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어느덧 검은 숲이 끝나 있었다.
‘빛이야!’
암흑으로 뒤덮인 굴을 지나, 드디어 저 멀리 위치한 출구를 발견한 것처럼.
시커먼 숲의 어둠 속에서 마른 비가 속으로 환호했다.
‘어두운 건 이제 지겨워.’
도주에는 용이하다지만 본디 어둠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비릿한 독 내음이 공기를 적시는 걸 넘어 지형지물 자체에 배어버린 숲이다.
때마침 나타난 독림 덕분에 추격자들을 떼어놓을 수 있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이 숲이 끝나길 바라는 건 설검대뿐만이 아니었다.
더욱 빨라진 걸음으로 나무들의 틈을 헤친 소년이 독림의 끝자락에 섰다.
화아악―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꽉 막힌 지형에 익숙해졌는지, 급격히 열리며 다가드는 시야가 너무도 낯설다.
내리쬐는 태양빛이 어둠에 적응한 동공에 아릿한 통증을 유발했다.
껌뻑, 껌뻑.
겨우 망막을 빛에 적응시켰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건 새파란 하늘이었다.
고작 한나절 가량이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밟았던 고된 시간이 아니었나.
정오에 가까워졌는지 청명한 하늘 한복판에서 만물을 비추는 해가 그토록 반가울 수 없었다.
다음으로 반가운 건 맑은 공기다.
고대의 원시림이 뿜어내는 청정한 공기가 대자연의 활력을 품고 마른 비의 폐부로 스며들었다.
“후아― 이제 좀 살겠다!”
그제야 눈을 내려 지형을 훑고, 나아갈 경로를 확인한다.
“……이런.”
소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개활지…!”
넓게 탁 트인 지형이다.
무더운 기후를 반영하듯 상록 활엽수가 만개한 거목들이 군데군데 서 있지만, 달리는 진로와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다.
도주 시에 지형의 이점을 살릴 수가 없는 곳이었다.
‘난감한데.’
이런 곳에선 그저 빠르게 달리는 방법뿐이다.
설검대라면 모를까, 노인을 떼어놓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지형이었다.
쏴아아아―
‘이 소린?’
소리의 진원은 개활지를 가로질러, 저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너머다.
그리고 무언가가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소린 아마도…….
‘폭포야!’
소리의 크기로 짐작건대 규모도 상당한 게 틀림없다.
지형의 구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지만, 도망이건 싸움이건 간에 최소한 이 개활지보다는 나을 거다.
전력으로 치달려서 이 지역을 벗어나야만 한다.
마른 비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카아압!”
거센 기합이 터져 나오자 숲의 끝자락이 잘렸다.
풀어헤친 백발이 휘날리고, 살기등등한 회색빛 눈동자가 수축하며 빛에 빠르게 적응했다.
상의는 진작 내버린 지 오래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하의마저 곳곳이 찢어지고 녹아내려 겨우 민망한 부위를 가려주고 있었다.
‘으음.’
햇살이 닿자 두꺼비의 위산과 독에 상한 피부가 쓰라렸다.
마른 비가 늪에서 확인했을 때와 달리 옅은 보라색을 띠었던 설지굉의 피부는 제 색깔을 찾았는데, 왼손 한쪽만 진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독기를 한 곳에 몰아넣는 게 고작이다. 도저히 없앨 수가 없어. 정말이지 지독한 맹독이군.’
기형 적섬여의 독은 내력으로 소멸시킬 수 있는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와족과 같이 독에 대한 저항력이 없는 체질이면서 오로지 내공만으로 중독을 막고 있다는 것.
절정의 끝자락에 서서 한끝 차이 때문에 그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노인은 내공의 심후함과 조율에 있어서도 큰소리칠 만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개활지!’
아주 좋다.
여기라면 짜증나는 지형과 동식물에 방해받지 않고 꼬마를 쫓을 수 있다.
박쥐 떼도 끔찍했지만, 미끌미끌하고 끈적거리는 데다 역겨운 냄새가 속을 뒤집는 두꺼비의 위장 구경 따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감지되는 기운으로 보아 당장 이 부근에서 꼬마가 활용할 만한 짐승은 없는 게 확실했다.
‘어디냐!’
탁 트인 시야 저 멀리, 이쪽을 힐끔 돌아보며 내빼고 있는 야만인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설지굉의 눈에 불꽃이 튀고, 입가엔 살소(殺笑)가 걸렸다.
“빌어먹을 꼬맹이! 네 운도 여기까지로구나!”
여기까진 어찌 어찌 도망 왔지만, 꼬마의 천운은 다했다.
놓치려야 놓칠 수가 없는 지형이었다.
지겨운 추격전의 끝을 예감한 설지굉이 경쾌하게 날아올랐다.
쐐액! 쐐애액!
내달리는 두 개의 인영이 바람을 가른다.
거리를 벌리려는 자와 좁히려는 자.
안타깝게도 내력과 주력의 우위는 추격자에게 있었다.
몇날 며칠을 집요하게 쫓은 끝에, 설지굉은 드디어 마른 비의 턱밑까지 따라붙고야 말았다.
“목을 내밀어라! 꼬맹아!”
무더운 운남 땅 한복판에 잿빛의 눈이 내린다.
지금의 설지굉을 있게 한 독문 검법 회설검(灰雪劍)이 열두 갈래의 잿빛 궤적을 남기며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큭!”
응전해야 한다.
응전할 수밖에 없다.
적보다 뜀박질이 느린 마당에 계속 등을 보였다가는 아무것도 못 하고 산 채로 쪼개지고 말 터!
반전한 마른 비의 몸이 환영을 그리듯 흩어지기 시작하고, 너울너울 춤추는 낙엽이 엄습하는 적의를 비켜낸다.
“어디서 이따위 개수작을!”
보는 순간 알겠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두 발을 축으로 신체의 무게 중심을 쉼 없이 이동시킨다.
아래로부터 전달된 움직임이 전신으로 확산되니, 꼬마의 몸은 낙엽의 예측하기 힘든 동선을 그려내고 있었다.
‘발목을 잘라버려도 되겠지만.’
결국 움직임의 근원은 지면을 딛고 있는 발이다.
하단을 베려하면 도약을 하거나 다른 수단을 취하겠지.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설검대원들이야 실체를 잡아내기 힘들겠지만, 자신은 할 수 있다.
설익은 회피기 따위 정면에서 부숴 주리라.
“카핫!”
내리꽂히던 열두 갈래 검로의 궤적이 일시에 돌변하고, 마른 비가 움직일 경로를 한 발 앞서 차단한다.
운신의 폭이 좁아지니 제아무리 어지러운 변화라도 머물 곳은 한정되기 마련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낙엽 가누기를!’
독안에 든 쥐가 되어버린 마른 비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르고, 그 표정을 즐기듯 설지굉이 천천히 내뱉었다.
“크흐흐, 팔부터 가볼까.”
인질로 쓸 생각 따위 접은 지 오래다.
하지만 곱게 죽이진 않는다.
누차 다짐했듯 사지부터 떼어내고 시작하리라.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소년은 차라리 죽여 달라고 수도 없이 부르짖게 될 것이다.
패애액!
삼대 제자들의 투검에 맞아 아직까지 불편해 보이는 왼팔부터.
수직으로 내리긋는 쾌검이 마른 비의 어깨를 노렸다.
‘이건… 못 피해!’
찰나의 판단.
대리에서 세 명에게 합공을 당했을 때, 마른 비는 이미 팔 하나를 포기할 각오를 했었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거라면 깔끔하게 내준다.
결심은 빨랐고, 결단은 단호했으며, 행동은 민첩했다.
마른 비는 회피를 포기한 채 전진했다.
‘올빼미 사냥, 강습.’
최속의 일격이며, 최선의 승부수다.
맞추기 어려운 얼굴은 노리지 않는다.
가장 면적이 큰 몸통의 정중앙.
팔을 내주는 대신, 아니, 궤도를 수정해 머리를 찍어오더라도 적의 가슴을 꿰뚫고야 만다.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소년의 판단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과감한 일격이 쏘아졌다.
‘이, 이놈이?!’
강호에서 수십 년을 구른 무인이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반격을 쳐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말이 좋아 동귀어진이지, 그건 단순한 결단이나 판단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공이란 결국 나를 위협하는 외부의 억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며, 그렇기에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이성은 어차피 죽을 테니 손을 뻗자고 말해도, 단련한 육신과 생존을 향한 본능은 만에 하나 벌어질 기적을 갈구하며 위험에서 몸을 빼내려 한다.
‘이 꼬마…!’
죽음을 직시해 본 자만이 이런 용기를 낼 수 있다.
아니면 하늘이 내린 승부사의 기질을 타고나야 한다.
전자도 후자도 아니라면, 이성을 마비시킬 전장의 광기가 본능마저 잠식해야 한다.
‘저 눈.’
맑다.
광기가 아니다.
침착하다.
승부사의 기질이다.
활활 타오른다.
용기였다.
저 나이에 이런 결단과 실행.
자신에게 창피를 줬던, 당가 역사상 최고의 기재라는 애송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일신에 축적한 힘의 강약을 떠나 인간 자체가 지닌, 타고난 그릇의 문제였다.
‘빌어먹을!’
목숨을 걸고 내딛은 마른 비의 한걸음은 둘 사이의 거리를 지웠다.
아직까진 농익은 설지굉의 무력이 이제 막 싸움에 눈뜬 마른 비의 그것을 압도한다 하나, 피해 없이 상대만을 격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른 비를 죽이면.
높은 확률로 설지굉도 죽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몸을 빼는 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쪽일 수밖에 없었다.
“카아악! 빌어 처먹을 꼬맹이가!”
내리긋던 검을 회수한 설지굉이 마른 비의 사정권에서 몸을 빼냈다.
‘물러섰어!’
또다시 선택의 기로다.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조금이라도 벌릴 것인가.
강대한 적의 품 안으로 파고들 것인가.
절대 다수는 당연히 전자를 택한다.
적은 경각심을 품은 상태고, 나보다 월등히 강하다.
물러섬이 옳다.
그리고 원래 목표했던 언덕 너머로 한 발자국이라도 뛰는 게 당연하다.
세상은 그들을 범인(凡人)이라 말한다.
‘들어간다!’
적어도 생존과 전투에 있어 소년은 천재라 불리는 범주에 속할 재능을 타고났고,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탁월했다.
전진한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본능에 이끌린 마른 비의 신형은 이미 노인의 품 안으로 바싹 파고들고 있었다.
‘또 들어온다고?!’
도주하는 녀석을 따라잡을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녀석이, 도망을 치기는커녕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되려 짓쳐오다니?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설지굉조차도 예상치 못한 한 수였다.
‘뭐 이런 녀석이…!’
설지굉이 경공을 펼치려던 발을 멈추고 움찔했을 때, 마른 비의 다리는 솔잎을 털어내는 나무꾼의 도끼질을 구현하고 있었다.
빠바바바박!
불꽃처럼 터져나간 발차기 연격이 설지굉의 하단을 휩쓴다.
허를 찌른 한 수였다.
쓰러짐이 옳다.
하지만.
‘막을 줄 알았어!’
검에 일생을 바쳤지만, 검만 다룰 줄 아는 건 아니다.
제자리에서 펼친 답회보가 마른 비의 발차기를 현란하게 흘리고, 미처 피하지 못한 일격은 회설각(灰雪脚)으로 마주쳐간다.
솔잎 털기 대 회설각.
인간의 허리에도 못 미치는 저공에서 다리들이 쉴 새 없이 맞부딪히며 뼈와 뼈가 부딪히는 둔탁한 충돌음을 울렸다.
‘윽! 크윽! 무슨 놈의 다리가…!’
검을 다루는 조예에는 한참을 못 미친다 하나, 검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는 독문 각법이다.
속도, 변화, 힘.
모든 면에서 밀린다.
무엇보다 저 강도!
내공을 둘러친 정강이가 으깨질 듯한 통증을 호소했다.
‘이게… 철골인가!’
철골, 강피, 야수 제어.
그저 헛소리로 치부했던, 30년 전 전쟁의 생존자들 이야기를 이제는 믿는다.
애송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십 대 중반의 꼬맹이 하나 때문에 이 무슨 생난리란 말인가.
더 부딪혔다간 이쪽만 손해를 볼 게 뻔하다.
마른 비의 솔잎 털기를 가까스로 상쇄한 설지굉이 또다시 전권에서 한 발짝을 물러났다.
스르륵―
적의 후퇴는 곧 기회다.
연이은 몰아침으로 뚜렷한 확신을 얻었다.
지체 없이 발동한 구름 걷기가 소년의 두 발을 유유한 궤적으로 인도하고, 물러서는 노인에게 반격의 틈조차 주지 않은 채 따라붙었다.
‘또, 또?! 이 어린놈의 새끼가 아주 날 호구로 보는구나!’
한데 이 간격은?
지나치게 가깝다.
마른 비가 도달한 곳은 서로 간의 거리가 지워질 만큼 바싹 붙은, 설지굉의 발 앞이었다.
누군가 물러서지 않는다면 검을 휘두를 공간은 물론이거니와 주먹을 뻗을 거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애송이가 서두르다 간격을 잘못 잡은…!’
아니다.
웅크리듯 주저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은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무언가 온다!’
셀 수 없는 싸움터를 헤쳐 나온 노장의 감각이 위기를 감지했을 때, 수직으로 도약한 마른 비가 다섯 줄기의 섬광을 뻗어냈다.
‘잡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