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가라!”
앞발을 휘두르기만 하면 자신은 죽는다.
말 그대로 모든 걸 쏟아낸 일격이었고,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버티고 서서, 눈 감는 순간까지 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
그게 은빛 여우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반격에 나서지 않는 검치호 덕분에 은빛 여우는 마른 비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안 돼요! 같이…!”
갈 수 없다.
달릴 수 없다.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한 식구를 어찌 두고 간단 말인가.
마른 비는 전사가 아니다.
일신에 지닌 무력은 전사라 인정받기에 충분할지 몰라도, 그는 아직 전사의 판단과 결단을 배우지 못한 소년일 뿐이다.
냉철한 이성보단 뜨거운 감정이 먼저고, 그것이 소중한 사람들에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은빛 여우가 검치호를 막아선 건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갈 수 없다.
같이 죽는다면 모를까, 식구의 목숨을 발판으로 자신의 삶을 구할 순 없는 일이었다.
마른 비는 도저히 발을 뗄 수 없었다.
“가라고 했다!”
자신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마라?
그런 진부한 이야긴 하지 않는다.
자신이라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거다.
죽더라도 같이 죽자 결연하게 외쳤을 거다.
그 마음을,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곧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적을 눈앞에 두고서.
소름 끼치는 괴수의 숨소리를 오롯이 느끼며.
전사는 담대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원한 것이다.』
소년과 눈을 맞춘 청년은 그리 말했다.
『전사는 지키는 자다. 비아야.』
내가 단련한 것은, 전사가 된 것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엄습하는 적의로부터 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널 지키는 건 나의 임무이자 책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순간, 난 전사이고 싶다.
아니, 그런 건 어찌 되도 좋다.
형으로서, 벗으로서, 식구로서.
네가 살아남길 바란다.
훨훨 비상하기 바란다.
주어진 삶을 활짝 꽃피우기 바란다.
쏟아지는 햇빛을 가리는 괴수의 아가리 밑에서, 주어진 생명을 장렬하게 불태운 전사가 눈으로 말했다.
가라.
널 지킬 수 있게 해다오.
“흑…!”
소년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삶을 내던진 은빛 여우의 각오가, 자신을 살리려는 애타는 마음이, 마주친 두 눈을 통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온다.
심장이 쥐어 짜이는 저릿함에 숨을 쉬기 힘들다.
저 따스한 눈을 보며 함께 죽자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것이 자신을 위해 삶을 내던진 그의 결단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인가.
‘산다.’
살아남는다.
그의 뜻대로 삶을 구한다.
그것이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임을 마른 비는 깨달았다.
“……알겠어. 갈게요, 형. 꼭 살아남을게요.”
그래, 그거다.
활짝 웃는 은빛 여우의 얼굴은 눈부셨다.
“대신…….”
살아남는 것만으론 모자라다.
휘황히 쏟아지는 햇살 아래, 검치호를 똑바로 마주 본 소년은 선언한다.
“반드시 복수해 줄게요.”
“……!”
은빛 여우의 눈이 커지고, 괴수의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새긴 마른 비는 등을 돌리며 이별을 고한다.
“절대 잊지 않아. 고마워요, 형.”
‘저 물렁한 녀석이 복수를 입에 담다니…!’
산이나 안개 걸음, 노을이가 복수를 말했다면 놀라지 않았을 거다.
치열한 경쟁심도, 넘치는 의욕도, 타오르는 향상심도 없던 녀석이다.
항상 실실 웃으며 해맑게 삶을 즐기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그래서 아쉽던 녀석이다.
‘못 보는 사이 많은 일이 있었나 보구나.’
잊어버리란 말은 하지 않는다.
마른 비가 은빛 여우의 심정을 헤아렸듯 은빛 여우 또한 마른 비의 마음을 안다.
복수.
자신이라도 무조건 그렇게 했으리라.
‘그래, 좋다. 복수해다오.’
그것은 생명을 앗아갈 적을 두고 보지 못해서가 아니다.
이 강대한 괴물조차 쓰러뜨릴 수 있는 거목이 되란 의미다.
강해져라.
성장해라.
살아남아라.
누구도 네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건드릴 수 없도록, 강한 사내가 되어라.
“너, 큰일 났다. 인마.”
은빛 여우가 웃으며 괴수를 올려다봤다.
“저놈 저거, 한다면 하는 놈이거든.”
달리는 소년을 눈짓으로 가리킨 그가 말을 이었다.
“다음에 저 녀석을 보면 말이지…….”
죽음을 초월한 전사의 미소가 내리쬐는 햇살을 무색케 할 만큼 싱그럽게 피어났다.
“너, 반드시 죽을 거다.”
검치호의 눈가가 꿈틀거리고, 괴수의 머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 상황에 대한 고찰을 계속했다.
무슨 심산인지 하늘은 존재해서는 안 될 강대한 존재를 운남에 내던졌고, 사물을 자각하게 된 순간부터 자신은 정점의 포식자였다.
자연이 스스로 그러하듯, 그건 그냥 그렇게 결정지어진 거였다.
어떤 생물도 자신의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다.
푸른 눈의 호랑이와 방금 목을 딴 곰.
그 두 놈을 제외하면 감히 자신에게 덤벼드는 생물은 없었다.
규정지어진 종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녀석들조차 사실 별다른 감흥을 주진 못했다.
인간.
나약한 종이다.
어찌 이따위 생명체가 아직까지 생을 영위하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연약한 존재들이다.
오늘 마주한 것들은 꽤나 놀라움을 주었지만, 그래 봤자 미미한 벌레와 다를 바 없다.
감히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데 눈앞의 이 인간.
다른 것들과 함께 허둥지둥 도망치던 녀석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에 턱밑의 공간을 허용하기에 이르렀고, 곧 강렬한 충격이 턱을 뒤흔들었다.
어깨에도 못 미치는 키와 빼빼마른 몸통.
생존을 위한 투쟁에 있어 인간은 저주받은 종이나 마찬가지다.
한데 이 묵직한 타격은 뭐란 말인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 눈빛.
맹렬히 타오르는 투지와 굴하지 않는 기개가 작은 눈동자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은빛 여우가 보여준 행동은 검치호의 짧은 생애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무언가였다.
씨익.
“너, 반드시 죽을 거다.”
미소가 무엇인지 모르는 검치호다.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의미는 알겠다.
이 생물은 더 이상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애뢰산을 뒤덮은 한 줌 흙이 되어 사라지기를 각오한 게 틀림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검치호는 분노했다.
“크아아아아앙!”
코앞에서 터져 나온 포효가 고막을 찢는다.
가뜩이나 모든 힘을 소진한 바람에 버티고 서 있던 게 고작이다.
찌이잉- 하는 이명이 울리고, 은빛 여우는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땅 위로 풀썩 쓰러진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간신히 상체를 지탱했다.
‘끝인가.’
최후의 최후까지 녀석을 마주 보리라.
그것은 전사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검치호는 사라져 있었다.
콰앙!
기척을 숨기기 위한, 고요한 이동이 아니다.
검치호는 흉웅과 싸울 때처럼 있는 힘껏 땅을 디뎠고, 마른 비를 향해 폭발적으로 쏘아졌다.
‘아, 아니?!’
눈앞에 있는 사냥감을, 덤벼든 적을 놔두고 왜 비아를 쫓는단 말인가?
더는 움직일 힘이 없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이명과 빙글빙글 도는 시야를 견뎌내며, 은빛 여우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안 돼…!”
“커허어어헝!”
저 인간의 새끼 때문이다.
푸른 눈의 호랑이가 새끼들을 살리고자 죽을힘을 다해 덤벼들었던 것처럼, 저 건방진 인간은 앞서 나간 어린 것을 살리고자 공포를 잊은 게 틀림없다.
지키고자 한 게 저것이냐?
그렇다면 네가 보는 앞에서 갈가리 찢어 주리라.
검치호는 겁대가리 없이 자신에게 덤벼든 은빛 여우를 곱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고통, 좌절, 절망!
그 모든 것을 맛보여 준 후에 숨통을 끊고 포식해 줄 것이다.
푸른 눈의 호랑이를 죽였을 때처럼.
검치호의 앞발이 하늘을 가렸다.
쐐애액-!
다 왔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검치호는 움직이지 않았고, 마른 비는 눈물을 흩뿌리면서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개활지가 끝나고, 야트막한 언덕을 넘자 광활히 열린 공간이 두 눈에 꽂히듯 다가들었다.
콰아아아―
시야가 열린다.
짙푸른 하늘과, 하늘을 닮은 쪽빛의 폭포수.
눈에 들어오는 일대 전체가 폭포의 영역이었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규모로 들이붓는 물줄기는 대자연의 경이, 그 자체였다.
높이를 가늠하기 힘든 고공에서 쏟아지는 폭포수가 저 아래 수면에 부딪히며 푸른 포말을 일으키고 있었다.
폭포의 힘이 미치는 영역은 지금껏 지나온 독림과 개활지를 합친 것보다 넓었는데, 햇살을 산란시키는 물줄기는 거룩하기까지 했다.
‘낭떠러지?!’
낭패다.
언덕인 줄만 알았던 경사는 수직으로 하강하는 절벽의 끝자락이었다.
우측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곳.
물줄기가 떨어져 내리는 중심부까지 다가가지 않으면 건너편으로 건너갈 방법이 없었다.
‘뛰어야 해!’
다행히도 뛰어내리면 폭포가 만들어낸 강줄기에 곧바로 합류할 수 있다.
문제는 높이였다.
‘이, 이건… 온몸이 부서지는 정도가 아니겠는데?’
철골과 강피로는 어림도 없다.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절벽의 높이는 수면에 부딪히는 낙하 충격력만으로도 온몸을 바스러뜨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아니, 신체가 부서지는 건 둘째 치고 내장부터 터져나가리라.
‘그래도 간다!’
고소(高所)가 선사하는 본능적인 공포 때문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마른 비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하지만 소년은 머뭇거리지 말았어야 했다.
찰나의 망설임은 악의를 품은 재앙이 따라붙기에 차고도 넘치는 시간이었고, 절벽에서 몸을 날리자마자 흉포한 적의가 소년을 덮쳤다.
“커허어어엉!”
붉게 물든 발톱이 하늘을 덮는다.
마른 비가 고개를 돌렸을 때, 검치호의 앞발은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점점 확대되며 시야를 메우는 그것은 피할 수도, 맞설 수도 없는 천변(天變)과 같았다.
“캬앙!”
체공 상태의 소년이 갈가리 찢기려는 순간, 벗의 의지를 전해 받은 은빛 궤적이 황색 재앙을 덮쳤다.
촤아아악!
“아아악!”
햇살을 담은 포말처럼 점점이 비산하는 핏방울.
다섯 줄기 발톱이 등줄기를 헤집고, 추락하는 소년은 타는 듯한 육체의 고통보다 괴수의 입에 물린 짐승의 이름을 처절히 부르짖었다.
“안 돼! 실바라아암!”
우지직!
“크허어어어엉―!”
난생 처음 사냥감을 놓친 괴수의 격노에 찬 울부짖음이 애뢰산을 뒤흔들었다.
처분
“단전을 폐하고, 손발의 힘줄을 끊는 것으로 마무리 짓겠다.”
냉정한 음성이 가혹한 내용을 담고, 모질게 내려앉는다.
공지량의 눈에선 한 점의 관용이나 아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장문인, 진심으로 그리 말씀하시는 거요?”
되묻는 봉검의 표정은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이의가 있을 수 있습니까?”
높은 고도로 인해 찬바람이 귓전을 스치는 장문전 앞.
공지량은 단단히 포박된 여규와 원승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대 제자 여규는 사형의 어깨를 검으로 꿰뚫어 치명상을 입히는 중죄를 저질렀습니다. 삼대 제자 원승과 함께 적 수괴의 아들이 도망치는 것을 도왔고, 적을 잡으려는 사형제들을 막아서기까지 했죠. 이는 반역죄입니다. 기사멸조(欺師滅祖)의 죄보다도 무거운 악행으로 여겨집니다만. 목숨을 보전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창산의 토양과 그 위에 선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바람만이 고요히 흘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침묵의 공진이 불안하게 번졌다.
이런 자리에서 장문인의 판결에 대해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자는 둘뿐이었다.
“여규와 원승의 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문인. 허나 인간사 모든 일은 결국 인과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법. 이대 제자 청목이 다치고 교방과 웅보가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지만, 원인을 제공한 건 어디까지나 그 녀석들이 아닙니까. 대리로 내려가 외인들이 보는 앞에서 다짜고짜 여규를 구타하기 시작했다지요. 먼저 검을 뽑은 것도 청목이라지 않습니까. 죽이려고 달려드는 상대에게 가만히 서서 목을 내줄 순 없는 일이 아니겠소.”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운검이 여규와 원승을 변호하고 나섰다.
차분한 성정만큼이나 조곤조곤히 이치를 따지는 어조에는 모두를 귀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자, 장문인! 저는… 저는 억울합니다! 여규 저 녀석이 복귀하지 않아서 찾으러 나간 것뿐입니다! 한데 옆에는 와족 족장의 아들이 있었고, 여규 저 녀석은 적 수괴의 아들과 우정 놀음을 하며 시장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그런 중요한 인물이 본파의 제자에게 순수하게 접근할 리가 있겠습니까! 사형으로서 잘못에 대해 훈계하였을 뿐인데 저 녀석이…!”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울먹이며 고자질을 하는 것만 같다.
청목은 붉게 물든 붕대를 움켜쥔 채 쉰 목소리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평소 여규를 괴롭혀온 청목의 악랄함을 모르는 이는 없다.
전후 사정을 짐작한 제자들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청목은 그들의 표정을 살필 여력 따윈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잘못과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변호할 뿐이었다.
“확실한 것이냐.”
지저에서 흘러나온 귀음(鬼音)과 같은 목소리였다.
쌓이고 쌓여 폭발 직전에 이른 분노를 간신히 눌러 담은 음성이 청목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