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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74화 (74/463)

74화

독사, 독지네, 독나방, 독거미, 독개구리…….

긴 세월 동안 각자의 영역을 고수하던 강자들이다.

사냥을 하거나 적이 빈틈을 보일 때 말고는 움직이지 않던 녀석들이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나 때문이구나.’

갑작스레 등장한 마른 비는 늪에 던져진 한 줄기 파문과 같았다.

늪의 서쪽 귀퉁이를 차지했던 변종 까치살모사가 힘 한번 못 쓰고 잡아먹혔다.

영역을 성큼성큼 침범하는 적에게 위협을 느낀 독물들이 필사적으로 독을 살포했지만, 아무것도 통하질 않는다.

오히려 공기 중에 뒤섞인 독들이 퍼지며 주변 영역의 주인들을 중독시키고 있었다.

침입자들을 거꾸러뜨린 맹독이 통하지 않으며, 물리적인 힘은 견줄 필요조차 없다.

대적 불가능한 포식자의 출현이었다.

공기 중에 퍼지는 독의 속도만큼이나 공포가 빠르게 확산됐다.

다종다양한 독물들이 독을 피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생존을 위해 또다시 독을 뿜어냈다.

늪지대의 서쪽이 새카만 독 연무로 뒤덮이는 건 한순간이었다.

“쿨룩, 쿨룩!”

이건… 위험하다.

수십 가지의 맹독이 섞이고 어우러지며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새로운 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지간한 독은 웃으며 맛볼 수 있는 마른 비조차 뒤섞인 독기의 지독함에는 호흡을 멈추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빠져나가…! 아니, 아니야.’

독물들이 많다고만 들었지 이런 집단 서식지가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여긴 자신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환경이었다.

청죽사를 주식으로 삼는 와족이다.

야생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와족의 핏속에 생성된 독 저항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장소였다.

‘여기야! 여기서 싸워야 해.’

마른 비에게 있어 사방의 독물들은 아군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독을 견뎌낼 신체를 가지지 못한 자에게 독림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여기다.

여기서 적들을 친다!

마른 비가 늪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던 잰걸음을 멈추고, 이제 막 숲에서 기어 나오는 설검대를 돌아봤다.

“이런 곳에 웬 늪이?”

“꼬마다! 꼬마가 저기 있다!”

부원이 끌고 온 30명의 검사들 중 검은 숲을 통과한 건 27명이었다.

처음 대왕 지네에게 죽은 검사를 제외하고도 숲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두 명이나 더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절대 방심하지 마라!”

추격을 거듭하며 알게 된 게 있다.

저 꼬마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자신들을 상대할 나름의 방책을 마련했을 때라는 점이다.

박쥐 떼가 그랬고, 동물들을 흩어서 눈속임을 할 때가 그랬으며, 거대한 곰을 부렸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도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길게 늘어선 설검대가 잔뜩 긴장한 채 마른 비를 노려봤다.

‘가만히 서 있는 이유가 뭐지?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야만족 꼬마는 그저 담담히 서서 자신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안 올 거야?”

“…….”

“나 잡아야 하잖아?”

“……뻔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다.”

“도발 맞아. 근데 당신들은 움직여야 할걸? 안 오면 나 그냥 간다?”

말을 섞어봐야 이쪽만 손해다.

하염없이 울화만 쌓일 뿐 실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 움직일 수밖에 없지.’

다가서야 하는 건 결국 이쪽이다.

부원의 수신호를 받은 설검대가 늪지대의 가장자리를 따라 신중히 발을 옮겼다.

“조심해라. 분명히 독물들을 이용해 뭔가를 할 거다.”

바보가 아닌 바에야 독사와 독충 천지인 이곳에서 그것들을 이용해 자신들을 막아서리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

‘뭐가 됐든 돌파한다. 물리더라도 내공을 이용해 독기를 몸 한구석으로 밀어놓으면 돼.’

지독한 맹독을 지닌 생물들이 우글대지만, 물리는 즉시 내공을 운용하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

그 안에 잡는다.

그리고 안전지대를 확보한 후에 서로를 도와 독을 체외로 밀어내면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설검대도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내공의 우위와 수적 우세.

부원의 고함이 늪지대를 쩌렁 울렸다.

“내공을 아낌없이 끌어올려 독기에 대비해라! 최고 속도로 경공을 펼쳐 꼬마를 잡는다! 가잣!”

징글징글한 술래잡기를 여기서 끝내겠다는 듯 설검대 전원이 발작적으로 날아올랐다.

“제발 여기서 끝을 보자! 망할 꼬맹아!”

선두에서 돌진한 설검대원 다섯 명의 검이 찬란한 검광을 뿌렸다.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검은 늪의 가장자리.

황홀히 빛나는 백색의 검기는 유일한 광원(光源)이나 다름없었다.

‘응전해야 해.’

체력과 심력, 모든 게 바닥이지만 그건 적들도 마찬가지다.

단전이란 인위적인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대자연의 정기를 호흡하여 전신세맥에 그대로 깃들이는 자연기의 특성.

필요할 때마다 호흡을 통해 촉발하는 방식이기에 자연이 만발한 곳일수록 더 큰 힘을 얻는 건 당연지사다.

그리고 이 애뢰산은 운남의 심장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자연기가 꽉 들어찬 곳이었다.

‘잠깐이면 돼.’

약간이나마 회복한 자연기를 마지막 한 줌까지 박박 긁어 이번 전투에 때려 붓는다.

번갯불을 발동해 적들의 품으로 파고든 마른 비의 입에서 와족 비전의 언령이 터졌다.

『적! 공격해!』

독성은 강력하지만, 지능은 미미한 미물들이다.

짐승들보다 야수 제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건 당연했다.

마른 비에게 공포를 느끼고 멀찍이 대피했던 독물들이 장군의 호령을 받은 병사들처럼 설검대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 꼬마와 맞닿는 선두 다섯을 제외하면 독물들에 대비하라!”

좌측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늪.

우측은 썩어가는 나무들이 덧대어진 숲.

달려들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다.

우회해서 뒤를 잡고 싶지만, 늪은 너무나 넓고 보보마다 독물 천지다.

결국 정면으로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포위하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문제 될 건 없다.

설검대는 오직 전면전을 상정하며 수련을 거듭한 정예들.

이번에야말로 소년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부원의 목소리는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독물들부터 처리한다! 4인 1조 합검식(合劍式)! 검막(劍膜)!”

네 명이 하나가 되어 등을 맞댄 설검대가 각기 동서남북의 방위를 점했다.

피피피핏!

분광십팔수검에 버금가는 속도로 휘둘러진 검들이 사방을 빼곡하게 수놓는다.

지고의 경지에 이르면 몸을 둘러싼 모든 방위를 검 하나로 차단하는 것이 검막이지만, 일개 대원이 홀로 그 수준의 기예를 펼치는 게 가능할 리 없다.

그래서 연계한다.

절정에 이른 검사만이 시전 가능한 고절한 무예를, 그에 못 미치는 네 명이 힘을 합쳐 구현하는 것이다.

점창 제자들의 공격력을 상승시키고, 때론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점창고검 여휘가 창안한 합검식이 애뢰산 독림의 늪지대에 물 샐 틈 없는 검의 방벽을 쌓아 올렸다.

피피핏! 파팟! 후두두둑!

설검대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던 독물들이 갈가리 찢기며 쏟아져 내렸다.

시커먼 어둠 속, 검은 비가 내리듯 쉴 새 없이 퍼붓는 독물들의 사체를 뚫고, 다섯 명의 설검대와 와족의 소년이 정면으로 격돌했다.

‘저놈이 미친 건가?’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도 모자랄 놈이 정면 승부를 걸어오다니?

독충과 독사들을 믿은 모양이지만 이번만큼은 꼬마의 실수다.

당랑거철.

부원의 눈에 비친 마른 비는 수레바퀴를 향해 멋모르고 달려드는 사마귀나 다름없었다.

쉬익! 쐐액! 사아악!

번갯불로 거리를 좁힌 마른 비에게 다섯 자루의 검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도주하는 내내 무수히 본 적들의 검격이다.

좌우측의 팔다리와 오른쪽 쇄골.

눈으로 포착하기도 힘든 다섯 자루 쾌검이 마른 비를 제압하기 위해 쇄도했다.

‘힘으로 걷어낸다.’

장기전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간 연마해 온 적들은 하나하나가 노련한 싸움꾼이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지만, 체력까지 고갈된 상황에서 한 번에 다섯을 감당하는 건 무리다.

조금만 길어져도 순식간에 쓰러지고 말 터.

짧고 굵게 승부를 본다.

마른 비의 오른발이 검은 늪의 가장자리를 강렬하게 내리밟았다.

‘산 허물기.’

목표는 사람이 아니다.

자연기를 집중시킨 오른쪽 어깨가 푸른빛 광택을 두텁게 둘러치고, 엄습하는 다섯 자루의 검을 요격한다.

‘멍청한!’

어깨를 사용하는 저 독특한 체술.

마른 비가 분광검을 알 듯 설검대 또한 산 허물기를 안다.

강대한 힘으로 끊어 치는 기술은 독보적이라 할 만큼 강력하지만, 내공의 우위를 점한 다섯 명의 합공이다.

절대 밀릴 리가 없었다.

어깨 뒤로 숨어버린 기존의 타점을 쫓는 대신, 다섯 자루의 검을 동시에 어깨에 쑤셔 박아 이 지긋지긋한 추격전을 끝낸다.

의사 교환을 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궤도를 수정한 검들이 마른 비의 오른쪽 어깨, 그 한 점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지금!’

마른 비가 진각을 위해 지르밟았던 오른발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내력의 열세.

기존의 진각으로 발출한 산 허물기 하나만으론 적들의 합공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 방을 덧씌우면 그뿐.

발가락 끝으로 디딘 대지에서 자연기를 길어 올려 뒤꿈치에 전이하고, 약식 진각을 한 번 더 내리찍는다.

쿠앙!

땅과 충돌한 자연기가 육체를 거세게 타고 올라, 내질렀던 어깨를 또 한번 전진시키니, 산을 허물 대지의 일격이 연달아 뻗어 나간다.

‘연(連), 산 허물기.’

이중으로 중첩된 자연기의 맹타가 날아드는 다섯 줄기의 검격을 일거에 상쇄했다.

콰차창!

“큭!”

“이 무슨…!”

검을 든 오른손이 후방으로 튕겨 나가고, 찢어진 손아귀가 붉은 피를 흩뿌린다.

두 명의 설검대원은 아예 검을 놓쳐버렸다.

활짝 열린 가슴.

공격이 실패한 직후의 무방비 상태.

지금이다.

『들어가!』

전력을 다한 한 방을 쏟아냈지만, 적들의 검을 밀어내는 게 한계였다.

하지만 마른 비에게는 강력한 우군이 있다.

스사사삭―

주위를 맴돌던 독물들이 언령에 이끌린다.

발목을 시작으로 몸 곳곳에 달라붙은 녀석들이 일시에 맹독을 주입하니, 내공으로 밀어낼 틈도 없이 다섯 명의 검사가 후두둑 무너져 내렸다.

“끄아아아!”

“컥! 쿨럭…! 카아악!”

새카매진 얼굴 위로 시퍼런 핏줄이 곤두선다.

심장을 움켜쥔 다섯의 검사는 고통에 몸부림칠 틈도 없이 숨이 끊어졌다.

있는 대로 부릅뜬 눈은 경악과 공포,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바로 들어간다.’

네 명씩 군데군데 뭉쳐서 달려드는 독물들을 갈라내는 설검대.

그들이 이쪽을 보고 뭐라 소리 지르기도 전에.

번갯불을 튕긴 마른 비가 적들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엇!”

“이, 이놈!”

검막에 조각조각 해체된 독물들의 사체가 꽃잎처럼 휘날리는 가운데.

합검식을 펼치느라 서로 간에 간격을 둔 검막과 검막 사이의 틈.

그 절묘한 공간에 마른 비의 신형이 우뚝 섰다.

“고생들이 많네?”

도발의 순간마다 지긋지긋하게 목격한 소년의 미소다.

적응할 때도 됐건만 징글징글하게 얄미운 건 여전하며, 울컥 치솟는 분심은 억누를 길이 없었다.

‘네놈 때문에 이 고생을…!’

몸과 마음이 쾌적한 상태였다면 흔들리지 않았을까?

수일간 잠 한숨 못 자는 통에 있는 대로 곤두선 신경과 배 속을 긁는 허기, 바닥을 드러낸 인내심, 고갈된 체력…….

그 모든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 눈앞에 있었다.

‘이놈만 잡으면…!’

걷잡을 수 없는 유혹이 이성을 마비시킨다.

넘어가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이 진저리나는 추격전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다.

대부분의 설검대원들은 검을 날리고 싶은 욕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새끼! 죽어어어!”

마른 비와 인접하여 검막을 펼치던 몇몇이 정해진 자리를 이탈했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합검식을 풀어헤친 그들이 앞뒤에서 마른 비를 노리고 검을 뻗었다.

“안 돼! 멈춰라!”

부원의 외침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아니, 설검대원들의 눈빛이 갈등에 흔들렸던 바로 그 순간에.

마른 비는 번갯불을 후방으로 발동하여 적진을 이탈해 버렸다.

“이런 병신 같은 놈들이…!”

검막을 해제시키기 위한 도발임을 모른단 말인가.

쑥 들어왔던 그대로 바로 빠져나갈 게 뻔히 보이지 않나.

“크아악!”

뚫린 공간.

약 오른 독물들이 두고 볼 리 만무하다.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쥐 떼처럼 달려든 독물들의 수십 가지 독이 설검대원들의 육신을 뻣뻣하게 굳히고, 흐물흐물하게 녹였다.

설지굉은 그 광경을 노려보며 눈빛을 번뜩였다.

‘코앞이다!’

그토록 자신들을 애먹인 야만인 소년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었다.

지쳤는지 숨을 몰아쉬는 소년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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