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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75화 (75/463)

75화

‘독물들이 무한정 있는 건 아니니 이 공세는 머지않아 끝이 나겠지만… 그러면 녀석은 또 도망간다.’

뻔한 유혹에 몸을 맡긴 머저리 같은 세 놈 때문에 두 개의 검막이 허물어졌다.

한 개의 합검식에서 두 명이, 다른 한 개에서 한 명이 검을 뻗었고, 결과는 손을 합쳤던 여덟 명의 몰살이었다.

독물 한두 마리에게 물리면 내공으로 버티기라도 하겠지만, 지금처럼 수십 마리에게 물리면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몸을 움직여 달려 나가면?

독물들은 따라오지 못할 거다.

싸우다 보면 결국 물리긴 하겠지만, 기껏해야 한두 마리일 테고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을 터.

무엇보다 소년이 준비했던 노림수는 다 떨어진 게 틀림없었다.

‘피해가 있더라도 돌파하여 잡는다!’

타당한 판단과 빠른 결단.

부원의 외침이 거세게 터졌다.

“검막을 해제하고 경공으로 독물들을 따돌린다! 누가 됐든 저 망할 꼬마를 잡아라!”

부원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마른 비의 입술도 움직였다.

적들을 공격하란 언령이 해제되고, 야수 제어에서 벗어난 독물들이 일시에 멈춰 섰다.

“……?!”

조막만한 뇌에 가해진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이끌렸던 독물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나방, 거미, 뱀, 지네, 개구리, 도마뱀…….

영역을 다투던 숙적들이 한가득이다.

사방을 메운 적들을 인식하자 무엇보다 앞서는 생존 본능이 독물들의 공격 욕구를 자극했다.

“시아아악!”

“끼익!”

“촤라라라!”

푸화하학!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담고 있는 의미는 분명한 괴음이 번지고, 오색 빛깔의 독무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하나하나로도 치명적인 독들의 향연이다.

대자연의 맹독들이 뒤섞이고 혼합되며 세상 어디에도 없을 절독의 구름을 피워 올렸다.

마른 비도 버틸 수 없었던 지독한 독무가 검막을 해제하고 날아오르려던 설검대의 잔존 인원을 휩쓸었다.

철퍽!

쿵!

털푸덕!

한 토막의 비명도 남기지 못했다.

독무에 휘감긴 설검대 전원이 썩은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츠츠츠츠―

한계를 넘은 독은 용해(溶解)까지 일으키는가.

설검대는 물론이거니와 밀집해 있던 독물들마저 한 줌의 핏물로 녹아내렸다.

‘이런 독이…! 호흡을 멈추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

설검대가 오기 전에 미리 경험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저 독무에 휩쓸렸을 거다.

적 지휘자의 외침을 듣자마자 몸을 뺐는데도 독무에 스친 피부가 견디기 힘들 만큼 시큰거렸다.

들이마셨다면 연약한 내부 호흡기는 망가졌을 게 틀림없다.

멀찍이 물러난 마른 비의 눈에 피부가 짓무르고 녹아내린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독무를 뚫고 나와 털썩 쓰러지는 게 보였다.

“……!”

발성기관이 녹아버려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안구와 고막은 독무에 노출된 순간 진즉에 녹아 없어졌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어 더욱 날카로워진 부원의 감각은 앞에 있는 익숙한 기운을 읽어냈다.

‘조, 족장의 아들…?! 살아 있나? 커헉…! 저 녀석도… 독기에 노출되었을 텐데? 어떻게? 내공으로 밀어낸 건가? 저, 저 꼬마는 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떤 방식으로 축기(蓄氣)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아무리 와족의 내공심법이 뛰어나더라도 절대적인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공은 호흡으로써 외기를 받아들여 신체 내부에 축적하는 것이며, 그것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간에 비례한다.

훌륭한 심법일수록 쌓고 정제하는 시간을 줄일 수는 있으나 자신들이 연마한 심법 또한 천하 구파의 그것이었다.

운남 오지에 사는 야만인들의 심법보다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밀릴 리가 없었다.

‘쿨럭…! 왜, 왜 저놈은 영향을 받지 않는 거냐!’

수십의 설검대를 한순간에 녹여버린 독이다.

그리고 곧 자신을 황천으로 안내할 독무다.

스치기만 해도 독기가 퍼져 죽는 게 마땅함에도 소년의 기운은 좀 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십 대 중반의 꼬맹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잠 한숨 자지 않고 내공만 연마했다고 하더라도 설검대원들보다 많은 내력을 쌓았을 리 없다.

그리고 그건 추격의 과정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지형지물만 아니었다면 분명히 따라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멀쩡하고, 자신들은 전멸했다.

야생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독에 대한 저항력을 확보한 와족의 신체에 대해 부원이 알 리 없었고, 결국 그는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마른 비는 참담한 모습으로 숨이 끊긴 그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소년의 입술이 힘없이 열렸다.

“당신들에게… 악감정은 없어. 지금도 왜 전쟁이 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당신들 입장에서 난 적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나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니까… 이해해주길 바라. 좋은 곳에 가길 진심으로 바랄게.”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쓰며 살아남았고, 여기까지 왔다.

생존이라는 대전제 앞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형체도 유지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인간을, 그리고 처음으로 행한 대량 살상을 쉽게 넘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죽어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결국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다독이겠지만, 마른 비는 죽어간 적들에게 진심 어린 조의를 표했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수십의 인간을 살해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호기심 많고 맑기만 했던 소년은 어느새 어른들의 사정에 휩쓸려 목까지 차오르는 피 웅덩이에 몸을 담그게 되었다.

‘……가야지.’

가장 큰 위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쫓아올 게 분명한 노인과 잔존 설검대로부터 도망쳐야만 했다.

착잡함에 사로잡힌 마른 비는 독무에 노출된 피부가 시꺼멓게 변색된 것도 모른 채 길을 재촉했다.

늪의 외곽.

나무들이 첩첩이 쌓여 진득한 어둠만이 자리한 검은 숲.

소년은 한 쌍의 맑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왜 이리 축 처져 있나! 두 눈 부릅뜨고 주위를 경계해라! 이런 오지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벌레에게 물려 뒈지고 싶은가! 너희들이 그러고도 점창의 정예를 자처한단 말이냐!”

촤아악!

머리 위에서 은밀히 다가드는 무언가를 보지도 않고 베어 넘기며, 설지굉이 외쳤다.

“키에엑!”

볼록한 머리와 가슴, 온몸이 비단털로 뒤덮인 무언가가 토막 나며 널브러졌다.

본디 머리 쪽은 어두운 빛깔에 몸통은 옅은 주홍빛을 띠는 놈인데, 이놈은 검은색 일색이었다.

‘이건… 늪염낭거미? 근처에 늪이 있는 건가? 그보다 이놈은 독물이 아닌데?’

원래라면 그렇다.

거미줄을 치지 않고 돌아다니는 늪염낭거미는 본디 독을 지닌 생명체가 아니다.

하지만 주둥이를 비집고 나온,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어나는 이빨은 독니가 분명했다.

발밑에서 토막 난 채 꿈틀대는 녀석은 인간의 머리통만 했는데, 설지굉이 아는 늪염낭거미는 기껏해야 인간의 손톱 크기에서 성장을 멈추는 소형 종이었다.

‘크기, 색깔, 특징, 습성……. 죄다 정상이 아니야. 이 검은 숲은 상리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애뢰산 독물들의 집단 서식지.

독림에 들어선 설지굉이 눈살을 좁혔다.

“끄아아아!”

좌측 후방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렸다.

미간을 찡그린 설지굉의 신형이 훅 꺼졌다.

“운기해라.”

정심한 내력이 쏟아지며 침투한 독기를 밀어낸다.

다리 한쪽을 움켜쥐고 쓰러졌던 설검대원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독기를 몰아내기 위해 내력을 집중했다.

동상에라도 걸린 듯 새파랬던 다리가 천천히 본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의 이빨 자국에서 퍼런 독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크윽! 가, 감사합니다. 장로님.”

‘이 정도 독기를 다스리지 못하다니……. 괴수와 싸우느라 내력 소모가 컸나 보군.’

맹독인 건 맞지만, 설검대의 무인이 감당 못 할 독기는 아니었다.

흉웅과 싸우면서 텅텅 비어버린 단전이 문제이리라.

독기를 밀어낼 내공의 절대량이 모자란 것이다.

부원을 필두로 하여, 흉웅과 싸우지 않고 독림에 진입했던 30명의 설검대는 숲을 통과하며 총 3명의 대원을 잃었다.

하지만 설지굉과 들어선 80명의 설검대는 고작 독림의 중앙 부근을 지나치고 있음에도 벌써 7명이 썩은 나무들 위로 몸을 눕혀야만 했다.

심대한 타격이다.

침투한 독을 밀어내기는커녕 다가오는 독물들을 감지할 기력조차 모자란 자들이 상당수였다.

‘이대로는 안 돼……. 추격 속도가 점점 떨어진다. 하지만 이 녀석들을 놓고 가면…….’

볼 것도 없다.

몰살이다.

평범한 지형이었다면 진즉에 기진맥진한 대원들을 쉬게 하고 기력이 남은 자들로 추격대를 구성했을 거다.

하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여긴 생전 처음 보는 변종 독사와 기형의 독충이 우글거리는 사지였다.

이런 곳에 기력이 소진된 자들을 두고 간다?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냉혹하다는 평까지 듣는 설지굉이지만, 자신이 키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나 다름없는 이들을 버리긴 힘들었다.

그런 게 가능한 자였다면 아슬아슬하게나마 정파로 분류될 수 없었을 터.

하지만 이대로 끌고 가면 추격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설지굉의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방금 목숨을 구한 설검대원이 그를 올려다봤다.

“먼저 가십시오. 장로님.”

“멍청한 소릴……. 죽고 싶어 환장했나?”

“짐이 되긴 싫습니다. 이대로 가봤자 싸움은커녕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나아가기 힘든 동료들과 뭉쳐서 버티고 있겠습니다. 꼬마를 잡고, 돌아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상황은 명료하다.

그리고 설지굉의 고민을 안다.

그렇다면 수하 된 자로서, 제자 된 자로서 그 고민을 덜어줌이 마땅하다.

위험에 빠지는 걸 감수하고 동료들을 전진시키는 것.

정파의 정예다운 결단이었다.

“…….”

지휘자의 입장.

놓고 간다는 결단을 내리는 게 맞다.

자신의 입으로 그리 말하기가 쉽지 않을 뿐.

설지굉의 눈이 가늘게 경련했고, 이내 꾹 다물었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알겠다. 그리 하지. 반드시 살아 있도록.”

추격을 계속하기 어려운 자들이 중독됐던 설검대원의 곁에 모였다.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은 설지굉의 옆에 섰다.

“전진한다.”

인질이니 뭐니 하는 건 이제 아무 상관없다.

복수.

발단이 어찌 됐건 꼬마 때문에 백이 넘는 설검대가 목숨을 잃었다.

설검대 창립 이후 한 명에게 이토록 지대한 피해를 입은 경우는 없었다.

잡아 죽이지 못한다면, 복수하지 못한다면, 설검대의 이름을 버림이 마땅하리라.

설지굉과 이제는 60여 명 남은 설검대가 밀림을 뚫고 전진했다.

그리고 설지굉조차 기척을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다란 고목의 꼭대기.

뒤엉킨 나무들로 인해 몸을 가누기도 힘든 비좁은 공간에서 숨죽이고 있던 그림자 하나가 그들을 따라 흘렀다.

‘거의 다 왔어.’

서쪽에서 격전을 벌인 마른 비는 늪을 우회하여 남쪽 끝에 다다라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늪지대를 감싸고 있는 검은 숲의 남쪽으로 진입한다.

그곳에도 독물들이 있겠지만, 북쪽 숲에 있는 놈들이 그랬듯 늪에 있는 놈들만큼 드세지는 않을 터다.

독림에서 힘 좀 쓴다는 놈들은 죄다 늪지대에 몰려 있는 게 틀림없었다.

‘특정 영역마다 한 마리씩. 무는 곳은 주로 팔과 다리.’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독물들이 달려들었지만, 마른 비는 이미 놈들의 기척과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공격을 미리 감지하고, 물어뜯으려는 곳에 부분적으로 자연기를 흘려 넣는다.

자연기가 주입된 강피를 뚫고 이빨을 박아 넣을 수 있는 놈은 극히 드물었다.

‘자극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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