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아아~ 알았어. 형이 미안해. 흥분하지 마.”
‘뭐 이런 자가?’
중원을 양분하는 거상 가문의 적손이, 더군다나 오십 중반에 이른 자가 어찌 이리 경박하단 말인가.
나머지 여섯 명의 기인들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금복인은 설지굉이 태어나서 본 사람 중 가장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다 됐군.”
“이건…!”
금벽파라라는 벽안의 아이가 재구성한 뼈의 실체.
골격만으로도 엄청난 위용을 드러내는 짐승이 시공을 초월해 설지굉의 눈을 뒤흔들었다.
이게 만약 실존했다면.
척 보기에도 날렵함과 강인함을 두루 갖춘 강대한 생물이었으리라.
“기형적으로 발달한 한 쌍의 송곳니. 범의 그것을 까마득히 능가하는 육체적 능력.”
심혈을 기울인 결과물 앞에서, 경망스럽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금복인에게선 시대를 뛰어넘은 선구자의 혜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검치호(劍齒虎)라고 한다네.”
회안검의 이름을 지닌 검사에게, 고증자의 이름을 지닌 학자가 묻는다.
“이놈, 이길 수 있겠나?”
“그걸 묻자고 부른 거요?”
설지굉은 자존심이 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검치호라는 녀석은 분명 현존하는 어떤 짐승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막강해 보였다.
허나 그래 봤자 금수에 불과할 뿐이다.
절정의 문턱을 넘어 그 이상을 바라보는 자신에게, 사천과 귀주를 떨쳐 울리는 회안검에게, 고작 짐승 따위를 이길 수 있냐고 묻다니?
‘이래서 무를 수련하지 않은 무지렁이들은.’
시간 낭비였다.
아니, 잠시 어울려주고 이자 없이 돈을 빌리게 되었으니 남는 장사인가.
“내가 추측하기론 말이지. 이 녀석이 살아 움직였을 시절의 동식물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야. 훨씬 크고, 강인하며, 생명력이 넘쳤을 게 틀림없어. 그리고 그건 아마도 아우와 같은 무인들이 활용하는 기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해.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근거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
“하?”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자는 미쳤을 뿐만 아니라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하다하다 이제는 짐승과 기를 연결시키다니.
짐승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이라도 쌓는단 말인가.
귀 기울일 필요가 없는 헛소리였다.
‘저 뼈부터 믿기가 힘들어.’
칼날처럼 튀어나온 두 개의 송곳니.
저런 짐승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금 100관을 썼다고 하니 그럴듯한 가짜 골격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
‘아주 질이 안 좋은 사기꾼이군.’
이자는 그저 자신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거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뽐내고 싶은 게 분명했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고작 이따위 허풍이나 떨고 앉아 있다니.
아무리 핏줄이라고 해도 이자를 밀어주고 있는 만금당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덩치와 믿을 수 없는 뼈의 강도. 사냥과 전투에 특화된 신체 구조. 이 녀석이 무인들처럼 기를 활용할 수 있다고 상상해봐.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한 방.”
“……응?”
더 들어주기 힘들었다.
설지굉은 금복인이 자신을 청한 이유에 대한 답변을 주고 뒤돌았다.
“현 시대의 무인들을 기준으로 저 생명체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한 것 아니오? 한 방이라 했소.”
“……한 방?”
“그래. 일 수. 검 한 번 휘두르면 저 거대한 모가지를 몸통에서 분리할 수 있지.”
“그, 그럴 리가! 이봐, 아우. 내 말을 못 믿는 것 같은데 설명을 좀 더 듣고서…!”
“가오. 이자는 고맙소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발길을 재촉하던 설지굉이 우뚝 멈춰 섰다.
“아! 어디 가서 이 설지굉이 아우니 뭐니 떠들어대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그땐 만금당이든 뭐든 얄짤없으니 명심하시오, 선배.”
금복인이 멀어지는 설지굉의 등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스스슥-
검은 무복으로 몸을 감싼 사내가 금복인의 옆에서 솟아올랐다.
그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만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설지굉이 사라진 방향을 보는 눈동자엔 새파란 분노가 담겨 있었다.
“참느라 혼났습니다. 감히 노야(老爺) 앞에서 검을 뽑다니. 일검이면 머리를 몸통에서 떼어낼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 말리신 겁니까?”
“아아~ 아니야, 아우. 내가 청한 손님인걸.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 그저 검치호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어.”
사내가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노야.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금벽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아우란 호칭은 버겁습니다. 그보다, 정말 떠나실 겁니까?”
“그래야지. 죽기 전에 내 눈으로 봐야 하지 않겠어?”
“한바탕 꿈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아니, 아마도 그렇게 될 거야.”
“허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언젠가는 찾게 될 테니까. 그 첫 단추를 꿰는 걸로 족해. 무엇보다 고고학의 가치를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어.”
“노야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고된 일을…….”
“저기 있잖아.”
금복인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엔 진땀을 뻘뻘 흘리며 뼈들을 꿰맞추는 푸른 눈의 청년이 있었다.
“내가 못 찾는다면 저 녀석이 찾을 거야.”
세간의 비웃음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평생토록 꿈을 좇아왔다.
어느덧 남겨진 시간이 지내온 시간보다 많지 않은 나이가 되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눈을 감는 그 날까지 과거의 편린을 한 조각이라도 들추는 데 전념할 것이다.
“궁금하지 않나, 아우? 중화를 처음으로 통일한 자. 최초의 황제. 진시황(秦始皇).”
시대를 앞서 달린 선구자가 푸르른 하늘을 아련하게 올려다봤다.
“그의 모든 것이 담긴 무덤이 말이야.”
‘그 정신 나간 영감탱이의 말이 사실이었다고?!’
15년 전의 일이지만 워낙 특이했던 기억이라 바로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다.
보는 순간 알겠다.
저건 현세에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무언가’라는 것을.
‘거짓이라 치부했던 존재가 버젓이 돌아다녀서가 아니야. 저건… 저건…!’
강하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눈앞에 있는 생물은 감히 검을 들이댈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강대한 포식자였다.
‘체내의 기운이 저렇게 표출될 정도면 대체…!’
푸른 아지랑이처럼.
괴수의 몸 주변에는 육안으로 보일 만큼 유형화된 일렁임이 공간을 찌그러뜨리고 있었다.
이미 곰이 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걸 본 후다.
저 짐승이 기를 활용하는 건 더 이상 놀라울 게 없었다.
그 수준이 상상을 까마득하게 넘어서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 이런 걸 일검에 쪼개겠다고 큰소리를…!’
눈앞에 버티고 선 것만으로도 만물을 위압하는 전율적인 존재감.
설지굉의 눈은 애처로울 만큼 경련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육신은 의지의 제어를 벗어난 지 오래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떨림과 등을 흥건히 적시는 땀.
검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절대. 절대 움직이지 마라.’
은빛 여우가 마른 비에게 눈으로 말했다.
‘알아요. 형.’
마른 비 또한 눈으로 답했다.
‘놈을 정면으로 마주 보지 마라. 자신에게 대항하려 한다고 느끼게 하면 안 돼.’
백수(百獸)에 익숙한 마른 비와 은빛 여우지만, 한 번도 조우한 적이 없는 짐승이다.
애초에 마주칠 수가 없는 종이었다.
하지만 대저 짐승의 특성이란 대동소이하기 마련이고, 특히나 맹수라 불리는 짐승들은 더욱 그러했다.
스륵-
살얼음판 같은 정적을 뚫고.
육중한 거체가 움직이는 거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발소리가 스쳤다.
발끝으로만 딛는 대지.
위치가 발각될만한 소음을 억제하는 게 습관처럼 배어 있단 뜻이다.
또한 언제든 날아오를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지독한 놈이군.’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소스라칠 만큼 차가웠다.
‘그냥 지나가길 기도하….’
추아아악!
놈이 전진하는 경로의 우측.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설검대원 여섯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썩은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히, 히익!”
촤아악!
이번엔 좌측이다.
신음을 흘린 검사를 중심으로 일곱 명의 머리가 한순간에 몸통과 분리되어 버렸다.
“으, 으…! 으아악!”
극한에 이른 공포는 오히려 몸을 움직이는가.
바지를 적신지도 모르는 서넛의 설검대원이 땅을 기다시피 하며 도주를 감행했다.
좌우로 찢어진 인원들은 용케도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고, 한순간에 거리를 벌렸…!
스르륵-
“아악…!”
스륵-
“컥!”
그것은 절정에 이른 경신술의 대가가 펼치는 기쾌무비한 경공과 같았다.
잔영만 남기는 기동으로 도주하는 자들을 모조리 척살한 괴수는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금 앞발을 내디뎠다.
‘이, 이놈!’
스륵-
촤아악! 추악!
스륵-
“크학!”
“카아악!”
‘모조리 죽일 셈이구나!’
은빛 여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했어야 했다.
싸울 의지가 없는 검은 수리 전사 여섯을 모조리 찢어발긴 놈이다.
먹이를 구하기 위한 사냥이나 덤벼든 적에 대한 응징이 아니다.
척살.
놈은 그저 자신의 영토에 침입한 불청객들을 용납할 생각이 없는 거였다.
‘빌어먹을! 어차피 죽을 거라면…!’
놈의 움직임을 보았다.
도주는 불가능하다.
먼저 자리를 이탈하는 자부터 발톱에 찢길 게 불 보듯 훤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설검대와 힘을 합쳐서 덤빈다고 해도 저 괴물을 눕히는 장면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대항과 도주, 모든 길이 막혔다.
가만히 있어도 죽는다.
그나마 유일한 가능성은 장내에 있는 모두가 사방으로 흩어져 달리는 것인데, 먼저 움직이는 자부터 십 할의 확률로 죽을 게 뻔했다.
그래서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먼저 죽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방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적들과 섞여 있기 때문에.
피할 길 없는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곧 우리 차례다.’
마른 비와 은빛 여우의 눈이 거칠게 요동쳤다.
괴수는 포위망을 찢어발기며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정중앙에 위치했던 소년과 청년에게 닿는 건 시간 문제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둘의 눈이 마주쳤다.
‘싸워보기라도 하자!’
와족의 후예들이 설검대와 다른 점이었다.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항거할 수 없는 공포에 굴복한 설검대와 달리, 둘은 다가온 죽음을 직시했다.
그리고 항전의 각오를 다졌다.
어차피 놈이 나타나기 전에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처지였다.
죽음을 선사하는 존재가 바뀌었을 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소년이 주먹을 움켜쥐고, 청년은 경직되었던 손목을 풀었다.
‘하나.’
스륵-
“쿨럭!”
“크아아악!”
‘둘.’
스르륵-
“커헉!”
‘셋!’
마른 비와 은빛 여우의 눈에 푸른 자연기가 번쩍였다.
“지금이다! 비아야!”
“쿠어어어어엉!”
배후에서 터져 나온 포효가 검치호에게 달려들려는 둘을 덜컥 멈춰 세웠다.
우뚝.
전진하던 괴수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애뢰산 제왕의 눈길이 향한 곳.
두 발로 대지를 디딘 흉웅의 거체가 쏟아지는 햇빛을 가렸다.
“쿠아아아아앙!”
호랑이 비스무리한 저 생물의 힘.
강하다.
예상보다 훨씬.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인간보다는 동족이라고 하는 게 어울릴만한, 무지막지한 인간에게 겪은 단 한 번의 패배를 제외하면 언제나 무적이었다.
더 강해지기 위해 여기까지 왔고, 애초에 저놈을 쓰러뜨릴 목적으로 왔다.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머리통을 부쉈을 때의 쾌감은 진하며, 설령 패하면 어떤가.
오직 싸움만이 삶의 목적이며, 살아 있는 의미다.
확실하다.
저놈을 넘으면.
내가 운남 최강이다.
“쿠아아아아앙!”
덤벼라.
울부짖는 흉웅의 포효가 산중을 데웠다.
“그르르…….”
낮게 내리깔리는 울음소리.
처음으로 이빨을 드러낸 검치호가 고개를 들었다.
뒷발로 버티고 선 흉웅의 거체는 개활지에 장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좌우로 크게 벌린 앞발에서 새하얀 발톱이 튀어나와 야생의 살기를 만천에 흩뿌린다.
목이 뻐근할 만큼 고개를 들어 올려야 겨우 마주할 수 있는 외눈에서 적을 불태울 야생의 겁화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