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크르르…….”
칼도 박히지 않을 것 같은 탄탄한 육체.
대호의 두 배는 될 법한 체구를 뒤덮은 황금빛 털은 눈부셨다.
불규칙적으로 드러나는 검은 줄무늬.
떡 벌어진 어깨와 등 뒤까지 덮인 갈기는 먼 이국의 대지, 백수의 왕이라 칭송받는 사자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수사자의 갈기처럼 본신을 더욱 커 보이게 하는 효과는 없다.
쓸어 넘긴 듯 몸통에 붙은 갈기는 제왕의 위엄보다는 전장을 휘젓는 맹장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너무나 인상적인 외형 하나가 빨아들일 듯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위턱에서부터 휘어져 내려온,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이빨.
광서우의 갑주 같은 외피조차 단번에 꿰뚫을 것 같은 흉악한 송곳니였다.
명장이 공들여 벼린 칼날 같은 한 쌍의 견치가 햇빛을 도려내며 새하얗게 빛났다.
‘어, 어떻게 저놈이…!’
누구보다 놀란 건 마른 비다.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
저 짐승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 호랑이는 송곳니가 왜 이리 길어요?’
‘음? 아, 그놈은 이미 사라진 종이다. 칼이빨 호랑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기형적으로 발달한 두 개의 송곳니가 특징이지. 대단히 난폭하고 강인했다고 들었다.’
추모를 위해 들렀던 영묘의 벽화.
아득한 과거, 최소 수천 년을 헤아리는 고대의 기억들이 각인된 인간 역사의 기록이다.
선조들의 생존을 위협했던 야수 중에는 분명 이놈과 똑같이 생긴 짐승이 존재했었다.
‘오래전에 멸종했다고 들었는데?’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종이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생명체가 눈앞에 실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놈을 알아본 건 마른 비만이 아니었다.
‘그 한량 같은 영감탱이!’
설지굉 또한 저 짐승을 본 적이 있다.
특징만을 뽑아내어 어설프게 그려놓은 그림이 아니라, 실존했다는 증거물로.
‘돈은 썩어나고 인생이 무료한 노인네가 되도 않는 사기를 친 줄만 알았는데…!’
천하는 넓고, 그중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이 넘쳐난다.
차라리 원승, 여휘처럼 협을 부르짖고 다니는 머저리들은 그나마 낫다.
그들은 최소한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는 종자들이니까.
‘뭐라고 했었지? 고고학(考古學)?’
설지굉의 기억이 오래전 조우했던 괴짜 노인을 그렸다.
중원을 양분하는 거상 가문에서 태어난, 더럽게 할 짓 없는 유복한 한량.
중원 7대 기인 중 하나라는 고증자(考證子) 금복인을 바라보는 설지굉의 시선이었다.
그는 현 인류가 더듬지 못하는 고대의 기억, 문자가 없던 까마득한 시절이 궁금하다고 했다.
과거에 이 땅을 누볐던 동식물과 인류의 흔적을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고 했다.
그걸 어떻게 찾겠냐는 세인들의 질문에, 그가 내놓은 답변이 걸작이었다.
“아주 간단하지. 뭐든 나올 때까지 모조리 파헤치면 돼.”
누대에 걸쳐 축적한 만금당(萬金堂)의 금력은 천하 상계의 삼 분의 일을 좌지우지할 정도였고, 그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만한 힘이었다.
그 미친 인간은 수십 년에 걸쳐 헤아릴 수 없는 인부와 학자들을 동원했고, 고대의 흔적이 담긴 유적지를 발굴하고 다녔으며, 결국 존재한 적 없는 학문의 분야를 스스로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고고학이라고 불러라. 되도 않는 전설이나 믿는 아둔한 것들아.”
원의 시대가 열리고, 머나먼 서방 대륙의 다채로운 인종들이 중화를 활발히 오고 가기 시작했다.
개중엔 당연히 학문을 탐구하는 자들도 존재했고, 그들을 통해 알게 된 서방 세계의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은 중원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종교와 신화.
먹물깨나 먹었다는 자들조차 숭배의 대상과 인간 기원에 대한 설정만 다를 뿐, 결국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와 그에 관련된 신비로운 이야기들로 캐낼 수 없는 과거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추상적인 관념과 말의 덩어리일 뿐, 실존을 증명할 어떠한 실체도 없는 허상과 같았다.
그렇기에 그가 지저에서 발굴해낸 고대인들의 흔적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생물들의 화석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무지몽매한 것들아. 형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
기인이라는 평이 아깝지 않은, 골 때리는 인간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보다 어리면 무조건 자기가 형이었다.
“어이, 설지굉이. 칼 좀 쓴다며?”
만금당 사천지부에 자금을 융통하러 간 15년 전이었다.
자신이 방문했단 이야기를 듣고, 마침 지부에 있던 금복인이 휘적휘적 걸어 나오며 대뜸 말을 걸었다.
“뭐 이런 미친…! 나를 아시오? 왜 다짜고짜 반말이지? 죽고 싶소, 선배?”
강호를 전전한 지 수십 년.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 한번 마주친 적 없는 사이였고, 그래서 어이가 없었다.
연상이면 연상이지 언제 봤다고 반말을 지껄이는가.
“이름 알고, 얼굴 봤고. 이제 아네. 너, 나보다 어리잖아? 뭐하면 아우도 말 놔. 편하게 형이라고 부르고. 죽고 싶냐고? 그럴 리가! 죽기 싫어. 죽이지 마.”
“허…….”
너무 기가 막히니 대꾸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 오십에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말하면 만금당이고 뭐고…!”
“오오? 돈 빌리기 싫은가 봐?”
“…….”
심지어 치졸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지닌 패로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인간이었다.
“어디 그따위 돈 몇 푼으로 무인에게…!”
“동생. 여기 만금당이야. 나 이래 봬도 적손이라고. 진짜 칼 뽑으면 피똥 싼다? 서로한테 좋은 이야기니까 한 번만 져주고 일단 따라와 봐. 이자 없이 돈 빌려줄 테니까. 아우가 사천에서 그렇게 유명하다며? 칼질 좀 한다는 무인의 관점에서 듣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사천에서 유명?
칭찬이다.
이자 없이?
좋은 조건이다.
한 번만 져주고?
솔직히 만금당과 척을 지고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 만금당의 적손이 ‘저자세’로 먼저 ‘요청’을 했다.
‘좋아. 까짓거 한 번 가주지.’
안 그래도 중원 7대 기인이라는 자가 궁금하던 참이다.
‘칼 뽑으면 피똥 싼다.’는 말을 애써 뇌리에서 지운 설지굉이 금복인을 따라나섰다.
뒤뜰에 있는 큼지막한 창고에는 대체 이런 걸 왜 모으는지 이해할 수 없는 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얼마 전에 발굴한 놈이야. 이놈을 찾아내고, 여기까지 손상 없이 운반하는 데 꼬박 삼 년이 걸렸지. 삼 년 동안 금 100관(1관=3.75kg)이 들었고.”
“100관? 미친! 이런 정신 나간…!”
욕설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따위 삭아 빠진 뼈를 캐는 데 금 100관을 썼다고?!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아아~ 그만. 나도 알아. 부모 잘 만나서 돈 많은 집에 태어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짓거리 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거. 맞아. 깔끔하게 인정해.”
이런 이야기를 무수히 들어왔는지 광인(狂人)은 선수를 쳤다.
“어릴 때부터 몸에 좋은 영약이란 영약은 다 처먹고 자랐지. 이 나이가 되도록 먹고 살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고 있고.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대에, 오지게 축복받은 인생인 거 맞아. 근데 어떡하나? 그렇게 태어난걸? 마침 하고 싶은 게 있고, 이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어진 걸 감사하게 활용할 뿐이야. 나쁜 짓 안 하고 나름 착실하게 살고 있으니 아우는 걱정 말라고.”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다.
태연하게 인정하니 설지굉은 도리어 말문이 막혔다.
“어이, 아우야. 다 맞춰 놨냐?”
‘벽안(碧眼)?’
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파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칼.
색목인과 한족의 피가 섞인 혼혈이 틀림없었다.
“노사(老師). 매번 말씀드리지만 그 아우라는 호칭, 감당하기 벅찹니다. 이름을 불러주세요.”
오뚝한 코에 하얀 피부.
원의 수도인 대도(大都) 부근만 가도 색목인은 물론이고, 그들의 피가 섞인 혼혈인을 심심찮게 마주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국적인 외모에서 흘러나오는 유창한 한어는 이질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사해는 동도랬다. 하물며 우리 인연이 어디 보통 인연이더냐. 딱딱하게 굴지 말자, 아우야.”
“거의 완성됐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서둘러 손을 놀리는 파란 눈의 청년을 보며, 금복인이 넌지시 말했다.
“금벽파라(金碧波羅)라는 아이지. 저 녀석의 조부가 서방에서 건너와 쿠빌라이 카안에게 총애를 받았어.”
“쿠빌라이에게? 색목인이?”
“그래. 관직에도 올랐는데, 17년간 머물던 원을 떠나 제 나라로 돌아가 버렸지 뭐야. 마지막에 씨를 남겼는데, 그 혈통이 이어진 거지.”
“……사는 게 쉽지 않았겠군.”
같은 한족임에도 눈동자가 회색이란 이유만으로 멸시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힘이나 권력이 있다면 모를까, 뒤를 봐줄 사람도 없는 혼혈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건 하루하루가 끔찍한 일들의 연속이었을 거다.
설지굉의 눈을 힐끗 본 금복인이 말을 이었다.
“그래. 말 그대로야. 차별, 편견, 따돌림. 저 녀석의 애비는 오지게 고생만 하다 객사했지. 금벽이는 어찌어찌 우리 만금당에 인연이 이어져서 어릴 적부터 내 일을 도와주고 있어. 아주 총명하고 착한 녀석이야.”
“색목인을 가까이 두다니. 보기완 다르시군.”
모르는 자와는 웬만해선 말을 섞지 않는 설지굉이다.
특히나 무에 몸담지 않은 자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그였다.
하지만 기인이라 불리는 자의 묘한 친화력인지, 필요에 의한 관계 형성인지, 어느새 설지굉과 금복인은 자연스레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음? 보기와 다르다? 이봐, 아우. 그거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 주제에 의외로 핏줄로 사람을 가리진 않는군.’이라고 들리는데?”
“알면 됐소. 그리고 그 아우 소리 한 번만 더하면 사생결단이니 그리 아시오. 그보다 쿠빌라이가 붙잡을 정도로 아꼈던 색목인이라……. 그런 자가 있었던가?”
“마가파라(馬可波羅)라고 하는 자야. 그들 나라 말로는 ‘마르코 폴로’라고 발음하지.”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건가. 희한한 발음이군.”
저 청년의 할아버지라면 족히 수십 년 전의 사람일 것이다.
한 시대의 절대자였던 쿠빌라이 카안이 언급되었기에 잠시 귀 기울였을 뿐, 막상 이름을 듣자 설지굉은 마가파라라는 자에게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단하지 않아? 어디 있는지도 모를 서방 세계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게. 그가 귀향을 요청해도 쿠빌라이는 그를 너무도 총애해 여러 번 거절했다더군. 그가 떠난 게 50년이 넘었어. 무사히 제 나라에 도착했다면 그들에겐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는 중화의 실정을 전해주었을 거야. 그런 용기와 능력을 지닌 자들이 정체된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지.”
“전혀 관심 없소.”
설지굉이 관심을 보이든 말든 금복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하는 일도 그런 변화를 주길 바라고 있어. 그간 나는 많은 것들을 보아왔지. 고대인들의 생활과 그들이 이룩한 문명. 과거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없어진 동식물들.”
금복인의 눈이 무언가를 그리듯 점점 또렷해졌다.
“그저 추상적인 존재나 이야기들로 과거를 설명할 게 아니라, 실존했던 증거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것. 많은 이들이 배부른 자의 무가치한 유희일 뿐이라고 손가락질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네.”
금복인의 두 눈은 이제 번쩍이는 정광을 담고 있었다.
한순간 그에게 가졌던 광인이란 인상을 모두 날려버릴 만큼 눈부신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아냐. 미친놈이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지.’
설지굉에게는 땅 밑에 묻힌 뼈 몇 쪼가리 들춰내며 과거 운운하는 것보다, 기존 유불도의 종교적인 해석과 민간에 전해지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과거를 이해하는 게 훨씬 그럴듯해 보였다.
“다시 말하지만, 마가파라니 과거니 하는 것들, 전혀 관심 없소.”
“망할 새끼.”
“뭐라?”
차앙!
검까지 뽑아든 설지굉이 금복인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