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곳곳이 긁히고 찢겨 있지만, 복식으로 보아 흰 수리 전사가 틀림없다.
말라붙은 피딱지들이 고름과 함께 신체 곳곳에 엉겨 붙은 모습은 한 눈에 보기에도 처참했다.
하지만 자잘한 검상보다 더욱 심각한 부상은 팔꿈치 아래로 잘려나간 오른팔이었다.
“잠시 대기하라!”
전사들을 멈춰 세운 너른 하늘이 아수라장을 헤치고 이곳까지 달려왔을 그에게 다가갔다.
“부상이 위중하다. 일단 편히 쉬어라.”
급박한 소식을 들고 왔겠지만, 묻지 않는다.
우선 너의 몸부터 챙기라며 부축할 뿐이다.
이십 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전사.
오른팔을 잃은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염려와 안타까움이 진하게 배인 눈이 숨을 몰아쉬는 청년 전사를 위로했다.
“감사… 합니다.”
그제야 울컥하는 감정과 함께 진한 상실감이 몰려온다.
사선을 넘으며 부상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잃은 팔에 대한 씁쓸함이 뒤늦게 휘몰아쳤다.
하지만 심란해할 때가 아니다.
족장이 자신을 염려했듯 자신 또한 여물지 않은 아이들을 걱정하는 마음 하나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튕기듯 몸을 세운 그가 다급히 외쳤다.
“제 부상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족장님! 아이들이…! 성년식 중인 아이들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뭐라고?!”
비명이 튀어나온 건 너른 하늘의 뒤였다.
황급히 다가오는 매서운 눈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오른팔을 잃은 청년 전사를 시작으로.
운남 전역에 배치한 흰 수리들이 속속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맹수를 막고, 적들과 싸울 인원이 모자랄지라도 적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원래는 노련한 검은 수리들이 책임지던 정찰 및 보고 임무는 흰 수리들에게 위임되었고, 성년식 중인 아이들을 담당하는 20명을 제외한 모든 검은 수리는 문산으로 집결했다.
그 20명도 아이들을 숨기는 즉시 합류하라 했건만.
몇몇을 제외하곤 오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거였군. 아이들을 담당한 검은 수리들의 합류가 늦어지고 있던 게.”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얼굴로 그믐이 말했다.
와족의 수뇌부는 크게 놀라 창산으로의 진격을 멈추고 각지에서 달려온 전사들의 보고를 종합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한둘이 아니야. 파악된 것만 해도 최소 30명이 넘는 아이들이 습격을 받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지도 여기저기에 목탄으로 점을 찍던 그믐이 미간을 찌푸렸다.
“싸울 줄도 모르는, 이제 고작 열 대여섯밖에 안 된 아이들을…! 이놈들은 최소한의 도리도 모른단 말이오?!”
매서운 눈이 격분하여 소리쳤다.
“운남의 부족들과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한족들은 전쟁을 벌이면 상대의 씨를 말리는 경우가 허다해. 놈들은 후환을 남기지 않는다. 나도 그들의 땅을 한참이나 오고 간 후에 알게 된 사실이야.”
그믐이 침중한 어조로 대꾸했다.
“좀 더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아이들이 있는 지역을 상세하게 알 수는 없나?”
너른 하늘이 회의에 참여한 흰 수리 전사를 돌아봤다.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족장님. 아시다시피 성년식 중인 아이들은 정해진 바 없이 본인의 의지대로 운남을 떠도는 터라……. 즉흥적으로 발길 닿는 대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동선을 예측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정확한 피해 상황을 파악하기도 힘들겠군.”
“네. 아이들을 살피던 검은 수리들이 마침 습격의 현장에 있어서 저지한 경우도 있지만, 전사 한 명당 두세 명씩을 맡고 있지 않습니까. 달려가 보니 이미 살해된 경우도 있어서……. 그 경우에는 파악이라도 되지만, 검은 수리들조차 상당수가 연락 두절 상태입니다. 단순히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쁜 것일 수도 있지만, 최악의 경우는 그들까지도…….”
“전쟁을 시작하면서 깊은 곳에 아이들을 숨기라 일렀지 않느냐? 그런데도 발각이 되었다고?”
“네, 할아범. 아마도 아이들이 마을을 나서고 얼마 안 된 시점부터 따라붙은 듯합니다. 성년식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요. 놈들의 사절단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감지하지 못할 거리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미이리이…!”
어지간해선 조용히 듣기만 하는 우둔한 땅조차 신음을 내뱉었다.
“내 불찰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노약자들을 마을에서 피신시키는 정도면 충분할 줄 알았어. 설마 성년식을 떠난 아이들까지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내가 놈들의 집요함을 가벼이 봤구나.”
말을 잇는 그믐의 표정은 더없이 무거웠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족장님?”
유구한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최우선의 행동 원칙.
언제 어디서건, 어떤 상황에 처했건 간에 사람이 우선이다.
부족의 미래나 다름없는 아이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이며, 적들의 본거지가 코앞이다.
하필 이 시점에 습격이 시작됐다는 점도 미심쩍다.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 너른 하늘의 뇌리를 맴돌았다.
필시 인원을 쪼개려는 분산책이 틀림없으리라.
새끼들을 납치해 야수들로 하여금 소수부족들을 공격하게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때도 와족은 창산을 들이치기보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걸 우선했다.
하지만 그것이 간접적인 유인이었다면, 이번엔 와족의 미래를 전초제근(剪草除根)하려는 직접적인 위협이다.
적기마다 사건이 터지는 걸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겨울 달을 통해 사람을 우선시하는 와족의 행동 원리를 전해들은 게 틀림없었다.
‘정말 치밀하게도 준비했구나.’
점창의 입장에서는 와족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전사들을 쪼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가뜩이나 소수인데 더욱 줄어든 본대와 운남 전역으로 퍼져나간 구출대.
잡아먹기 안성맞춤인 먹잇감이다.
상식적인 판단으론 구출대를 보내지 않는 게 맞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 좋다.
죽어가는 아이들로 인해 전사들은 심적 동요가 올 것이고, 그건 크든 작든 곧 있을 전투에 악영향을 미칠 테니까.
2인 1조로 파견된 응목대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어린 소년 소녀들을 척살할 것이고, 그것으로 와족의 미래는 절단난다.
공지량이 지석인에게 한 달이란 시간을 언급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와족 본대가 대리 인근에 접근했을 때 기습을 시작하는 것이 와족이 어떤 선택을 하건 점창이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가장 절묘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들이 끝까지 비열하구나!”
화를 주체하지 못한 매서운 눈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세상천지에 전쟁의 승기를 가져가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핍박하는 전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점창은 한족의 수많은 무력 단체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집단이라고 하지 않았나.
정파니 사파니 하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바른길을 추구하는 자들이라 들었다.
‘한데 이따위 짓거리를…!’
치솟는 울화에 머리끝까지 새빨개진 매서운 눈이 입술을 떨며 너른 하늘을 돌아봤다.
“족장님……. 결단을.”
상황은 명료하다.
이대로 진격한다면 피지도 못한 아이들의 죽음을 방치하는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인원을 분산한다면 적들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꼴이고, 그 결과 전쟁에서 패한다면 더 많은 인원이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짊어지리라.’
어쩔 수 없다는 말.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소중한 것에서 눈 돌린다는 것.
끔찍할 정도로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삶은 선택을 강요한다.
‘따라붙은 검은 수리들을, 그리고 아이들을 믿는다는 말. 그건 비겁한 자기 위로이자 기만일 뿐. 난… 아이들을 버리는 것이다.’
짊어진다.
직시하며, 변명하지 않는다.
대신 반드시 이긴다.
석양을 보며 잠시나마 느꼈던 인간적인 감상과 안타까움마저 버린다.
적들의 피를 갈구하는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오직 살육 그 하나만을 위해 날뛰리라.
‘비아야… 미안하구나. 부디 무사해다오.’
꾹 눌러 감은 눈이 천천히 뜨였다.
범의 그것을 닮은 호안이 북서쪽에 위치한 창산을 향했다.
“전원……. 진격한다.”
들끓는 기세가 평원을 달구고, 이백에 달하는 인간과 그만큼의 야수가 짐승의 포효를 떨쳐 울리며 대지를 박찼다.
* * *
“이게… 산이 맞는 거야?”
애뢰산의 초입을 넘어 본격적으로 산중에 들어선 마른 비다.
제멋대로 자라며 눕고 기울어진 나무들은 짐작조차 어려운 세월 동안 그 자신이 산의 거름이자 양분이 되었다.
어딜 가든 거목이라 불릴 만한 나무들이 첩첩이 겹쳐 서로에게 기댄 채 썩어가고 있었다.
빽빽한 숲은 하늘을 완전히 차단하여 빛 한 점 들지 않는다.
길도 없다.
덩굴 식물이 뒤엉키듯 거대한 나무들이 얽히고설켜, 그 틈새로 겨우 몸을 빼내며 이동할 수 있을 뿐이다.
운남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지형이었다.
‘가야 해.’
어찌 됐든 가야 한다.
흉웅이 적들의 발목을 제대로 붙잡았는지, 뒤따르는 기척은 수십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싸울 수 없다.
아니, 싸우기는커녕 지금 몸 상태론 서넛에게만 둘러싸여도 끝장이다.
무조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른 비는 복잡하게 덧대어진 나무들의 틈새로 요리조리 몸을 빼내며 전진했다.
“윽.”
나무를 짚고 건너는데 손이 미끄러진다.
이끼? 물기에 젖은, 썩은 나무 껍데기?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축축하고 끈적이는, 불쾌한 감촉의 무언가가 짚는 곳마다 묻어나며 손과 발을 미끄러뜨렸다.
질주하지 못하는 이상 거리는 좁혀질 수밖에 없다.
적들의 기척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뭐야, 여긴?”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친근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
적들의 지휘자로 추정되는 남자의 음성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저 앞에 있다! 머뭇거리지 마라! 바로 진입해!”
두터운 나무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어 검기를 날려도 맞을 리 없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부원이 알 수 없는 지형으로 추격대를 이끌었다.
“흡!”
정신없이 전진하던 마른 비가 우뚝 멈춰 섰다.
‘뭐지?’
공기의 냄새가 이상하다.
비릿하면서도 알싸한 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솜털이 곤두섰다.
피부는 아플 만큼 따끔거렸다.
‘이건 분명…!’
독이다.
지천에 깔린, 썩어가는 나무와 식물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음지.
음습하고 축축한 환경은 독물들에게 있어 천혜의 서식지나 다름없었다.
‘그 험난한 대자연에는 치명적인 독물들이 똬리 틀고, 사나운 맹수들이 먹잇감을 찾아 배회하지.’
마른 비가 애뢰산에 대한 그믐의 언급을 떠올리는 찰나,
콰악!
따끔한 통증과 함께 뾰족한 무언가가 팔뚝을 파고들었다.
“윽! 뭐야?”
검은색의 기다란 몸통과 좌우로 난 수십 개의 다리.
투구를 쓴 듯 각지고 단단해 보이는 머리 위로 붉은색 더듬이 한 쌍이 흉측하게 꿈틀댄다.
“시이익―!”
저걸 이빨이라고 불러야 할까?
실상은 다리 중의 하나였던 것이 환경에 적응하며 독아(毒牙)로 변한 것이다.
양옆으로 곡선을 그리며 둥그렇게 뻗어 나온 독니 끝에서 진녹색 독액이 뚝뚝 방울져 흘렀다.
“언제 이렇게 접근을?”
도주를 위해 정신없이 지형을 파고드느라 다가온 녀석을 감지하지 못했다.
비스듬히 누운 썩은 나무줄기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녀석.
중원에선 오공(蜈蚣)이라 불리는 대왕 지네가 흉측한 몸통을 비틀었다.
‘벌써 독을 주입한 건가.’
초입에서 마주한 동물들이 그랬듯 대왕 지네 또한 애뢰산에 서식하는 놈답게 범상치 않았다.
마른 비의 신장 절반에 이르는 기다란 몸통.
좌우로는 수십 개의 샛노란 다리들이 징그럽게 꿈틀댄다.
그 심상찮은 크기만큼이나 강력한 맹독이 마른 비의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상당히 독한데?’
혈류를 따라 휘도는 독액이 온몸을 뻐근하게 울린다.
물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사지 끝까지 퍼진 맹독이 육신을 잠식하기 위해 길길이 날뛰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