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저 독물들의 서식지를 통과하며… 또다시 넷을 잃었다. 살아나갈 생각을 버려라. 절대 놓치지 않는다.”
꼬마 하나를 잡는 과정에서 백이 넘는 동료들이 차가운 땅에 몸을 누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설검대 생존자들의 눈빛이 사나워지고, 야수가 그르렁 대는 것 같은 음성이 진득하게 깔렸다.
쓸데없이 말을 길게 섞어 머리 굴릴 틈 따위 주지 않는다.
설지굉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6조장이 명령을 내렸다.
“쳐랏!”
하지만 마른 비와 은빛 여우가 설검대의 이른 등장을 예측하지 못했듯, 설검대도 간과한 존재가 있었다.
분노를 갈아 넣은 검들이 터져 나가려는 찰나, 우렁찬 포효가 개활지를 덮쳤다.
“쿠어어어엉!”
분노?
우르르 몰려다니며 하나를 핍박하는 치졸한 것들이?
들개 무리나 다름없는 나약한 것들이 감히 이 몸을 물러서게 해?
번쩍이는 외눈이 야수의 샛노란 광기를 토하고, 휘둘러진 앞발이 푸른 대자연의 기운을 발산한다.
피의 복수를 위해 검은 숲을 우회한 거수가 오십여 개의 검을 등판에 꽂은 채 설검대의 배후를 덮쳤다.
푸화하학!
“끄아아악!”
“파, 팔! 내 파아알!”
방어? 가능할 리 없다.
역사(力士)가 휘두르는 대부(大斧)를 아득히 능가하는 무게와 강도, 그리고 날카로움.
자연기를 흠뻑 머금은 흉웅의 앞발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깨부수는 신장의 철추와 같았다.
비산하는 핏물이 햇살을 어지럽히고, 바스러진 뼈와 터져 나온 내장이 애뢰산의 발목을 데웠다.
“저, 저 짐승이 또…!”
손목 아래까지 독을 밀어낼 여력이 없다.
독기가 어깨를 넘지만 못하도록 조치한 설지굉이 눈을 부릅뜨고 마른 비를 노려봤다.
‘저 꼬마가 괴수를 불렀구나!’
여전히 설지굉은 마른 비의 야수 제어 때문에 흉웅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거라고 오인하고 있었다.
불과 한 시진 전에 백오십 명이 덤벼들었음에도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몰살당한 기억은 그들에게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자, 장로님! 이… 이걸 어떻게…!”
심장을 옥죄는 압도적인 공포는 타오르는 분노마저 차갑게 식힌다.
생존을 향한 본능은 복수라는 부차적 감정을 삽시간에 잡아먹었다.
설검대는 검을 들어 올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죽어가는 동료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후, 후…!”
후퇴하란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다 잡다 못해 이미 손에 쥔 물고기를 내려놓아야만 하는가.
와족 꼬맹이를 공격하는 순간, 저 괴수는 더욱 거세게 달려들 거다.
자신이 아니면 짐승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는 무인이 없는데, 단전의 내력은 바닥을 친 상태였다.
‘지칠 대로 지친 설검대 육십여 명. 몇몇을 미끼로 내던지고 나머지가 달려들면 꼬마를 죽일 수야 있겠지만… 그 후엔 이쪽도 전멸한다.’
한 방.
지금 상태론 괴수의 공격을 한 방만 허용해도 갈가리 찢긴다.
자신조차 그럴진대 설검대가 버텨낼 리 없다.
점창의 장로와 설검대 잔존 인원 전체의 목숨.
꼬마 하나와 새파란 청년 하나로 구성된 와족 인원 둘.
대어볼 것도 없는 목숨 값이다.
후퇴를 명하는 게 옳다.
“전원…!”
후퇴하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 마른 비와 은빛 여우의 대화가 설지굉을 멈춰 세웠다.
“형! 흉웅이…!”
“그래. 구사일생이다. 살다 살다 저놈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흉웅 쪽으로 빠져나간다. 놈에게 붙지 않게 조심해라!”
예기치 못한 구원에 놀랐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말을 거르지 못했다.
무엇보다 마른 비와 은빛 여우는 고작 이 정도 대화로 설지굉이 실상을 알아챌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 짐승의 등장에 꼬맹이가 놀랐어?’
소년이 맹수를 부른 게 아니다.
‘살다 살다? 원래는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인가?’
야수 제어라는 기예로 부릴 수 있는 놈이 아니다.
놈들은 우연에 가깝게 상황에 편승한 거다.
‘놈? 붙지 않게 조심해?’
확실하다.
이 정도 영수를 수족으로 부릴 만큼 가깝다면 ‘놈’이라는 거리감 있는 표현을 쓸 리 없다.
무엇보다 붙지 않게 조심하라는 경고.
다가가면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단 뜻이었다.
‘속았단 말인가!’
괴수가 설검대를 덮칠 때, 꼬맹이는 너희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니 힘내라는 듯 얄밉게 웃으며 사라졌다.
감쪽같이 속았다.
빌어먹을 꼬맹이의 연기에 멋지게 속아 넘어갔던 거다.
순식간에 진실을 추려낸 설지굉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솟았다.
‘와족 꼬맹이와 괴수가 한편이 아니다? 그렇다면!’
해볼 만하다.
아까 한판 붙는 바람에 괴수가 설검대만을 노리고 있지만, 같은 편이 아니라면 꼬맹이를 공격한다 해도 도울 리 없다.
괴수를 따로 떼어놓을 수만 있다면, 와족 족장의 아들과 청년 전사를 이 자리에서 척살하는 게 가능하단 뜻이었다.
두 놈을 죽인 후에.
경공을 펼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빌어먹을 산을 벗어나면 된다.
설지굉의 눈빛이 번쩍였다.
“설검대는 들어라!”
쩌렁 내지른 고함이 좌중의 이목을 끌었다.
흉웅도 너 거기 있었냐는 듯 설지굉을 쳐다봤다.
“포위를 풀지 말고 와족 놈들의 멱을 따라! 저 짐승은 내가 잡아둘 것이야!”
“자, 장로님! 괴수가 꼬마를 도우면…!”
“돕지 않는다! 저 곰은 꼬맹이를 돕지 않아! 잔말 말고 움직여라!”
자신 밖에 없다.
저 괴수를 잡아둘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와족 놈들을 때려잡는 건 설검대만으로도 충분하다.
‘남은 힘을!’
내공을 있는 대로 때려 부은 검이 회색 검기로 활활 타오른다.
설지굉의 손에서 잿빛 살의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카압! 회설비검(灰雪飛劍)!”
파아앙!
의지, 그리고 진기.
한 자루 검에 불어넣은 내공을 원격으로 절묘하게 다스리니, 그것은 곧 주인의 의지를 받들어 허공을 가르는 비검이라.
세인들의 환상을 자극하는 이기어검(以氣御劍)과는 위력에 큰 차이가 있지만, 기로써 검을 뜻대로 부린다는 점에서 두말할 나위 없는 어검의 경지가 분명했다.
강맹한 기운을 담은 잿빛 검이 공간을 압축하며 흉웅의 외눈을 꿰뚫기 위해 쏘아졌다.
“쿠엉!”
날벌레를 쳐내듯 흉웅의 앞발이 검을 쳐냈다.
아니, 쳐내려 했다.
“캇!”
퀘에엑―!
검을 조종하는 실이라도 달린 걸까?
맞다. 실이다.
눈에는 잡히지 않는 한 가닥 내공의 실이 검과 검주(劍主)를 잇는다.
허공에서 급선회한 검이 강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흉웅의 앞발을 타고 올랐다.
퍼억!
날붙이가 가죽과 살을 파헤치는 소리는 섬뜩했다.
‘막을 줄 알았다.’
숙련된 권사의 방어 초식처럼.
훙웅은 다른 쪽 앞발을 들어 눈을 찍어오는 검을 막았다.
“꾸우우웅…!”
피가 흐르고, 꿰뚫린 앞발에서 통증이 밀려온다.
하마터면 하나 남은 눈마저 잃을 뻔했다.
앞발에 힘을 주니 오금(烏金)에 황동(黃銅)을 섞어 만든 검이 엿가락처럼 뚝 부러졌다.
“쿠우웅.”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알아서 멋진 선물까지 안겨주니 눈을 떼려야 뗄 수가 없지 않나.
너를 박살 낼 때까지 다른 것엔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흉웅이 설지굉을 똑바로 노려봤다.
“쿠어어어어어엉!”
산중을 뒤흔드는 야수의 외침이 충격파처럼 번지며 그 앞에 선 생명체들을 짓누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과 등줄기를 역행하는 찌릿한 전율은 의지로 억누를 수 있는 영역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공포에 굴복한 설검대원 몇몇이 풀썩 주저앉고, 설지굉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야수의 기세에 익숙한 마른 비와 은빛 여우조차 순간 저릿해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빌어먹을. 눈치까지 더럽게 빠른 노인네구나.”
적들이 흉웅을 마른 비의 아군으로 착각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짧게 주고받은 몇 마디에서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흉웅의 기세에 눌렸던 설검대가 정신을 차리고, 굳었던 신체를 다스리며 이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를 구하러 왔다가 괜히 형까지…….”
적들을 주시하던 마른 비가 말끝을 흐렸다.
활로가 한순간에 막혀버렸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고, 이 이상의 기적을 바라는 건 무리다.
무엇보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팠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네가 내 입장이라면 구하러 오지 않았겠냐. 징계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대리로 들어가는 너를 말렸어야 했어. 내 탓이다.”
아니다.
기본적인 지침을 숙지하지 않은 마른 비의 잘못이다.
하지만 전사로서, 형으로서, 그리고 사내로서.
자신이 담당하고 돌보아야 할 아이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잘못을 지적해 죄책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전사라면.
한 살이라도 더 먹은 형이라면.
그리고 불알 두 쪽 달고 태어난 사내라면, 모든 일의 책임은 내가 감당한다.
수장으로서 그믐이 그랬듯.
은빛 여우가 생각하는 남자란 그러했다.
“와야 했고, 내가 오고 싶어 온 것이다. 잡생각하지 말고 집중해라. 모든 감각을 열어서 생존에만 몰두해. 어쩌면… 활로가 열릴지도 모른다.”
“활로… 요?”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기적도 바라기 힘든 상황이다.
대리에서 이곳까지 수백의 적들에게 쫓기면서 한 번도 포기하지 않은 마른 비조차 체념이란 감정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한데 활로라니?
의문 가득한 눈동자가 은빛 여우를 향했다.
『그래. 활로. 그게… 더 끔찍한 사로(死路)가 될지도 모르지만.』
난데없는 언령.
무언가 긴밀히 주고받을 말이 있는 듯했다.
힐끗 올려다본 은빛 여우의 얼굴은 잔뜩 굳어서 복잡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이놈들 때문이지만… 절대로 마주쳐선 안 되는 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절대 마주치면 안 되는?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푸른 눈의 새끼를 죽인 놈. 고르고 고른 검은 수리 전사 여섯을 도주할 틈도 주지 않고 몰살시킨 놈……. 새로이 애뢰산의 산군으로 등극한 놈 말이다.』
『그건… 흉웅이 아니었어요?』
『그럴 리가. 흉웅이 우둔한 땅 부 족장과 싸웠을 때보다 훨씬 강해진 건 틀림없다. 아마 수식어가 붙은 놈들 중에서는 가장 셀 거야. 하지만 아직 고유의 이름을 획득할 정도는 아냐. 저 노인이 그랬듯 흉웅도 나무 꼭대기에 은신한 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시기가 맞지 않아. 전 산군이었던 푸른 눈의 새끼가 죽임을 당한 건 흉웅이 제 영역을 떠나기 전이었다.』
운남의 정세를 모르는 마른 비로서는 추측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흉웅 정도 되는 괴수는 운남 전체를 뒤져도 몇 없었고, 흉웅의 힘에 놀라 당연히 놈이 새로운 왕좌의 주인이라 결론지었었다.
『여기까지 들어선 이상, 우린 이미 놈의 영토에 침입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과거의 단편적인 정보로 유추해 볼 때… 놈은 과할 정도로 부지런하지. 제 앞마당에서 난리를 피운 놈들을 가만둘 리가 없다.』
“뭘 중얼대고 있나?”
공포에 얼어붙었던 육신을 추스른 설검대가 검을 겨눴다.
저 멀리 미친 듯이 날뛰는 거수와, 죽을힘을 다해 회피하며 시간을 끄는 설지굉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시간에 쫓기는 건 설검대도 마찬가지였다.
“활로? 와족 놈들이 너희를 구하러 오기라도 한단 말이냐? 웃기는 소리. 변수는 없다.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라도 치지 않는 한.”
6조장은 독 안에 든 생쥐들의 헛된 기대를 비웃었다.
“기적이나 기도하며 뒈져라! 전원, 한꺼번에 달려든다! 쳐라!”
사방을 빈틈없이 에워싼 설검대가 날아올랐다.
‘끝까지 발악해주마!’
마른 비와 은빛 여우가 결사항전의 투지를 불사르고, 마지막을 예감했는지 실바람의 눈동자에도 결연한 각오가 떠올랐다.
“잊지 마라, 비아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티는 거다!”
“네! 형도 조심해요!”
쉬아악―
양측이 충돌하기 직전.
어떤 낌새와 예고도 없이.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풍경이 횡으로 잘렸다.
후두둑―
살아 있는 인간이 토막 난 나뭇단처럼 무너져 내리는 소리는 너무나 생생했고, 그래서 비현실적이었다.
“……!”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시간이 정지한 듯 몽환적인 풍경 아래.
질식할 듯한 위화감을 자아내며.
‘그것’은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