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부아아악!
“흐읍…!”
공기를 찢어발기는 굉음이 설지굉의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갔다.
흉웅의 발톱에 맺힌 자연기의 잔흔이 허공에 시퍼런 다섯 줄기 궤적을 남기고, 뒤따르는 풍압은 회피에 성공한 설지굉의 몸을 뒤흔들었다.
설지굉의 작달막한 신장의 네 배는 될 법한 높이에서 샛노란 외눈이 번쩍였다.
왼쪽 앞발이 빗나갔다?
그럼 이번엔 오른쪽 차례다.
성문을 깨부수는 공성추와 같은 앞발이 설지굉을 분쇄하기 위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큭…!”
흉웅의 사정거리에서 간신히 몸을 빼낸 설지굉이 놀란 가슴을 달랬다.
‘가, 갑자기 왜 나를…?!’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머리 위에서 내리꽂힌 야수의 앞발이 만들어낸 흔적이다.
자연기가 응집된 흉웅의 맹격은 지형을 갈아엎고도 남을 만한 힘을 머금고 있었다.
그 경이적인 위력 앞에서, 우회하려던 설검대가 얼어붙듯 멈춰 섰다.
“너, 너…! 네놈이 이 괴물을 부리는 것이냐?!”
설지굉이 흉웅에 가려져 겨우 얼굴만 보이는 마른 비에게 냅다 소리 질렀다.
‘아하! 그렇게 보인 건가.’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리던 마른 비가 속으로 웃었다.
듣고 보니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다.
지난 며칠간, 박쥐 떼부터 시작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마다 야생 짐승들을 움직여 위기를 모면해왔다.
노인의 입장에서는 콕 찍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흉웅이 야수 제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오인할 만했다.
인간이건 짐승이건 간에 강자라고 여겨지는 상대를 만나면 무조건 덤벼드는 흉웅의 습성을 적들이 알 리 없었다.
마른 비 자신도 우둔한 땅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테니까.
설지굉의 진면목을 드러내게 하여 흉웅을 달려들게 만든다는 계책이 기가 막히게 먹혔다.
‘굳이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으며 마른 비도 점점 영악해지고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 생각하게 놔두는 편이 좋다.
그리고 이참에 한 번의 도발을 더 던져준다.
뒤돌아서 내빼기 전, 너무나 싱그러워서 그만큼 약이 오르는 미소가 소년의 얼굴에 그어졌다.
“마음대로 안 되지? 힘내!”
충분히 거리를 벌린 마른 비가 여유 있게 돌아서서 애뢰산의 깊은 산중으로 사라져 갔다.
“쳐 죽일 애새끼가! 놓칠 것 같으냐!”
원래 계획대로 무시하고 달린다.
눈앞을 가로막은 짐승의 벽은 높고도 두텁지만 우회하면 그뿐.
타고 남은 재가 미처 흩날리기도 전에 그 위를 밟아 넘는다는 설지굉의 독문 보법.
답회보(踏灰步)가 발동되자 무수한 발그림자가 지면을 수놓았다.
스스스스―
멀미가 일 정도로 어지러운 움직임에 흉웅의 외눈이 혼란으로 물들고, 빠져나갈 틈을 포착한 설지굉의 발끝이 지면을 거세게 튕겼다.
파앗-!
마치 와족의 번갯불을 떠올리게 하는 단거리 고속 이동이다.
눈 깜빡할 사이에 설지굉은 괴수의 측면을 파고들었고, 파고듦과 동시에 빈틈을 비집었다.
순식간에 흉웅을 뒤로 제친 설지굉이 달려 나갈 준비를 하며 고함을 터뜨렸다.
“짐승은 무시하고 좌우로 산개하여 꼬마를 쫓는다!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라! 짐승은 따라오지 못할 것이…!”
“자, 장로님! 뒤를!”
후우웅―
시커멓게 드리워진 그것은 운남의 하늘을 뒤덮는 흑운과 같았다.
깊게 수그린 다리가 몸체를 밀어내고, 거목 줄기 몇 개를 이어붙인 듯한 몸통이 하늘로 치솟는다.
창공을 지배하는 어둔 날개의 강습처럼.
사선으로 뛰어오른 야수가 자신을 무시하고 내달리려는 인간의 배후를 급습한다.
갑작스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본 설지굉이 두 눈을 부릅떴다.
‘우라질…! 도약을 한다고?! 곰이?’
상황을 파악한 건 한순간이다.
설지굉은 경공을 멈춤과 동시에 일 갑자의 내공을 검 한 자루에 몽땅 밀어 넣었다.
화르륵―!
절정의 문턱을 넘은 검사들이 운용하는 검강(劍罡)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검기의 끝자락에 다다른 내기 발출의 정화다.
60년간 정제한 내공을 응축시켜 외부로 뽑아낸 검기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잿빛 염화와 같았다.
“카아아압!”
설지굉.
과연 점창의 대장로를 노릴 만한 남자다.
육중한 무게에 도약 후의 낙하 속도, 자연기까지 더해진 일격이건만.
흉웅의 앞발은 부수지 못할 게 없는 거신의 철퇴와 같았으나, 혼신을 다한 설지굉의 방어는 괴수가 휘두른 야생의 일격을 무마시켰다.
끼이이이익!
새하얗게 튀어나온 다섯 줄기 발톱이 대기를 수직으로 긁어내린다.
하지만 육십 평생의 깨달음을 담아낸 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쇠붙이로 철판을 긁는 기음이 울려 퍼지고, 괴수의 앞발이 애뢰산의 발등을 찍었다.
푸콰카쾅!
“꾸엉?”
‘감히 막아?’라는 의미를 담은 게 분명한 울음을 배경으로, 설지굉이 후방으로 던져지듯 날아갔다.
뻐어억!
“커어어억…!”
수직으로 토막 나는 건 면했지만, 엄습하는 무게까지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중기병(重騎兵)의 돌격을 맨몸으로 받아낸 보병처럼, 흉웅의 앞발에 튕겨져 날아간 설지굉은 거목에 등을 부딪치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커… 허…….”
울컥 치솟는 핏물이 입술을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진탕된 내장이 내부를 흔들고, 웅웅거리는 소음이 귓가에 맴돈다.
치명타는 아니지만, 한동안 운신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
의표를 찌른 짐승의 일격은 설지굉의 발을 묶어놓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빌어… 먹을! 무슨 놈의 짐승이 이런…!’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쫓아오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그걸 알고 속도가 붙기 전에 끊어낸 거다.
힘도 힘이지만, 순간적인 판단력과 상대의 의도를 읽는 통찰력까지.
상황을 곱씹을수록 눈앞에 있는 짐승은 지능을 갖춘 게 확실해보였다.
“꾸어엉-! 꾸- 꾸웅, 꿍!”
뜻대로 흐른 결과에 만족하기라도 한 걸까.
설지굉을 위아래로 훑는 흉웅의 외눈에는 흡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흉악한 이빨 사이로 침을 질질 흘리는 녀석은 다 잡은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사냥꾼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 웬만하면 부딪치지 않으려 했건만…… 갈아 마셔도 모자랄 금수 새끼가 감히 그따위 눈으로 날 쳐다봐?!’
지휘자로서의 판단과 마른 비를 잡아야 한다는 목표가 본래의 성정을 누르고 있었지만, 그 성격이 어디 갈 리 없다.
일격을 얻어맞은 데다 흉웅의 눈초리에 울화가 폭발한 설지굉은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지금 상태론 경공을 펼치기 힘들다. 그리고 저 곰은 끝까지 날 쫓아올 거야. 여기서 자르고 간다.’
설지굉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부원을 돌아봤다.
“부원! 가장 빠른 인원 삼십을 추려서 꼬마를 쫓아라! 잡지 못해도 된다! 끝까지 따라붙기만 해!”
“예? 장로님께선?”
몸을 일으키고, 흉웅에게 검을 겨눈 설지굉의 회색 눈이 이글거렸다.
“나는 설검대 백오십 명과 함께 짐승 사냥을 한다.”
* * *
대리와 남화를 잇는 너른 평야.
저 멀리 웅장하게 펼친 밀림 너머로 하루의 일과를 마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인간과 짐승으로 구성된 수백의 무리가 평야를 내달리고 있었다.
포근히 내려앉는 석양의 손길은 지친 인간들을 위로하는 아버지 하늘의 은총과 같다.
많은 이들을 잃었고, 떠나보내고 있으며, 작별하게 될 터다.
어머니 대지에 스며든 인간들의 넋을 기리듯, 석양은 그렇게 어제와 변함없는 모습으로 만물을 쓰다듬고 있었다.
‘안타깝구나.’
초인이라 불릴 만한 힘을 지녔고, 수백의 식솔을 책임지는 수장이지만, 너른 하늘 역시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그 역시 때때로 인간다운 감상에 젖어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세의 격류에 휘말려 여기까지 왔고, 결국 피로 물든 대지의 한복판에 선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거라는 예정된 귀결은, 아무리 각오를 다졌다지만 서글픈 일이었다.
사정을 안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마땅한 당위에 입각한 진격이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과 인간이기에 문득문득 치밀어 오르는 복잡한 감정들이 그의 가슴을 아련히 적셨다.
어린 시절, 그믐에게 들었던 한족들의 역사를 기억한다.
수많은 영웅들의 일대기와 찬란한 문명을 뽐낸 국가들의 명멸을.
운남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대규모 전쟁들 또한.
수천, 수만의 인간들이 어우러지며 그려낸 광기와 혼돈의 시절은 영웅이라 불리는 인간들을 잉태했다.
어찌 가슴이 뛰지 않을까.
눈앞을 가로막은 적들과 무수한 시련을 극복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자들.
막강한 힘을 얻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가슴을 채울수록 웅대한 포부가 그의 심장을 데웠다.
뛰쳐나가고 싶었다.
저 넓은 세상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유구한 인간 역사의 한 장에.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영원불멸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랬다면 더 행복했을까?’
누구도 모를 일이다.
부족의 울타리이자 운남 소수부족들의 수호자로 사십 평생을 살아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 동안 값진 순간들을 경험했고 행복한 기억들을 남겼다.
운남을 넘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충만한 시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는 어린 시절부터 차기 족장으로 확실시됐고, 그가 족장의 자리에 오르는 건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나이가 찰수록 운남을 넘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해졌지만, 그는 책임에서 눈 돌릴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족장의 자리를 받아들이고, 부족을 이끌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지켜왔다.
너무나 뛰어나기에, 그 걸출함으로 말미암아 요구되는 책임들을 흔쾌히 짊어졌다.
아니, 기꺼운 척 받아들였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리란 점에 한 치의 의심도 할 수 없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건대 아쉬움이 남는다.
‘전쟁이 끝나고 차기 족장이 결정되면… 할아범을 따라 중원에 나가볼까.’
그믐 또한 그랬을 터다.
공동체에 매여 있기에 요구되는 책임과 저버리기 힘든 개인의 바람.
출중한 만큼 전자는 더욱 무거워지고, 후자는 보다 강렬해진다.
너른 하늘과 그믐은 둘 다 너무나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그로 인해 부과되는 책임과 기대에서 눈 돌릴 수 있는 남자들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자신을 키워준 부족을 등질 수 없었다.
그로 인해 행복했지만, 그로 인해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는 포부나 꿈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고, 보지 못한 세상에 발 딛고 싶다는 호기심이지만, 운남 땅을 넘고 싶다는 욕구는 여전히 너른 하늘의 가슴에 뚜렷이 맴돌고 있었다.
부족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그믐이 중원을 왕래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뿐이다.
‘아, 할아범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군.’
어둔 날개를 길들이기 전, ‘성난 그믐’으로 불리었던 남자가 유해지게 된 계기.
성년식을 통과하고, ‘그믐올빼미’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불같은 성정과 잔인한 손속으로 와족과 맞선 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그가 부드럽게 변한 원인.
매서운 눈이 가끔 추억하는 어린 시절의 친구를, 너른 하늘도 오랜만에 떠올릴 수 있었다.
‘전쟁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가. 유독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날이구나.’
그는 이제 안다.
어린 시절 꿈꾸었던 영웅들이란 예외 없이 피로 쌓아 올린 금자탑 위에 웅크린 자들이라는 것을.
그들이 한 줄의 이름을 남기기까지 그들을 위해 스러져간 자들과, 만인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 밟고 올랐던 수많은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너른 하늘은 더 이상 영웅을 꿈꾸지 않는다.
이 전쟁 역시 영웅이 되고자 하는 누군가의 욕망의 발로임을 절절히 알기 때문에, 한없이 안타깝고 서글플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스러지고 있을 생명들이 너무나 아팠다.
역설적이게도.
영웅이 되고자 하는 생각 따윈 전혀 없는 지금.
누구보다 전쟁을 원치 않으면서 모두를 위해 전장에 나섰기에 그는 영웅이었다.
또한 매 순간 회의하고 안타까워하는 한 명의 범인(凡人)이기도 했다.
주홍빛으로 물든 평야.
대리를 향해 진격하며, 너른 하늘은 저무는 석양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허억, 헉! 조, 족장님―!”
숨이 턱까지 차오른 외침이 너른 하늘의 상념을 깼다.
평원을 가로지르는 와족의 선두를 향해 한 남자가 휘청대며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