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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77화 (77/463)

77화

독은 소멸했지만, 원래대로 몸을 움직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든 마른 비가 흐릿해진 눈동자의 초점을 맞추려고 안간힘을 쓸 때.

이쪽을 힐끗 돌아본 무언가는 땅을 박차고 나무 위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소년의 침침한 망막에 남은 건 어둠의 장막을 찢는 두 줄기 푸른 불꽃뿐이었다.

“카아압!”

촤아아악!

정적을 깨뜨리는 기합과 함께 숲의 끝자락이 사선으로 베였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던 고목들이 통째로 양단되어 미끄러졌다.

쿠쿠쿵!

요란한 소음으로 이목을 집중시킨 노인이 검은 숲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평소 같으면 푹푹 빠지며 질척이는 땅에 욕이라도 한마디 내뱉었겠지만,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노인은 아무것도 뵈는 게 없었다.

앞서 나간 꼬마를 잡아 죽인다는 목표만이 온통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육십 명의 사내들이 검을 뽑은 채 그 뒤를 따랐다.

본래는 하얀색이었을 무복은 땀과 먼지에 절어 꾀죄죄한 행색이었는데, 살벌하게 빛나는 눈빛 때문인지 지저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늪.”

갑작스레 나타난 검은 늪에도 별반 동요하지 않는다.

며칠간의 진저리 나는 추격전 끝에 배운 건, 이 땅의 지형과 동식물에 일일이 놀라다가는 끝도 없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눈에 담고 받아들인다.

여기까지 마른 비를 추격해온 설검대원들은 운남의 식생에 적응할 대로 적응한 상태였다.

“우측. 방위로는 서쪽. 전투의 흔적이다.”

조용히 뱉은 설지굉의 말에 백이십 개에 달하는 눈동자가 일시에 한곳을 향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내공을 끌어올려 동공에 집중시켰지만, 한 줄기 빛도 투과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 숲은 여전히 시야를 제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넘어온 지형과 달리 장애물이 없기에 그나마 흐릿한 형체를 포착할 뿐.

“검의… 파편들이군요.”

일반 대원들에 비해 무의 경지가 높은 조장들은 바닥에 떨어진 검의 조각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질 않고……. 검 몇 자루와 잘린 듯 짤막한 검편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장로님?”

“녹았다.”

검편? 녹아?

눈을 좁혀도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데, 그런 세세한 것까지 관찰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감탄을 삼킨 설검대가 이어지는 설지굉의 설명을 경청했다.

“검의 절단면이 뭉툭해. 군데군데 부식한 흔적들도 보인다. 부러진 게 아니라 녹은 거야. ……독이군. 저기서 싸움이 있었던 건 확실해. 남아있는 검과 검편들은 전부 둥글게 외곽에 분포해 있다. 그 말은… 중앙은 전멸했다는 뜻이겠지. 뭔가가 저기서 독을 살포했고, 원의 중심에 있던 녀석들은 검과 함께 통째로 녹아내렸을 거다.”

“허…….”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앞서 보낸 30명과 5조장 부원은 정황상 실패했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운남의 자연에 더 이상 놀라지 않듯 이번에도 받아들인다.

그저 한 명이라도 살아남았기를, 꼬마를 잡았기를 바랄 뿐.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말이다.

“둥글게 뭉쳤다면 진형을 짰다는 뜻인데… 꼬마가 또 짐승을 부린 모양이군요.”

“그렇겠지. 그 망할 꼬맹이.”

설지굉이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동사(同死)일까요?”

“글쎄. 죄다 녹아내려서 그건 알 수가…… 음?!”

대꾸하던 설지굉이 멈칫했다.

늪지대 너머, 남쪽 끝자락.

방금 지나온 검은 숲과 똑같은 풍경이 펼쳐진 거목들 아래서.

찢어발겨도 모자란 야만인 소년이 비틀대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찾았다.”

“네? 그 소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디에…?”

설지굉을 돌아본 6조 조장이 흠칫하며 말을 끊었다.

섬뜩하게 번뜩이는 회색 눈동자가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꼬마… 곱게 죽진 못하겠군.’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지근거리에서 설검 장로를 보필하며 알게 된 것이 있다.

저런 눈을 한 그는 절대로 방심하지 않는다는 것.

대부분의 인간을 눈 아래로 보는 특유의 오만한 성정을 뒤로 하고, 적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냉철함을 유지하는 한 마리 늑대가 된다.

억눌렀던 분노를 폭발시키는 순간은 적을 확실히 손아귀에 넣은 후다.

자신을 애먹인 상대를 고문하듯 잔인하게 괴롭히며 멱을 딴다.

다행히 그 대상이 정파의 무인이었던 적이 없고,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 모진 손속은 사마(邪魔)의 무리라고 지탄받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더 이상은 미꾸라지처럼 못 빠져나갈 거다.’

야수 제어라는 미지의 기예에 여러 번 농락당했지만, 결국 그것은 무력만으로는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썼던 수단이다.

꼬마의 밑천은 바닥났고, 다시 시야에 담은 이상 절대 놓치지 않는다.

고작 십 대 중반의 꼬맹이를, 설지굉은 필생의 대적을 맞이하듯 대하기로 작정한 게 틀림없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저 어린 나이에.’

약관에도 한참 못 미치는 꼬맹이다.

하지만 설검대의 노련한 무인들을 진땀 빼게 만드는 무력과 동물적인 전투 감각, 짐승들을 부리는 기이한 능력까지 갖췄다.

무엇보다 설지굉의 전력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6조 조장은 마른 비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주하는 며칠 사이, 강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어.’

사선을 넘으며, 소년의 전투 적응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달리면서 영약이라도 몇 개 주워 먹은 게 아닌지 의심될 만큼.

난다 긴다 하는 명문의 후기지수들을 무수히 봐왔지만, 이토록 급성장하는 괴물은 본 적이 없었다.

벌써 이 정도인데 훗날 성장을 마친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원한 관계를 맺은 이상, 살려두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에 반드시 죽여야 한다.’

6조 조장 또한 마른 비를 척살하기 위한 각오를 다졌다.

“거리가 꽤 되는군.”

가늘게 뜬 눈으로 늪 전체를 둘러본 설지굉이 말했다.

그 말처럼, 모든 걸 빨아들일 것만 같은 늪은 상당한 규모였고, 반대쪽 끝에 있는 마른 비와 설검대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늪을 우회하면 늦는다.

꼬마를 얕보는 마음을 내려놓은 이상 다신 놓치지 않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절반으로 나뉘어 늪을 우회해라.”

“장로님께선 따로 움직이십니까?”

질문에 답변하는 대신, 설지굉은 뒤돌아서 검을 들어 올렸다.

선명한 잿빛 검기가 타오르고, 검을 휘두르자 풍경이 잘렸다.

뎅겅! 쿠구구구― 쿠쿵!

밑동을 사선으로 잘린 나무가 절단면을 따라 미끄러지고,

촤아악!

남은 밑동의 절단면 아래를 또 한번 베니, 둥그런 판자 형태의 널판이 만들어졌다.

나무판자를 들어 올린 설지굉이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했다.

소란스러움을 감지했는지 늪 건너편의 꼬맹이가 이쪽을 돌아봤다.

‘반드시 죽인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표적을 되새겼다.

등평도수? 아쉽게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정도 너비의 늪을 건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먼저 간다. 우회해서 따라오도록.”

설지굉이 급조한 판자를 늪의 반대편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슈아아악―

회전을 주지 않고 던진 판자가 늪의 표면을 내달리니, 그것은 곧 발판이다.

눈부신 속도로 달려 나간 설지굉이 늪의 가장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카합!”

기가 막힌 곡예다.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던져지듯 도약한 설지굉이 쭉쭉 뻗어 나가는 판자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패애액―!

공기를 가르는 판자와 그 위에 우뚝 선 노인.

양자강(揚子江)과 비교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좁은 늪이다.

갈댓잎보다 수십 배는 넓은 원반이다.

허나 늪의 표면에 바짝 붙어 날아가는 그 모습은 남북조 시대, 전설처럼 회자되는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일위도강(一葦渡江)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일검에 두 쪽을 내주리라.’

이글거리는 잿빛 검기가 마른 비를 똑바로 겨누었다.

‘살았어!’

육신을 통째로 녹일 듯 날뛰던 독기는 어느새 말끔히 해소되어 있었다.

외부에서 주입된 기운은 독을 소멸시킨 뒤에 흩어져 버렸지만, 마른 비의 내부를 흐르며 자연기의 불씨를 되살려 놓았다.

기운은 여전히 바닥난 상태지만, 소년은 커다란 변화를 감지했다.

‘순수한 대자연의 기운.’

자연(自然).

본연의 생명력으로 스스로 생성, 발전하는 것.

즉, ‘스스로 그러한 것’.

인간이 아무리 갖은 기교를 부려봤자, 생명의 원천이 되고 스스로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거듭하는 대자연의 기운을 따라갈 순 없다.

와족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자연기였으며, 충분한 성과를 이루어 냈다고 자신했다.

‘어림없는 소리였어.’

이제야 깨달았다.

인간의 몸으로 순정한 자연의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연의 기운에 가까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다.

‘몸에 축적하는 자연기가 순수해질수록 강해질 거야.’

정체 모를 야수가 불어넣은 자연기는 마른 비의 그것보다 훨씬 순결했다.

불순물이 거의 섞이지 않아서 맑고, 상쾌하며, 깨끗했다.

그래서 그토록 농밀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잊지 않아.’

그 향과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몸으로 기억하고, 머리로 지향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

죽음의 영토 너머로 넘어갔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마른 비는 크게 변모한 스스로를 느꼈다.

내독성이 강화되고, 자연기의 활용에 있어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가장 큰 소득은 ‘진짜 죽음’을 엿보았다는 점이다.

훗날, 마른 비 스스로 숱한 강적들과의 싸움보다도 폭발적인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고 자평하는 경험이, 이곳 애뢰산 독림에서 이루어졌다.

‘정말 보고 싶었는데. 왜 그냥 가버린 거지? 어떤 녀석일까?’

하지만 지금 당장 소년의 관심을 끄는 건 자신을 구해준 짐승의 정체였다.

‘아우우! 궁금해 미치겠네…!’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면.

아니, 고개를 옆으로 돌릴 힘만 있었다면.

그랬다면 어떤 녀석인지 보았을 텐데.

격하게 뛰던 심장 소리.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도 뇌리를 찌르르 울리던 강렬한 감각.

낯설기는커녕 친숙하게 다가온, 따스한 존재감.

세상 하나뿐인 자신의 짝이 분명했다.

‘다음에 보면 꼭…… 응?!’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마른 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사나운 수준을 넘어 자신을 찢어발길 듯 엄습하는 흉악한 적의!

‘그 노인!’

“카아아압!”

나무판자 위에 몸을 실은 설지굉이 죽일 듯이 노려보며 날아오고 있었다.

‘어? 늪?! 저긴 아마…!’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자신이 늪의 가장자리를 향해 본능적으로 이동했던 이유.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과 사위를 뒤덮는 어둠이 죽음처럼 내려앉은 그곳.

판자를 탄 설지굉이 늪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찰나!

푸화하학!

늪의 표면을 뚫고 장대한 그림자가 솟았다.

피 칠갑을 한 듯 새빨간 몸통의 우둘투둘한 피부 위로, 피보다 붉은 점액이 땀방울처럼 흘러내린다.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끈적끈적한 점액은 만지기만 해도 중독되는 맹독을 함유하고 있었다.

뒤룩뒤룩 구르는 징그러운 눈동자가 자신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겁 없는 인간을 포착했다.

“헛?!”

바로 늪으로 뛰어든 설지굉이 이곳의 특성에 대해 알 리 없다.

검은 늪에서 영역의 크기는 곧 힘의 크기.

내로라하는 독물들이 늪 가장자리의 땅을 자잘하게 나눠 먹으며 살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

독림의 제왕 적섬여(赤蟾蜍)가 늪 표면에 바짝 붙어 날고 있던 설지굉을 덮쳤다.

‘붉은 두꺼비! 뭐가 저렇게 커?!’

마른 비도 깜짝 놀랐다.

은빛 여우가 담당했던 또 다른 아이.

응목대에게 다리를 잘리고 죽어간 돌개바람을 중독시켰던 그 적섬여다.

하지만 생김새만 같을 뿐, 저놈은 기형적으로 성장한 무언가다.

일반적인 적섬여는 인간 손바닥 정도의 크기니까.

놈의 쩍 벌린 입은 저 악명 높은 이해 부근 늪지대의 제왕, 거악(巨鰐)의 아가리에 비견할 만큼 거대했다.

피윳-!

작은 소음과 함께 튀어 나간 혀.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징그러운 그것이, 그제야 뒤를 돌아본 설지굉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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