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73화 (73/463)

73화

‘그래도 청죽사의 독보다는 약해.’

구향동굴(九鄕洞窟)의 사람거미나 곡정(曲靖)의 쌍두사(雙頭蛇)처럼 특별한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와족 특유의 내독성이 발현되어 청죽사의 독주머니마저 통째로 씹어 먹던 마른 비다.

대왕 지네의 독은 무척이나 강력한 편이었지만, 독에 대한 강고한 저항력이 뿌리내린 소년에게는 별다른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이 정도의 독성이라면 마른 비에게는 독에 대한 내성을 단련시켜주는 촉매로 작용할 뿐이다.

한 차례의 뻐근함이 가시자, 소년은 금세 본래의 몸 상태를 회복했다.

마른 비가 주춤거리는 대왕 지네를 흘겨봤다.

‘이걸 죽여? 살려?’

녀석은 자신하는 맹독이 먹히지 않자 한 쌍의 독니를 딱딱 부딪치며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자연기를 둘러치지 않았다고 해도 와족의 강피를 뚫고 들어올 정도의 치악력(齒握力)과 단단한 외피를 지닌 녀석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물리적인 힘은 맹수들에 비할 수 없다.

죽이고자 한다면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살려두는 게 낫겠어.’

최대 무기인 독이 통하지 않는 이상 자신에겐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뒤따르는 추격자들에게는 다를 거다.

마른 비는 움츠러든 대왕 지네를 놔두고 길을 재촉했다.

“크윽!”

마른 비가 그랬듯 기이한 지형의 틈새를 파고드는 데 정신이 팔린 설검대도 대왕 지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조심해!”

팔뚝을 물리고 주저앉은 동료를 구해야 한다.

번개처럼 터져나간 점창식 발검이 대왕 지네를 베었다.

아니, 베어내려 했다.

따앙-!

“아니?!”

갑옷을 씌워놓은 것 같은 외피가 검을 튕겨낸다.

샛노란 다리 수십 개가 물결치듯 출렁이더니 독액을 주입한 설검대원을 거칠게 붙잡았다.

콰악!

그래, 이래야지.

이 인간에게는 독이 통한다.

앞서 지나간 인간의 새끼가 별종인 거였다.

대왕 지네는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흘려내는 검사의 목덜미에 다시 한번 독니를 쑤셔 박았다.

그리고 안전한 식사를 위해 먹이를 운반하기 시작했다.

“감히!”

절지동물(節肢動物)로 분류되지만, 범인들의 인식 속에 지네란 결국 벌레의 한 종류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동료들이 짐승에게 당한 것도 참기 힘든데 하다 하다 이제는 벌레 따위가?

분노한 부원의 검에서 백색의 검기가 치솟고, 혐오스럽게 꿈틀대는 대왕 지네의 몸통을 갈랐다.

촤아악!

“시아악―!”

일검에 양단된 지네가 녹색 체액을 흩뿌리며 몸부림쳤다.

풀썩.

독이 침투한 것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설검대원이다.

어찌나 독성이 빠르고 강한지 내공으로 밀어낼 틈도 없이 주저앉았고, 독니가 목덜미를 꿰뚫는 바람에 그대로 절명해 버렸다.

“안 돼…….”

불규칙하게 덧대어진 나무들이 썩어가며, 짙게 내려앉은 어둠과 함께 비릿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숲.

운남의 소수부족들이 독림(毒林)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애뢰산 독물들의 집단 서식지에서, 망연자실한 설검대가 숨이 끊긴 동료를 내려다봤다.

“…….”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효시와 붉은빛 연무를 보고 창산에서 출동할 때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었다.

하지만 잡아야 할 대상이 십 대 중반의 꼬마란 걸 알았을 때는 헛웃음까지 흘렸었다.

허나 지금의 상황을 보라.

한 토막의 쪽잠도 자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달렸지만, 아직도 꼬마를 잡지 못했다.

봉검과 운검의 뒤를 이어 대장로의 직위를 노리는 설검 장로까지 함께 움직였는데도 말이다.

‘차라리 압도적인 무공에 패한 것이라면.’

그랬으면 억울하지나 않았겠지.

한낱 짐승들이 길을 막아서고 훼방을 놓을 거라고 짐작이나 했던가.

동물들에게 우왕좌왕하는 틈을 노린 기습과 산의 초입에서 조우한 괴수 때문에 벌써 스무 명 가까운 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흉측한 벌레에게까지.

‘이건… 무인의 싸움이 아니야.’

그래서 더 속이 터지고 허망한 것이다.

임무에 투입된 이상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지만, 그건 전장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무인이 검을 맞대고 실력이 모자라서 죽은 거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평생토록 갈고닦은 검을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이런 오지에서 벌레에게 물려 죽다니?

처음 며칠간은 울분이 몸을 이끌었지만, 이제는 화를 낼 기력조차 없었다.

너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멍해질 따름이다.

‘사기가 엉망이구나.’

지휘자인 자신이 이럴진대 조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랜 경험과 훈련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을 뿐.

얼굴에 감정을 떠올리진 않지만, 눈빛에선 하나같이 피폐함이 묻어났다.

“계속… 추격한다…….”

그들에게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하지만 야만인 소년을 자신들의 손으로 잡겠다는 각오는 연기처럼 흩어진 지 오래였다.

설지굉이 올 때까지 소년의 뒤를 쫓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설검대는 얼굴이 시커멓게 변색된 동료의 눈도 감겨주지 못했다.

말을 잃은 그들이 독림으로 깊게, 깊게 잠겨 들었다.

“카아아악!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꼬맹이! 반드시 찢어 죽인다!”

말끔하게 빗어 넘겼던 백발이 엉망으로 풀어헤쳐져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짐승의 발톱 자국을 따라 길게 찢어진 상의는 너덜너덜해져 맨몸으로 있는 게 더 단정할 지경이다.

살갗이 긁히는 정도로 끝난 게 천운이었다.

하마터면 저승 문턱을 넘을 뻔했으니까.

피로 물든 옷을 부욱 찢어 땅에 내던진 설지굉이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독림에 당도했다.

‘칠십 명이 죽다니!’

백오십의 설검대를 이끌고 흉웅에게 검을 겨눌 때만 해도 설지굉은 일방적인 사냥을 자신했다.

짐승의 사방을 빼곡히 에워싸고 발동한 점창수운진(點蒼囚雲陣)은 강대한 한 명의 적을 상정한 대인합격진이다.

봉우리를 깨뜨린다는 의미의 점창파봉진(點蒼破峰陣)이 대단위 적과의 전면전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진형이라면, 수운진은 구름을 가둔다는 뜻처럼 아군 개개인의 역량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강자를 격살하기 위한 진형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각각 봉검가와 운검가에서 창안한 합격진은 수십 년 동안 점창을 대표하는 검진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설지굉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수없는 시행착오와 경험, 정교한 계산 끝에 까마득한 시간을 녹여내야 겨우 완성할까 말까 한 진식(陣式)을 스스로 창안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차용했고, 파봉진과 수운진은 그가 자존심을 굽히고 수용할 만큼 뛰어난 검진이었다.

한데 무너졌다.

시대를 논하는 불세출의 고수도 아닌 일개 짐승 따위에게.

속도나 정교함은 인간의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그 힘!

두 발로 지면을 버티고 서서 휘두르는 앞발은 문자 그대로 개세(蓋世)의 위력을 담고 있었다.

‘쿠워어어엉!’

숲을 울리는 포효와 함께 엄습하는 야수는 항거불능의 재해와 같았다.

검진을 통해 배가시킨 설검대의 기운은 그 앞에서 종잇장처럼 갈가리 찢겼다.

허공에 푸른 발톱이 그어질 때마다 설검대는 추락하는 하루살이처럼 차가운 땅에 우수수 몸을 누였다.

괴수의 발톱 아래 수운진이 깨진 건 맞지만, 수운진이 아니었다면 놈을 물리칠 수 없었을 거다.

씨줄과 날줄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검진은 괴수가 달려들 때마다 착실하게 검을 꽂아 넣었다.

자그마치 오십 자루의 검을 등판에 꽂고서도 지칠 줄 모르고 날뛰던 녀석은 수운진의 기운을 그러모은 설지굉의 일격을 받고서야 피를 철철 흘리며 도망갔다.

그렇다.

도망이다.

양쪽 앞발로 동시에 긁어내린 상하좌우의 쌍격.

열십자(十) 형태로 발산된 시퍼런 기운은 검진 전체의 힘을 모은 설지굉의 일격을 정면에서 받아냈을 뿐만 아니라 진형을 붕괴시켰다.

무인이 회심의 기술을 꽂아 넣듯 녀석은 그 한 방을 준비했고, 검진 전체의 힘을 집중한 설지굉의 검격을 상쇄하는 걸 넘어 그의 육신에도 상처를 남겼다.

승리했지만,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허나 결국 잡지 못했다.

인간의 팔다리가 쓰레기처럼 굴러다니고 육편이 낙엽처럼 쏟아지는 끔찍한 광경 앞에서, 참담함에 사로잡힌 설검대 누구도 도망치는 흉웅의 뒤를 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눈!’

설지굉은 보았다.

도망치던 녀석의 외눈에서 번들거리던 새파란 분노를.

장담할 수 있다.

그 괴물은 몸을 회복하는 즉시 온다.

그리고 다시 맞닥뜨리게 되면 그때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 전에 망할 꼬맹이를 잡아야 해!’

이 모든 상황을 야기한 야만족 소년.

인질로 쓰겠다는 기존의 계획 따위 머리에서 날아간 지 오래였다.

놈을 잡는다.

그리고 죽인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처참하고 잔인하게.

수림이 난마처럼 얽히고설켜 대형 맹수들이 서식하기 어려운 곳.

지독한 독물들 때문에 맹수들조차 들어서길 꺼리는 곳.

흉웅을 패퇴시키고 설검대의 생존자를 추스른 설지굉이 애뢰산 독물들의 낙원, 독림에 진입했다.

‘숲 안에 웬 늪이?’

예측을 불허하는 지형이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을 빠져나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이 입을 벌린 채 마른 비를 맞이했다.

한번 떨어지면 영원히 헤어나지 못한다는 무저갱(無底坑)이 이러할까.

시커먼 늪가에 썩어가는 거목들이 거꾸로 처박혀 있는 모습은 마치 입을 벌린 아귀가 먹잇감을 우물거리는 것만 같았다.

‘너무… 조용한데?’

빛도 들지 않는,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숲.

독림 중앙에 위치한 늪에는 한 줄기 바람도 불지 않았다.

얕은 가장자리에는 그나마 몸이 잠긴 나무와 수초들이라도 보였지만, 중앙으로 눈을 옮기면 새까만 늪이 미동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너무나 고요해서 섬뜩하다.

마른 비는 본능적으로 늪의 중앙에서 가장 먼 서쪽 언저리를 따라 발을 옮겼다.

콰악!

아무런 소리도 흘리지 않고 다가와 발목을 깨문다.

육신의 내독성을 철석같이 믿기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이 독림의 생물들은 하나같이 은밀한 습격에 특화되어 있었다.

발을 들자 기다란 뱀 한 마리가 대롱대롱 딸려 올라왔다.

‘잘됐네.’

안 그래도 허기진 참이었다.

본래 수풀에 서식하는 놈이 왜 늪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반가울 따름이다.

검은색과 황색 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진 뱀을 들어 올려 세모꼴의 대가리를 잡고 쭉 찢는다.

껍질을 벗겨낸 뱀의 허연 속살은 먹음직스러웠다.

으직-!

“음. 청죽사보다는 맛이 없구나.”

이틀 만에 하는 식사다.

그제 낮, 도망치던 경로에 웅크리고 있던 고슴도치를 제외하면 물밖에 먹질 못했다.

마른 비는 팔뚝만한 길이의 뱀을 생으로 질겅이며 허기진 속을 달랬다.

푸드득! 사삭-!

“어우. 귀찮네, 이것들. 저리 가, 인마.”

응혈독을 함유한 기형 독나방의 독분도 먹히지 않는다.

독림에서만 서식한다는 늪 도마뱀의 피부독도.

공작거미의 괴사독도.

독화살개구리의 신경독마저.

늪지대의 상위 포식자들이 자랑하던 맹독은 마른 비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희한한 놈들이네? 날 먹지도 못할 거면서 왜 이리 공격적이야?”

주변을 지나면 일단 덤벼들고 본다.

맹수가 이러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독물들은 마른 비를, 인간을 포식하지 못하는 놈들이다.

그럼에도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어 독부터 냅다 뿌린다.

독림 바깥에 서식하는 독물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독을 사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특정 범위에 한 마리씩. 이놈들, 제각기 영역을 가지고 있는 거구나!’

야생에서 나고 자란 마른 비는 독림의 특수성을 빠르게 읽어냈다.

독림에 웅크린 독물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분할된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독성을 견주며 미묘하게 형성된 힘의 균형.

섣불리 덤볐다가는 공멸이란 걸 알기 때문에 웬만해선 서로의 영역을 침범치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생물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중독시킨다.

그것은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영역이 있어야 그 안에 분포한 식생과 먹잇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땅을 확보하지 못한 채 배회하는 녀석들은 영역을 지키는 주인들에게 공격을 받다가 쓰러지고 만다.

어느 순간부터 강력한 독을 지닌 녀석들은 저마다의 영역에 웅크린 채 그 구역을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놈들이 영역을 넘는 경우는 오직 두 가지뿐이다.

아사 직전까지 굶주리거나, 인접한 영역의 독물이 쇠약해졌거나.

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독림에는 먹잇감이 풍부했고, 대체적으로 크기가 작은 독물들의 특성상 영역이 좁아도 먹이가 고갈될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후자는 왕왕 일어난다.

수명이 다해 비실대거나, 싸우다가 상처 입은 놈이 있으면 근처 영역의 독물이 지체 없이 달려들어 숨통을 끊는다.

영역을 넓히는 일은 풍부하고 다양한 먹이를 확보하는 일과 직결되기 때문에, 늪지대에서 영역의 크기는 곧 힘의 크기였다.

참방!

푸드득―

스륵스륵…….

오랜 세월 적막만이 감돌던 늪지대에 분주한 움직임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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