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부리부리한 눈과 하늘로 치솟은 눈썹.
일신에 지닌 기세를 숨기지 않고 발산하는 봉검의 주위로 범접할 수 없는 기의 와류가 휘몰아쳤다.
“그 말에 거짓이 없는지 물었다.”
‘어, 엄청나구나…!’
주위에 늘어선 점창의 제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며 고개를 숙였다.
수년간 은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봉검과 운검이다.
뒤늦게 점창에 유입된 제자들은 그 명성을 듣기만 했지, 대장로들의 얼굴을 처음 보는 자도 부지기수였다.
점창을 수호하는 한 쌍의 방패.
외부의 칼날로부터 창산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했던가.
직접 목도한 봉검의 기세는 세간에 퍼진 명성을 한참이나 웃도는 무지막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 강해진 건가.’
공지량이 가늘게 뜬 눈으로 봉검을 훑었다.
수년간의 칩거.
사문의 안위와 무(武)밖에 모르는 저 우직한 노인네는 지칠 줄 모르고 수련을 거듭한 모양이었다.
‘꽤 따라잡았다고 생각했거늘.’
강해진 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여휘와 평생을 비교당하며 살아온 삶.
구파의 장문에 걸맞지 않은 무력이라고 수군대는 세인들의 입방아가 진절머리 나기에, 그 열등감을 떨쳐내려 불철주야 무공에 매진했다.
하지만 저 괴물 같은 늙은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한계를 깨부순 게 틀림없었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지금, 없어선 안 될 장기짝이다.’
좋다.
그 강함을, 드높은 경지를, 끝까지 정도를 부르짖는 고고함을 인정한다.
대신 제대로 써먹어 주겠다.
공지량의 눈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서늘함을 품고 가라앉았다.
“청목. 네가 내뱉은 말에 책임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만약 하나라도 거짓을 고한 부분이 있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야.”
봉검의 부릅뜬 눈이 공지량의 옆에 시립한 사내를 향했다.
준일이 보고를 위해 공지량에게 급파했던 사내.
마른 비를 쫓았던 준일이 목숨을 잃는 바람에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을 지켜본 사람은 이제 그 하나뿐이었다.
“묻겠다. 청목의 말이 사실인가?”
봉검의 질문을 받은 사내가 넘어가지 않는 침을 애써 삼켰다.
그의 머리가 초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장문인은 여 장로를 싫어한다.’
‘호국영, 청목 등이 여규를 괴롭히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뒀어.’
‘여규가 꼴 보기 싫어도 자신이 직접 손을 쓸 순 없다. 그래서 못 본 척하고 따돌림을 방치한 거야.’
‘장문인은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이런 판결을 내렸다.’
‘이 기회에 여규의 무공을 폐하고, 싹을 자르려는 속셈이 분명해. 차후 여 장로가 돌아오더라도 따질 수 없는 명분을 내세워서.’
‘응목대는 장문인 직속의 단체.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밉보이면… 내 미래는 없다.’
그건 달리 말해서, 속내를 잘 읽어내면 공지량의 눈에 들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침 부대주 자리가 비었고, 이건 기회나 다름없었다.
“청목의 말은…….”
미안하다.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
어찌 됐든 여규, 네가 사형을 상처 입히고 적을 도주시킨 건 분명한 사실이지 않나.
그에 대한 죗값을 치른다고 생각하자.
응목대원이 청목의 말에 힘을 실어주려는 찰나, 봉검의 옆에 서 있던 사내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백색의 무복은 여느 점창 제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창산의 주봉인 마룡봉을 수놓은 왼쪽 가슴의 자수.
‘저건… 봉검가!’
오랜 침묵의 시간을 깨고 봉검가와 운검가의 무인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봉검가의 무인은 응목대원을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허튼짓하지 마라.
노골적인 경고이자 압박이었다.
‘그사이에 벌써… 자체적인 조사를 마친 건가!’
여규와 청목의 싸움을 본 사람이 부지기수다.
대리의 시장 거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다.
봉검 장로가 산외 수련을 허가했다, 문제가 있다면 사문에 가서 벌을 받겠다, 사형이 날 구타할 권한은 없다고 항변한 여규.
여럿이서 다짜고짜 어린 사제 하나를 핍박한 완기 등과,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끼어든 야만족 소년.
전쟁이 벌어졌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두 아이.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밝힌 후에야 알게 된 소년의 정체.
파편으로 흩어진 낱말과 행동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조합해야지만 청목의 말이 거짓임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저 표정…! 봉검가는 이미 탐문을 끝냈다!’
응목대원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자신과 이대 제자들만 입을 맞추면 여규와 원승에게 잘못을 미룰 수 있고, 징계가 가능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나 정황을 눈치챈 자들이 있을까 싶어 응목대가 은밀히 움직이며 회유와 협박으로 입을 막고 있다.
청목에게 힘을 실어주는 자신의 말 한마디면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이다.
징계를 내린 이후라면.
설령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잘라버린 힘줄과 부순 단전을 되살릴 순 없으며, 거기까지 간다면 장문인이 어떻게든 자신을 보호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봉검 장로의 엄정한 눈빛과 한발 앞으로 나서서 슬쩍 고개를 젓는 봉검가의 무인을 보자 응목대원은 거짓을 말할 용기가 사라져 버렸다.
“처, 청목의 말은…….”
“그만.”
부들부들 떠는 응목대원을 멈춘 건 공지량이었다.
의아해하는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가 말했다.
“여규와 원승의 입장은 앞서 들었다. 그리고 청목은 그와 반대되는 말을 했지. 내가 둘에게 엄한 판결을 내린 이유는 어찌 됐든 사형을 상처 입히고, 반역에 해당하는 중죄를 저지른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를 그냥 넘긴다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잠시 말을 멈춘 공지량이 좌중을 둘러봤다.
침 삼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벽한 고요 속에서, 그의 입술이 열렸다.
“철회한다.”
웅성, 웅성-
손을 들어 소란을 진정시킨 공지량이 봉검과 운검을 응시했다.
“장로님들의 말씀에 일리가 있다. 상황을 판단하는 데 있어 그 원인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청목과 교방, 완기, 웅보에게도 일정 부분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규와 원승의 죄를 덮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느냐. 하여 본 장문인은 전쟁을 앞둔 특수한 상황을 빌어 두 제자에게 죗값을 치룰 기회를 주겠노라.”
여규와 원승을 내려다보는 공지량의 눈이 야비하게 빛났다.
“너희 두 사람은 이번 전쟁에서 최전선 선봉으로 나서 사문을 위해 싸워라. 적들의 피로 너희들이 저지른 죄를 씻도록 하라.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과, 두 장로님의 고견을 무시할 수 없기에 많은 양보를 한 것이니 이 이상의 이의는 받지 않겠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울컥한 봉검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소리 질렀다.
열네 살 꼬마에게 선봉이라니?
원승은 그렇다 쳐도 그 와족과 맞부딪히는 최전선에 여규를 세운다는 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대로해 호통을 치려는 봉검을 운검이 제지했다.
‘안 되오. 봉검 장로.’
운검이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한 문파의 장문인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입 밖으로 낸 판결을 뒤집었다.
그것은 봉검과 운검의 의견을 존중하는 동시에 여규와 원승에게 자비를 내리는 것으로 비쳐졌다.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는 걸 감수하고도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 공지량에게 많은 제자들이 감복한 상태였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응목대원이 청목의 말이 거짓이라고 말할 것을 예감하고 한발 앞서 차단했으며, 여규와 원승을 죽음이 예정된 사지로 내몰았다.
그러면서도 공지량은 자신의 관용과 아량을 뽐내었고, 늙은 장로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이만큼 예외적인 양보를 했는데도 여기서 더 따지고 든다면 절대로 제자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없다.
그리하면 두 장로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늙은이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이토록 영악하단 말인가.’
발 빠르게 움직인 봉검가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게 된 상황에서 기가 막힌 임기응변으로 원하는 모든 걸 얻어낸 공지량이다.
게다가 그 결과는 훨씬 좋았다.
공지량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걸렸다.
“사문의 죄인, 여규는 할 말이 있는가.”
언어는 개념을 규정하며, 의식을 잠식한다.
누구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공지량은 그 한마디로 여규와 원승을 죄인이라 못 박아버렸다.
하지만 소년은 아무런 항변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허리를 꼿꼿이 들고,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담담히 대꾸할 뿐이다.
“아니요. 그리하겠습니다.”
깊은 침음과 함께 봉검과 운검의 눈이 질끈 감겼다.
전야
우드득!
“캬아앙!”
골육이 분쇄되는 파열음.
그리고… 고통에 찬 짐승의 울부짖음.
“실바람…!”
등줄기를 인두로 지진 것 같은 통증보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대항 불가능한 적에게 몸을 던진 짐승 때문에 소년은 아팠다.
낙하에 가속도가 붙을수록 소리는 슬프게 멀어져 갔다.
은빛 여우, 그리고 실바람.
이제야 실감이 난다.
그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자신이 뭐라고, 이 보잘것없는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들이 귀중한 삶을 내던진단 말인가.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가슴이 미어져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추락하는 내내 마른 비는 울었다.
맞설 수 없는 강대한 적을 똑바로 마주 본 은빛 여우의 등.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지를 불사른 전사의 뒷모습은 눈부셨다.
‘가라.’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리고 그건 반드시 살아남으라는 의미였다.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강줄기를 보며, 마른 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떨어지면 죽는다!’
천장단애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까마득한 절벽이다.
이 정도 높이에서의 고공 수직 낙하.
다가오는 충격력은 지면에 부딪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어떤 내외공의 고수라도 생존을 장담치 못한다.
무언가 수를 내지 않으면 수면에 부딪히는 순간, 온몸의 뼈와 장기가 산산조각 나 즉사할 거다.
천만다행인 건 단단한 땅과 달리 헤집을 수 있는 물이라는 것.
충돌 시의 충격만 견뎌내면 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절대 죽을 수 없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이런 곳에서 너덜너덜한 넝마조각이 될 순 없다.
자신을 위해 삶을 내던진 은빛 여우와 실바람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그럴 순 없었다.
살아남는 것은 이제 마른 비에게 주어진 사명이나 다름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펼친다!’
지금까지 습득한 기술을 총동원해 육신을 보호한다.
그리고 반드시 살아서 귀환할 것이다.
거대한 장벽을 향해 맨몸으로 돌진하는 투우처럼, 피할 수 없는 충돌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우선은 강피와 철골!’
원래부터 질기고 단단한 피부에 자연기가 스며들어 강도를 높이니, 이는 전신을 둘러친 갑옷과 같다.
신체를 지탱하는 철근 같은 뼈대에도 자연기를 침투시켜 골격의 강인함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근육의 강화!’
휘몰아치는 충격에 연약한 장기가 버텨낼 리 없다.
바짝 조인 근육 사이사이마다 자연기를 겹겹이 둘러쳐 신체 내부를 보호할 방벽을 쌓는다.
‘체중의 분산과 경감!’
무거운 물체일수록 충돌 시의 충격력이 거셈은 당연한 이치다.
개미가 산꼭대기에서 추락해도 죽지 않는 것처럼, 한계까지 체중을 흩뜨리고 덜어낼 필요가 있었다.
수면에 닿는 순간, 낙엽 가누기와 깃털 날리기의 동시 운용으로 감당해야 할 피해를 감소시킨다.
‘날카롭게!’
부딪히는 면적을 최소한으로 줄여 신체에 가해질 충격을 완화하고, 물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든다.
쭉 편 마른 비의 몸이 머리부터 수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