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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76화 (76/463)

76화

처음 진입했을 때와 달리 놈들을 죽이거나 쫓아내지 않는다.

오는 공격을 받아주고,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닫게만 한다.

독이 통하지 않고, 반격이 없으니 주춤거리던 놈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 구역을 넘으면 또 다른 놈이 달려들었지만, 제 영역을 넘어서까지 쫓아오는 놈은 없었다.

독도 살포하지 않는다.

독분을 뿌리는 나방 정도를 제외하면 독물들의 주된 공격법은 이빨을 박아서 독을 흘려 넣거나 피부를 부대껴 중독시키는 것이었다.

발작하듯 독을 터뜨리는 건 그야말로 심대한 위협을 느꼈을 때의 자기 방어라는 걸 깨달았다.

‘왼쪽 허벅지. 오른쪽 손목. 발꿈치 힘줄 부근.’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며 놈들의 기척을 미리 감지하고, 달려드는 부위에 자연기를 신속하게 흘려 넣었다.

한 번도 신체 곳곳으로 자연기를 이토록 빠르게 이동시켜 본 적은 없었다.

‘이거… 되게 유용한데?’

대기에 흐르는 자연기를 계속 받아들이고 있지만, 전투를 하거나 격하게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양이다.

한 줌의 자연기.

기껏해야 국소 부위를 방어할 정도의 적은 양으로 독물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마른 비는 깨달았다.

‘비효율적이었어.’

산 허물기, 날짐승 떨구기, 바위 부수기, 올빼미 사냥…….

경우에 따라 기운을 잔뜩 응집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타격의 순간 터뜨리는 걸로 족하다.

하지만 자신은 기술 발동 전부터 후까지, 있는 대로 자연기를 소모하며 전투를 치러왔다.

‘낭비했던 거야!’

산 허물기를 전개할 때를 떠올린다.

어깨를 뻗기 전부터 들이받은 후까지.

상반신 절반에 모조리 자연기를 둘러쳤다.

심각한 낭비다.

충돌하는 순간, 어깨와 팔뚝에 두르는 걸로 충분한 것을.

아니, 때에 따라서는 어깨 한 곳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적을 쓰러뜨릴 수 있다.

‘효율적인 운용!’

필요할 때, 정확한 지점에, 집중적으로 자연기를 불어넣는다.

그것만으로도 전투의 지속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리라.

백전을 거친 고위 전사들이나 터득한 자연기의 활용법을, 마른 비는 퀴퀴하고 음습한 독림의 늪지대에서 깨달았다.

“근데… 몸이 왜 이렇게 무겁지?”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어지럽다.

물에 적신 솜처럼 몸의 절반이 축축 가라앉듯 무지근해졌다.

‘다 왔는데…….’

늪지대와 검은 숲의 경계가 코앞이다.

적들은 머지않아 쫓아올 거고,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한다.

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안 돼…….’

술에 취한 듯 비틀대던 마른 비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쿵!

복잡하게 뒤엉킨 나무들 아래.

검은 숲에 가까스로 진입하자마자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어지럼증에 휘청거리던 소년은 결국 의식을 잃었다.

쓰스슥-

날렵한 무언가가 나무를 타고 미끄러진다.

휙- 휙―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며 하강하는 움직임은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바람이 귓전을 울리고, 지면이 빠르게 가까워진다.

터턱.

무른 흙과 불쾌하게 질척이는 발의 감촉.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지형이다.

살아남기 위해 쳐다보기도 싫은 곳으로 기어 들어와 비루한 삶을 이어 나간 지 오래지만, 이 숲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사박- 사박-

그래도 발이 땅을 디디는 감촉은 제법 좋았다.

본디 단단한 대지를 딛고 살아가도록 창조된 생명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로 만물의 위에 군림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군림자는 하나가 아니었고, 미처 힘을 기르기도 전에 성장을 마친 대적이 들이닥쳤다.

모든 것을 잃었다.

영토는 물론이거니와 아비와 어미가 흉험한 두 개의 칼날 아래 목줄기를 물어 뜯겼다.

사방으로 도망친 형제자매들마저 새하얀 발톱 아래 갈가리 찢기고 말았다.

남은 건 자신 하나였고, 생존 그 하나만을 갈구하며 검은 숲에 숨어들었다.

힘을 키우고, 존재를 감추며, 팔자에도 없는 나무 꼭대기를 전전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밟았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대지.

발이 푹푹 빠져들고 털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이토(泥土)일지라도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으으… 윽…!”

해와 달이 족히 이백여 번은 자리를 바꾸는 동안 나무에서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던 자신이 땅을 밟은 이유.

숲에 진입한 순간부터 눈여겨본 인간의 새끼가 얼굴을 진흙에 묻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

쓰러진 마른 비의 머리맡에서 한 쌍의 청화(靑火)가 어둠을 태웠다.

“쿨럭! 으윽… 웩! 우웩!”

피가 역류하자 비릿한 향이 입 안 가득 번진다.

뒤이어 견디기 힘든 악취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구역질을 유발했다.

땡볕 아래 수일간 부패한 시체에서나 날 법한 냄새.

눈앞이 빙빙 도는 상황에서도 뇌가 아릿해질 정도의 역겨움이 배 속을 뒤흔들었다.

“쿨럭! 쿨럭! 으웨엑!”

진흙 속에 파묻힌 얼굴을 들어 올릴 힘도 없다.

한 번도 기대를 배신한 적 없던 육체가 말을 듣지 않았다.

팔다리는 차라리 떼어내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졌다.

게워낸 피와 구토, 악취를 풍기는 독액이 진흙과 함께 버무려져 얼굴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독… 살짝 닿았을 뿐인데……. 나, 죽는 건가?’

와족의 강고한 독 저항력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극독이었다.

수십 가지 독들이 뒤섞이며 만들어낸 독기는 화선지에 번지는 먹물처럼 마른 비의 육신을 잠식해 들어왔다.

‘중독됐었구나. 오래 버틴 거겠지. 내독성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들처럼 진즉에 녹아내렸을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신체 내부에서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은 영토를 침범하려고 성을 두드리는 침입자요, 면역력은 수비대다.

하지만 성벽은 벌써 허물어졌고, 토지는 점령당했다.

살아남은 수비대가 각지에서 산발적인 저항을 멈추지 않고 있지만, 전멸은 시간문제며, 그들이 쓰러지는 순간 마른 비라는 이름의 대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 무자비한 침략자들은 점령지의 지배가 아닌 소멸을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침략자들의 손에서 영토를 재탈환하는 건 불가능했다.

‘해보고 싶은 게 정말 많았는데…… 아쉽다.’

마지막으로 푸르른 하늘이 보고 싶다.

하늘의 기상을 넓은 가슴에 담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

할아범이, 노을이가, 항상 따스하게 자신을 대해준 부족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터다.

아무도 없는 곳,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홀로 죽어간다.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는 죽음이며, 아무도 자신이 죽었다는 걸 알지 못할 거다.

움직이지 않는 손발과 급격히 차오르는 통증보다 그것이 더 두려웠다.

‘죽기 싫어.’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자, 얼마나 될 것인가.

생의 목표를 모두 이루어 아무런 미련이 없다고 자신한 사람.

세인들에게 칭송받는 성인.

강대한 무용을 뽐내며 사선을 넘나든 무장마저도.

막상 그 앞에 서면 한없이 나약해지기 마련이다.

고대 삼국, 천하무쌍의 호걸이었던 저 비장(飛將) 여포(呂布)조차 조조(曹操)에게 사로잡힌 후 살려 달라 애걸하지 않았나.

비범하다 하나 아직 열다섯의 소년일 뿐이다.

죽음보다는 삶에 훨씬 가까운 나이.

마른 비는 서서히 목줄을 죄어오는 죽음 앞에서 결코 담담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좋아……. 도와줘!』

그것은 생을 향한 강렬한 열망이었다.

얼굴이 진흙에 파묻힌 마른 비는 볼 수 없었지만, 그 간절한 외침에, 머리맡에서 소년을 내려다보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른 비의 언령은 과거 절실하게 생존을 바랐던 야수의 마음을 움직였고, 마음이 이끌린 짐승은 응답했다.

우우웅―

20여 년간 애뢰산의 산군이었던 아비가 그랬고, 오래전 인간을 따라나서기 전까지 운남 모든 맹수들의 제왕이었다던 아비의 아비가 그랬듯이.

푸른 눈동자는 타고난 혈통의 증거다.

이해(洱海)의 물빛을 담은 두 눈에 자연기가 어리니, 그것은 칠흑의 장막을 불사르는 푸른 불꽃과 같았다.

사아아―

자연기를 끌어 올린 야수가 곧 숨이 넘어갈 듯 쌕쌕대는 마른 비의 얼굴 옆으로 주둥이를 가져갔다.

맞닿아 있던 이빨들이 열리고, 유형화된 푸른 숨결이 흘러나와 소년의 호흡을 타고 몸속으로 전해진다.

‘이건?!’

들숨을 통해 전해진 기운이 폐를 거쳐 몸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간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던 마른 비의 맥박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두쿵! 두쿵!

한순간에 무너졌던 육신.

해독 가능한 한계치를 넘은 독기는 손쓸 새 없이 밀어닥친 산사태와 같았다.

허나 몸이 정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무너지진 않았으리라.

내독성을 뒷받침하며 침략자를 밀어낼 근원적인 힘.

연이은 도주와 전투로 바닥난 자연기가 가장 큰 문제였다.

‘누가 자연기를 불어넣은 거지?’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만 여겼다.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의지를 짓누르며 몰려오는 수마(睡魔)는 항거 불가능한 마귀의 속삭임이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잠들면 모든 게 끝이라는 걸.

버티고 버텼지만, 결국 눌어붙으려는 눈꺼풀에 대한 제어를 상실하려는 순간.

한 줄기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이, 이 힘…! 밀어낼 수 있어!’

강력한 지원군의 등장이었다.

청아한 기운이 육신을 휩쓸며 시커먼 침략자를 축출한다.

물밀 듯이 밀려온 지원군은 꺼져가던 저항의 불꽃을 되살리며 잃었던 영토를 수복했다.

억눌렸던 내독성이 고개를 들고, 꺼지기 직전이던 본연의 자연기가 들불처럼 번져 올랐다.

‘이 기운… 희한하게 거부감이 들질 않아. 편안하고 따뜻해.’

외기를 받아들여 정제한 후 특정 성질만을 뽑아내는 중원의 내공심법과 달리, 와족은 대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여 육체에 안착시킨다.

하지만 오랜 단련을 거치며 자신만의 색을 띠게 되고, 특정 반려수와의 교감이 시작되면 그 특색은 더욱 강화되기에 타인과의 공유가 불가능해지는 건 중원의 그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 하나의 대상만은 예외다.

혼으로 이어진 벗.

함께 성장하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일인일수(一人一獸)는 자연기마저 공유한다.

‘택한다는 표현을 썼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틀렸다. 점지라고나 할까. 마치 처음부터 그리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비슷한 특성, 유사한 성향을 가진 녀석과 맺어지는 것이지. 보는 순간 알게 될 게다. 아, 이 녀석이 내 짝이 될 놈이구나, 하고 말이야.’

어찌 인간과 짐승이 첫사랑에 빠진 남녀처럼 보는 순간 서로에게 강렬한 이끌림을 느낄 수 있을까.

설명할 수 있는 논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존재의 근간을 이루는 기운에 함유된 특질의 유사성.

부족회의에서 그믐이 했던 말은 결국 자연기마저 공유할 수 있는 상대를 찾으라는 뜻이며, 그런 야수를 만나는 순간, 너무나 당연하게도 서로를 알아보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자연기에서 전해지는 느낌과 감각. 인간은 아니야. 머리 위에 뭐가 있는 거지?’

마른 비는 당장이라도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기운이 유입된 순간, 거세게 뛰던 맥박의 소리는 그저 죽다 살아난 육신의 환희가 아니었다.

질긴 끈으로 이어진 운명적 만남.

평생을 함께할 벗을 알아본 심장의 고동 소리가 확실했다.

‘이 농밀한 기운! 야수. 야수가 확실해! 혹시… 할아범이 말한 내 짝이?’

인간보다 훨씬 더 자연에 밀접한 야수의 특성.

스스로 자연기를 깨우친 야수는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농밀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었다.

정체 모를 야수가 불어넣은 자연기는 마른 비의 육신을 휘돌며 고갈되었던 기운을 북돋았고, 대자연의 기운에 더욱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독은 이미 기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정체 모를 야수와 마른 비.

그들이 일으킨 두 줄기 힘은 와족의 내독성과 어우러지며 해일처럼 휘몰아쳤고, 극독을 가뿐히 제압했다.

한번 침략했던 적에게 다시는 영토를 내어주지 않으리라.

마른 비의 독 저항력은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며 더욱 강해졌고, 전보다 훨씬 높은 방벽을 쌓아올렸다.

‘보고 싶어! 보여줘, 네 얼굴을! 네가 누군지. 어, 어? 잠깐만! 안 돼, 가지 마!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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