또한 매우 높은 확률로 괴수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설검대는 설지굉에게 결정을 요구했다.

“저놈이…!”

설지굉도 당연히 마른 비를 봤다.

수풀 속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미소를 띤 채 설검대를 쭈욱 훑는 걸 똑똑히 봤다.

노골적인 도발이다.

그리고 놈은 설검대를 자극해 짐승과 부딪히도록 유도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왜 날 쳐다보고 있나! 명령대로 우회해서…!”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던 설지굉.

그의 이성을 끊는 한 방이 날아왔다.

설검대를 넓게 둘러본 마른 비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설지굉에게 와 닿았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었다.

고작 그 정도냐는 듯이.

그건 마치 설지굉에게 ‘너희 정도론 나를 잡을 수 없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저… 애새끼가!”

마른 비 때문에 박쥐 떼에게 곤욕을 치렀던 설지굉이다.

만만하게 봤던 야만족 소년은 무더운 운남의 날씨 속에서 몇 날 며칠을 내달리게 만들었고, 절반밖에 남지 않은 설검대의 숫자를 더 줄여 놨다.

저놈 때문에 괴수와 조우했고, 또다시 대원들을 잃었으며, 급기야 자신은 짐승을 피해 우회한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치욕적이다.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한데 웃어?!’

설지굉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저 새끼! 잡아!”

짐승을 무시하고 달린다.

제아무리 빨라 봤자 곰이고,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는 무인들을 쫓아올 순 없으리라.

설검대원 몇몇이 희생되더라도 무시하고 돌파하여 소년을 잡는다.

화가 폭발했다지만, 엄연히 타당한 판단에 기반을 둔 결정이었다.

‘내가 잡는다!’

자연지형에서 설검대가 꼬마를 쫓기 힘들다는 건 이미 입증되었다.

눈앞에서 마주한 이상 끌 것 없이 최고의 속도로 쫓아가 사지를 잘라 주리라.

단전에 웅크리고 있던 내공을 격발시켜 전신에 퍼뜨린다.

전력을 아낌없이 개방한 설지굉의 육신에 일 갑자에 육박하는 막대한 내기가 깃들었다.

‘걸렸어!’

노린 바다.

적들 하나하나가 위험하지만, 저 노인 하나만 못하다.

저자만 없다면 어떻게든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마른 비의 노림수는 제대로 먹혔고, 이제 결과를 확인할 일만 남았다.

‘제발!’

소년의 눈이 흉웅을 향했을 때.

야수는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일어나 쩌렁쩌렁한 포효를 산중에 터뜨리고 있었다.

“크워어어어엉!”

거수의 그림자가 설지굉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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