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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80화 (80/463)

80화

목숨을 건 마른 비의 전진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켰다.

낭심, 단전, 명치, 목젖, 인중.

오로지 인간을 부수기 위해 창안된 필살의 기예, 중선오격이 햇살을 쪼갰다.

‘위로 도약하며 내뻗는 발차기 연격!’

급소를 훑는 시선.

엄습하는 기운의 흐름.

그리고 독특한 자세.

처음 접하지만, 보는 순간 알겠다.

육십여 년 간 아수라장을 헤쳐 온 노장의 통찰력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소년의 움직임에서 다가올 공격을 읽어냈다.

‘이 꼬마가 조금만 더 노련했다면.’

그랬다면, 투로를 내비치는 실수 따위 하지 않았을 거다.

제아무리 하늘이 내린 기재일지라도 부족한 경험에서 묻어나는 미숙함은 타고난 재능만으로 메울 수 없는 시간의 영역이다.

무사히 성장을 마쳤다면 천하를 떨쳐 울렸을 재능이지만,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스러져 간 천재가 그 얼마던가.

타고난 그릇이 하해와 같더라도 세월이 선사한 노련함이 모자란 이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설픔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성장하기 전에 만나서 다행이군.’

잠재력으로 미루어 볼 때 남들의 몇 배에 달하는 속도로 그릇을 채워갈 테고, 머지않아 감당키 힘든 괴물이 될 거다.

기필코 이 자리에서 싹을 잘라야 한다는 위기감이 설지굉의 뇌리를 채웠다.

또한 이 꼬마가 일생을 통틀어 몇 안 되는 적수 중에 하나로 기억될 것임을 깨달았다.

‘정확한 타점은 알 수 없어. 다만 신체 중앙의 급소를 노린다는 건 확실해. 그리고 수직으로 치고 올라온다!’

검을 비껴든다.

횡으로 눕힌 검을 단전 아래 위치시키고, 독 때문에 불편한 왼손까지 거들어 방어를 굳히니, 마른 비가 뻗은 오른발은 참수대로 자진해서 목을 들이미는 사형수와 같았다.

‘엇! 어떻게 안 거지?!’

그대로 강행하면 발목이 깔끔하게 잘려나갈 터다.

깜짝 놀란 마른 비는 차올린 발을 급격히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큭!”

큰 기술인만큼 실패했을 때의 반동도 크다.

자세가 무너진 소년은 공중에서 휘청댔고, 터져나가다가 강제로 멈춰진 자연기는 몸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

‘완벽했는데 왜? 읽힌 건가?!’

이 역시 부족한 경험에서 비롯된 실수다.

지나간 악수(惡手)를 되짚기보다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을 궁리했어야 했다.

그랬어도 이번만큼은 달라질 게 없었겠지만.

“썩을 꼬맹이. 실로 대단했다.”

투로를 예측하고 한발 앞서 검을 위치시키는 것만으로 마른 비가 준비한 회심의 일격을 무산시킨 설지굉이다.

허공에서 주춤한 소년의 복부에 통렬한 회설각 일격이 꽂혔다.

뻐어억!

“아악!”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은 마른 비의 몸이 새우처럼 굽었다.

검을 쏘아낼 준비를 마친 설지굉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엎어진 마른 비를 내려다봤다.

“그 나이에 이 설지굉을 이토록 애먹이다니……. 천재라는 족속들을 무수히 보았지만, 너 같은 꼬마는 본 적이 없다. 네놈을 인정한다. 원래는 곱게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깔끔한 죽음을 내려주마.”

앞서 마주친 순간들이 야수 제어와 지형지물을 이용한 도주였다면, 이번만큼은 순수한 무력으로 맞붙은 싸움이었다.

처음 제대로 마른 비와 검을 섞으며, 설지굉은 분노와 짜증뿐이던 심중에 또 한 가지 감정이 끼어드는 걸 느꼈다.

무(武)에 살아가는 자로서 걸출한 적수에게 보내는 경의.

그것은 남들이 있어 보이기 위해서라도 입에 담는 대의 따위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노인의 고집이기도 했다.

무와 자존심.

오로지 그 두 개 뿐인 인생이다.

눈에 차지 않는 상대는 인간 취급도 하지 않으나, 눈높이를 충족시키는 상대에겐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준다.

마른 비의 출중함을 피부로 느낀 노인은 고문에 가까운 징벌을 내리려던 결심을 철회했다.

‘빠르게 목숨을 취하는 것으로 설검대의 복수를 끝낸다.’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든 자에겐 아낌없는 보상을.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게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오만한 성정과 지독한 언행 때문에 정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난을 듣는 설지굉을 설검대가 따르는 이유였다.

“잘 가거라.”

노인은 작별을 고했고, 소년은 또 한 번 죽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스륵-

움찔대는 몸을 억누르며 기회만 엿보던 청년은 지체 없이 떨어져 내렸다.

대리로 향하던 중 마른 비를 뒤쫓는 설검대를 발견하고, 몸을 숨긴 채 설지굉의 뒤를 밟은 검은 그림자.

쐐애액―!

고목 위에서 미끄러진 검은 수리의 발톱이 공기를 찢었다.

“아니?!”

검을 쏘아낸 순간 난데없이 다가든 급습!

소년을 베는 것보다 목숨을 구하는 게 먼저였다.

“어디서 이따위 시답잖은!”

패액! 쒸아악!

궤도를 비튼 설지굉의 검이 정수리를 찍어오는 암습자를 향해 직각으로 꺾이며 솟구쳤다.

“흡…!”

통하지 않을 줄 알았다.

뒤를 쫓는 내내 세세하게 관찰한 한족의 노인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휘리릭―

내리찍던 발을 끌어당기며, 그 반동으로 몸을 끌어올린다.

회전하는 사내의 발밑으로 새하얀 검이 허공을 긋고 지나가고, 몸을 바싹 낮춘 채 대기하던 한 마리 짐승은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솟아올랐다.

“큭! 이건 또 뭐냐!”

스팟-!

은빛 궤적이 얼굴을 노리며 치달았으나, 설지굉은 그마저 허리를 꺾어 피해냈다.

‘역시 안 통하나!’

외부에서 흘러들어왔음에도 두 명의 대장로와 장문인에 이어 현 점창파 최고수 중의 하나로 꼽히는 설지굉이다.

평생토록 강호를 전전하며 사천과 귀주에서 이름을 날렸던 노인은 징그러울 만큼 만만찮았다.

『정면으론 못 이긴다! 지금뿐이야! 움직여라, 비아야!』

언령이 바람을 가르고, 배를 움켜쥔 채 쓰러져 있던 소년을 재촉한다.

‘누구?’

확인할 겨를도 없다.

삶을 구할 절호의 기회!

복부를 저미는 격통에 신음하면서도 마른 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아앗!”

기합으로 고통을 날린다.

웅크린 자세 그대로 설지굉을 향해 몸을 내던진 마른 비의 손이 땅을 짚었다.

치솟는 오른발.

지면에 바짝 붙어 펼치는 날짐승 떨구기가 설지굉의 안면을 노렸다.

“타앗!”

보고만 있을 리 없다.

허공에서 검을 피했던 사내 또한 두 발을 번갈아 내리찍고 있었다.

상하에서 엄습하는 청년과 소년의 연계가 설지굉을 매섭게 덮쳤다.

“이것들이!”

채채채채챙!

검면(劍面)을 세워 머리 위에서 내리꽂히는 족격을 모조리 차단한다.

급격히 고개를 틀자 아래로부터 솟구친 발차기가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하나가 더 있다!’

“캬앙!”

재차 달려든 짐승의 발톱과 이빨마저 상체를 비틀어 피해낸다.

‘빌어먹을! 셋이 달려들어도!’

예상은 했지만 암담할 따름이다.

정공으로는 노인을 몰아세울 수 없다.

마른 비의 공세가 통했던 것은 허를 찌른 결단 덕분이었다.

회피와 방어를 병행하며 침착하게 응수하는 노인은 허물 수 없는 방벽과 같았다.

청년의 눈에 암담함이 내려앉는 찰나, 노인을 몰아붙였던 소년이 또 한번 활로를 열어젖혔다.

빡!

그것은 가벼우면서도 간결한 타격이었다.

“커헙…!”

하지만 효과는 컸다.

물구나무를 서듯 거꾸로 오른발을 차올린 마른 비는 날짐승 떨구기를 적중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왼발이 검을 들지 않은 설지굉의 왼손을 저격한 순간, 무얼 해도 쓰러지지 않을 것만 같던 노인이 사시나무 떨 듯 부들대기 시작했다.

‘고작 저 정도로 왜? 아…!’

소멸시킬 수 없어서 한데 몰아두었던 독기가 미쳐 날뛴다.

외부에서 가해진 자극은 내공에 억눌려 있던 맹독의 고삐를 풀어헤쳤다.

철창이 흔들리자 유폐되어 있던 수형자들이 탈옥하여 내달리기 시작했다.

손을 넘어 팔뚝으로.

팔뚝을 건너 어깨로.

설지굉의 왼팔 전체가 기괴한 보랏빛으로 물드는 건 한순간이었다.

“카악!”

검을 크게 휘둘러 두 명의 인간과 한 마리 짐승을 물러나게 한 설지굉이 어깨를 움켜쥐었다.

연이은 질주와 전투.

검은 숲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독물과 나무를 통째로 베어내며 이룩한 돌파.

마른 비를 서둘러 잡겠다는 일념 하에 내력 소모를 계속한 결과, 일 갑자에 달하는 설지굉의 내공도 드디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날뛰는 독기를 제압하기 위해 기운을 밀어 넣는 설지굉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형이 왜 여기서 나와요?”

그제야 목숨을 구해준 조력자를 확인한 마른 비는 반가움과 혼란이 뒤엉킨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애뢰산 깊은 산중에서, 그것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때에 이 남자를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기가 막힌 시점에 등장한 구원자.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듯, 청년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제 짝의 탐스러운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은빛 여우와 실바람을, 마른 비는 그저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성년식을 떠났을 때부터 계속 지켜봤다.”

“네? 계속요?”

“그래. 계속.”

날뛰는 독기에 애를 먹으면서도, 설지굉은 마른 비를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도주로가 있는 언덕 쪽을 가로막았다.

참으로 지독한 노인네란 생각을 하며, 은빛 여우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잠깐 눈을 뗀 사이 쫓기고 있더구나.”

“아… 그게…….”

“대리로 들어간 건 멍청한 짓이었어. 거긴 점창파의 세력권이다. 놈들은 예전에 우리와 전쟁을 벌였던 사이고.”

“네. 이젠 알아요. 고마워요, 형. 덕분에 살았어. 근데 계속 지켜봤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성년식을 떠난 모든 아이들을 몰래 뒤따르며 지켜본다. 설령 죽더라도 개입하지 않을 뿐. 안 그러면 어떻게 시체들을 수습해서 영묘에 안치시킬 수 있겠느냐.”

“아… 그런…! 전혀 몰랐어요. 그보다, 형! 전쟁이 벌어졌다던데 어떻게 된 거죠? 상황을 아세요?”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여기로 오는 길에 운남 각지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마을이 습격당했다는 내용까지 확인했을 뿐이야.”

“마을이…!”

놀라는 마른 비를 힐끗 본 은빛 여우가 설지굉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전사들이 문산에서 집결한 것 같다. 족장님과 할아범의 성격상 창산을 향해 최단 거리로 치고 올라올 거야. 표식이 남겨진 날짜로 짐작건대 거의 당도할 때가 되었다.』

자신이 정신없이 도망치는 중에도 전쟁은 진행 중이었고, 주전장은 창산이 될 모양이었다.

마른 비의 얼굴이 한층 심각해졌다.

‘돌개바람을 잃은 것만으로도 충분해. 비아는 기필코 살린다!’

대화를 주고받는 내내 탈출로를 모색하던 은빛 여우가 각오를 다졌다.

“길게 말할 시간이 없다. 저자가 멈춰있는 지금이 기회야. 뛰자!”

정면은 막혔다.

독기 때문에 주춤한 상태지만, 돌파하려들면 목숨을 걸고 저지할 거다.

기운을 소진했다 해도 저 정도 독기로 노인이 쓰러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곧 들이닥칠 적들이 문제였다.

시간은 결코 마른 비와 은빛 여우의 편이 아니었다.

“옆으로!”

애뢰산의 심처로 들어가려는 계획을 수정한다.

우회하여 활로를 찾아야 했다.

어디든 간에 시야가 탁 트이고 몸을 숨길 곳이 없는 여기보단 나을 테니까.

은빛 여우와 마른 비가 움치고 뛰려는 순간, 분노를 눌러 담은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이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개뼈다귀냐? 와족의 전사인가?”

쉬악-! 쉬아악―!

‘어떻게 벌써?!’

바람처럼 날아든 수십의 그림자가 사방을 에워싼다.

늪지대를 우회했던 설검대가 어느새 당도하여 마른 비와 은빛 여우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왜? 우리가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서 놀랐나?”

‘아! 길을…!’

그저 마른 비를 서둘러 쫓으려는 심산인 줄만 알았다.

노인이 무리해서 검은 숲에 길을 낸 것은 뒤따르는 수하들의 이동을 도우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거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숲을 주파한 설검대는 설지굉이 안배한 치명적인 덫이 되어 마른 비와 은빛 여우를 옭아맸다.

‘낭패다…!’

어디도.

어느 곳도 돌파할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 추격을 시작했을 때와 달리 설검대는 대단히 위험한 짐승을 사냥하듯 마른 비를 대하고 있었다.

만전을 기한 설검대의 포위진이 한 발 한 발 거리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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