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도전이다.
명백한 도전이었다.
나약한 피조물이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르르륵―
종전보다 긴 이동음이 흐르고, 포위망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던 설지굉의 앞, 흉웅의 배후를 점하는 지점에 검치호가 환영처럼 떠올랐다.
“큽…!”
화들짝 놀라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설지굉을 배경으로, 사신의 칼날이 흉웅의 등판을 긁었다.
촤차차악!
설검대가 꽂아둔 철검들이 사기그릇처럼 깨져 나간다.
터져 나온 핏물과 검의 파편들이 뒤엉키며 화려하게 비산했다.
설검대를 종잇장처럼 찢은 검치호의 발톱이지만, 왕좌를 노리는 흉웅의 몸뚱이는 애초부터 인간의 그것과는 비견할 수 없는 강건함을 지니고 있었다.
“쿠어어어엉!”
얼마든지 날뛰어봐라.
받았으니, 돌려주면 그뿐.
흉웅의 앞발이 대기를 아래에서부터 밀어 올렸다.
콰자자작!
한껏 응축시킨 자연기가 폭발하듯 터지고, 착지 중이던 검치호를 하늘 위로 날려버렸다.
‘이럴 수가!’
직접 검을 맞대보았기 때문에 절절히 안다.
저 앞발에 두드려 맞은 이상 절대 일어설 수 없다.
날짐승처럼 허공으로 치솟았던 검치호가 개활지 한복판에 내팽개치듯 떨어졌다.
쿠콰앙!
엄청난 충돌음이다.
육중한 몸집을 지닌 만큼 지면에 내리꽂힌 충격도 거세게 다가올 터.
이건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저 괴물을 일격에…!’
뿜어내는 존재감으로만 따진다면 검치호의 그것이 흉웅을 가볍게 능가한다.
설지굉은 치열한 접전 끝에 흉웅의 패배를 예상했다.
하지만 실전으로 다져진 무인이 자신보다 조건이 뛰어난 무인을 제압하듯, 숱한 싸움의 나날을 헤쳐 온 흉웅의 야성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
두 괴수의 접전을 홀린 듯이 지켜보던 이들은 침묵으로 놀라움을 대신할 뿐이었다.
“꾸엉! 꾸아아~ 꾸우엉!”
흡족함이 묻어나는 울음이었다.
하지만 승리의 함성과는 거리가 먼, 맛이 어떠냐는 느낌의 조롱처럼 들렸다.
그 증거로 흉웅은 검치호가 추락한 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곧 하나뿐인 눈을 사납게 뜨며 장난치지 말고 나오라는 듯 그르렁거렸다.
“쿠우엉!”
부스스-
그 부름에 호응하듯 죽었다고 생각한 검치호가 태연하게 일어섰다.
‘그걸 얻어맞고도…!’
뚜둑. 우두둑.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인간처럼 몸을 휘돌려 근육을 이완시킨 검치호가 흉웅을 똑바로 노려봤다.
스륵- 스르륵-
괴수는 유려한 보법을 연상케 하는 움직임으로 지면을 미끄러지듯 기동했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후에, 흉웅을 정면에서 올려다봤다.
“크르르르…!”
그것은 통보였다.
너를 얕봤다.
진지하게 상대해주마.
얼마 전까지 이 산의 주인이었던 푸른 눈의 호랑이를 죽일 때처럼.
무시무시한 기세에 비해 무감하기만 했던 눈동자에 살의가 깃든다.
확장된 동공이 맹수 특유의 샛노란 야성을 담는 듯싶더니, 스멀스멀 올라온 붉은 기운이 망막을 뒤덮었다.
단 한 번뿐이다.
산군이었던 푸른 눈의 새끼를 물어뜯을 때 말고는 내보인 적 없었던 검치호의 진신전력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너무도 강대하여 타고난 골근(骨筋)의 힘만으로도 적들을 무릎 꿇렸던 검치호가 흉웅을 적수로 인정한 순간이었다.
투벅.
그건 발의 모든 면적이 대지에 맞닿는 소리였다.
은밀한 기동을 위해 발끝만으로 지탱하던 육신을 안정적으로 떠받친다.
두터운 기둥과 같은 검치호의 네 다리가 굳건하게 지면을 디뎠다.
“크허어어어엉!”
질식할 듯한 제왕의 울부짖음이 사위를 휩쓸고,
쾅!
무인의 진각과 같은 거센 충돌음을 뒤로 한 채 검치호가 거리를 지웠다.
“쿠어어엉!”
기다리고 있었다.
생김새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런 녀석들의 공격 방식은 하나같이 뻔하다.
자신만이 정점의 포식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놈들.
송곳니와 발톱이 다 자란 이래로 한 번도 힘에서 밀려본 적 없는 놈들이다.
보나 마나 정면으로 온다.
달려드는 궤적 또한 뻔하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힘으로 단숨에 부술 뿐.
꾸드득!
넘쳐나는 힘이 오른쪽 앞발에 집중되고,
스파앗!
흉악한 발톱이 햇빛을 절단한다.
콰우웅―!
각성 이래 경험했던 단 한 번의 패배.
그 이후 숱한 싸움을 거치며 터득한 필살의 강격.
더 이상 밀어 넣을 수 없을 만큼 응축시킨 자연기가 공기를 젖히는 다섯 개의 발톱을 시리게 물들였다.
뒈져라.
이 시간부로 내가 최강이다.
흉웅의 앞발이 날아드는 검치호의 대가리를 후려갈겼다.
“꾸웅?”
허전하다.
일생일대의 일격이었건만 앞발에 걸리는 게 없다.
아니, 앞발이 없다.
“크어어어어엉!”
폭죽처럼 치솟는 시뻘건 선혈은 방금 전까지 몸 구석구석으로 힘을 실어 나르던 생명 그 자체다.
거칠게 뜯긴 발목의 절단면에서 붉은 폭포수가 뿜어지고, 빠져나가는 피만큼이나 흉웅의 울부짖음도 거세졌다.
“쿠아아아앙!”
통증에 몸부림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전투 중이며, 이어질 적의 공격을 대비해야 한다.
어디냐.
앞발을 잘랐으니 분명 정면에…!
피잇!
육체가 아직 여물기 전.
새카만 하늘에서 내리꽂힌 찰나의 번뜩임을 기억한다.
수백 년 된 고목에 강림한 하늘의 분노는 나무를 활활 불태웠고, 그 눈부심에 이끌려 엉겁결에 발을 가져갔다.
그때의 형언할 수 없는 통증.
화끈한 작열감과 함께 빛이 사라졌다.
“꾸… 크엉! 쿠어어어엉!”
하나 남은 흉웅의 눈을 통째로 도려낸 검치호가 격통에 울부짖는 적을 고요히 바라봤다.
칼날 같은 송곳니를 타고 흐르는 건 신선한 생혈이다.
포착하기도 힘든 찰나지간, 흉웅이 휘두른 앞발을 허공에서 물어뜯은 게 틀림없었다.
탓!
길게 끌 이유가 없다.
사뿐히 뛰어오른 검치호는 흉웅의 머리 높이까지 치솟았고, 앞발을 휘둘렀다.
우드드득!
골육이 찢기는 파열음.
흉웅의 거대한 머리가 뜯겨나가 불규칙한 혈로를 그리며 나뒹굴었다.
투벅.
도약만큼이나 착지도 사뿐하다.
전력을 드러낸 기동과 전투 중에도 소음을 억제하는 습관은 징그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
꽈아앙!
그제야 흉웅의 몸뚱이가 넘어가며 굉음을 울렸다.
전투 중에 피가 튀기라도 한 걸까.
흉웅의 몸뚱이를 내려다보는 검치호의 눈은 새빨간 광택을 흘리는 홍옥(紅玉)과 같았다.
스윽-
지극히 당연한 결과를 맞이한 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흉웅의 사체를 보는 검치호의 눈은 무심했으며, 그 눈이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옆으로 돌아갔다.
“히, 히이익…!”
두 야수가 뿜어내는 기세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오십을 채 세기도 전에 끝나버린 전투.
떼굴떼굴 굴러온 머리는 정녕 동료들의 절반을 집어삼킨 괴수의 것이 맞는가.
구파의 정예? 자부심?
이런 상황에선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갈고 닦은 무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상대하기 위함이지, 이런 인외(人外)의 존재들을 상정한 게 아니다.
“뛰, 뛰어어어어!”
그래서 6조장의 피맺힌 절규는 온당했다.
하지만 적절치는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내버릴 생각이 아니었다면.
스륵- 투둑!
6조장의 목이 떨어지고,
“아아아악!”
“사, 살려줘어어어!”
이제는 사십여 명밖에 남지 않은 설검대의 잔존 인원이 사방으로 내달렸다.
스륵- 촤악!
스르륵- 촤자작!
일방적인 살육.
아니, 도살이 시작됐다.
맞설 엄두가 나지 않는 괴수 앞에서 전의를 간직한 인간은 없었고, 그건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는 마른 비와 은빛 여우도 마찬가지였다.
“정신 차려라! 움직여야 한다, 비아야!”
“……네, 네? 아… 네. 그래야죠, 형.”
얼이 빠진 마른 비가 띄엄띄엄 대꾸했다.
등골을 타고 오른 전율이 가시지 않는다.
움직여봐야 저 괴물에게서 달아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가야 하고, 살아남아야만 한다.
“후웁!”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켠다.
충만한 자연기가 육신을 휘돌고, 멍해졌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저쪽! 언덕 너머로 가야 한다!”
은빛 여우가 가리킨 곳은 원래 가려 했던 도주로였다.
마른 비의 생각도 같다.
청각에 집중하자 뚜렷하게 들리는 물소리.
언덕 너머에 있는 건 폭포가 틀림없었다.
“저걸 봐라. 가장 멀리 간 놈들부터 사냥당하고 있다.”
사방으로 흩어진 설검대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경공을 펼쳤고, 꽤 많은 인원이 도주에 성공할 것 같았다.
아니다.
기동력의 수준이 다르다.
더군다나 이 지형.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면 한둘은 운 좋게 살아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른 비를 쫓을 때는 유리함을 안겨주었던 개활지가 설검대의 무덤이 되고 있었다.
늦고 빠르고의 차이일 뿐, 전멸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살아남은 인원은 스물 남짓. 조금만 더 기다리자.”
대화를 나누는 사이, 벌써 절반이 넘는 설검대가 고혼이 되었다.
남은 이들이 가장 멀리, 그리고 넓게 퍼졌을 때.
그들이 가려는 방향에서 검치호가 최대한 멀어졌을 때!
“지금이다!”
쐐애액―!
와족의 후예들이 바람을 가른다.
힐끗 확인한 검치호의 위치는 그들의 이동방향과 정반대였다.
멀지 않다.
벗어날 수 있다.
살아날 수 있다!
‘으으윽!’
허벅지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과부하가 걸린 발목이 삐걱댔다.
앙 다문 이 때문에 턱관절이 빠질 듯 아파왔다.
‘어엇!’
파팟!
그들의 앞으로 한 명이 끼어들었다.
먼저 출발했다가 진로를 변경한 설검대원이 언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힐끔 돌아보는 상대와 눈이 마주쳤지만, 방금 전까지 적이었다는 건 이 상황에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만이 모두의 심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다 왔어!’
앞서 달리는 설검대원은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폭포로 뛰어들려는 순간!
촤아악!
시간이 정지했다.
흩날리는 살점과 뼛조각이 꿈속의 한 장면처럼 휘날린다.
몸통과 분리된 설검대원의 머리가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물기를 머금은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아…!’
정지된 시간 속에서 야수가 등을 돌린다.
서서히, 서서히.
느리지만 꾸준하게 다가오는 시간.
책임질 사람이 없는 소년은 마지막 항전을 각오했고, 책임져야만 하는 이가 있는 청년은 최후의 최후까지 도주를 떠올렸다.
전사는 판단한다.
‘끝이다…….’
‘아냐. 포기하지 마. 어떻게든 돌파를…!’
‘도주……. 둘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해. 하지만 하나라면, 어쩌면…!’
그 하나는 물론 자신이 아니다.
문제가 있나? 전혀.
실낱같은 가능성이면 어떤가.
그거면 충분하다.
푸릇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데는.
은빛 여우의 입이 결단의 미소를 그렸다.
『절대! 절대 멈추지 말고 뛰어라! 비아야!』
내뿜어진 의지가 언령이 되어 날아들고, 전사의 투혼은 바람을 가른다.
“오오오오!”
돌개바람.
지켜주지 못한 동생아.
아직 살아 있는 네 친구를 지킬 수 있게 힘을 빌려다오.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진 전사가 괴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
지켜내야만 하는 생명이 있다는 것.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어떤 것도 비아를 해칠 수 없다.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은빛 여우의 눈은 죽음을 초월한 광휘로 번뜩였고, 육신은 마지막 불꽃을 아낌없이 태우며 한계를 돌파했다.
“내 생애 마지막 기술이다.”
머리 위에서 내리꽂히는 무자비한 적의.
괴수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전사의 몸이 휘돌았다.
‘너에게 바치마.’
“돌개바람.”
퀘에에엑―!
거침없이 뻗어 나간 올빼미의 부리가 턱을 두들기고, 날짐승을 떨굴 비격이 황홀한 비상을 알린다.
거칠게 회전하는 육신에서 예리하게 다듬어진 일점 집중타가 폭풍처럼 터져나가니, 일타일격에 생명을 쏟아붓는 회천의 연격이라.
콰아아앙!
누구도 멈추지 못했던 살육의 연회가 끊겼다.
괴수의 고개가 하늘을 향해 꺾일 듯 치솟았다.
“후우, 후욱…….”
숨 막히는 정적이 살갗을 훑는다.
완벽한 고요가 내려앉은 가운데, 호흡을 고르는 은빛 여우의 숨소리만이 적막을 수놓았다.
“형!”
피 토할 듯 터져 나온 마른 비의 고함이 산중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