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87화 (87/463)

87화

‘결!’

마지막은 결이다.

반탄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점.

일렁이는 수면의 결을 읽어내어 물의 흐름을 타고 입수한다.

두 손을 합장하듯 맞댄 건 본능이었다.

곧이어 마른 비가 아는 극예(極銳)의 일격, 올빼미 사냥의 첨예함을 담은 두 팔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수면을 향해 쭉 뻗어졌다.

‘수면을 뚫고 들어간다!’

단순한 입수가 아니다.

그냥 뛰어들어서는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

수면의 결을 찾아 물의 흐름을 타며 날카롭게 뚫고 들어간다.

덮쳐올 충격만 견뎌내면.

기나긴 추격전 끝에 마침내 살아남았노라 안도할 수 있었다.

‘버텨줘!’

이목구비를 보호하기 위해 남은 자연기를 모조리 머리 부근에 응집시킨다.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린 인간 송곳이 수면 위에 작렬했다.

꽈아아앙!

어마어마한 충돌음이 강줄기를 흔들었다.

10장 높이로 치솟은 물기둥에 저공비행하던 물새들이 혼비백산하고, 흩날리는 물보라가 난데없는 소나기를 강 위에 쏟아냈다.

푸드득―

두두두두!

펄쩍, 펄쩍―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던 동물들을 사방으로 날뛰게 한 불청객.

머리 위로 줄을 잇는 공기방울을 올려다보며 마른 비는 깊게, 깊게 가라앉았다.

‘해냈어…….’

기껏해야 두세 개, 대부분의 경우 단일로 발동했던 기술들이다.

자연기를 활용한 기예를 한꺼번에 몇 가지나 펼쳐낸 걸까.

한 줌의 기력도 남지 않았고, 몸은 성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

검치호가 긁어놓은 등 뒤의 상처가 가볍게 느껴질 만큼 끔찍한 통증이 육신을 울렸다.

그래도 어쨌든 살아남았다.

바위 곰 전사라고 한들 저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즉사했을 거다.

입에서 흘러나와 투명한 강을 물들이는 피 따윈 대수롭지 않았다.

몸은 엉망진창이지만, 환희에 가까운 짙은 쾌감에 마른 비는 웃었다.

‘근데… 이거 곧 죽겠는데…….’

강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 서서히 떠오르는 스스로를 느끼며, 소년은 의식을 잃었다.

* * *

“아무런… 할 말이 없소.”

하반신만 겨우 가린, 걸레조각이나 다름없는 의복.

애검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항상 오만하게 주위를 내려다보던 시선도 온데간데없다.

그 별호를 한 번이라도 들어본 자라면, 바로 노인을 알아보게 했던 회색빛 눈은 생기를 잃고 검게 죽어 있었다.

무엇보다 휑하게 비어 있는 왼팔.

스스로 자른 듯 앞에서 뒤로 비스듬하게 잘린 절단면은 검게 눌어붙은 피와 누런 고름으로 보는 이의 인상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봉검은 침중한 어조로 말을 잇지 못했다.

금방 돌아오리라 여겼다.

족장의 아들이라 하니 비범한 구석은 있겠지만, 그래 봤자 십 대 중반의 아이다.

설지굉이 남은 설검대를 모조리 이끌고 출격할 때만 해도 아이를 너무 거칠게 다루진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설검대는 5일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뒤늦게 흔적을 쫓아간 응목대는 곳곳에 널브러진 설검대의 사체를 마주해야 했다.

싸움의 흔적은 운남 땅 중심부에 위치한 고산으로 이어졌다.

응목대가 애뢰산의 초입에 가까워졌을 때.

그들은 머리를 산발하고 벌거벗다시피 한 채 흐느적거리는 걸인을 발견했다.

“서, 설검 장로님?!”

설지굉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건 둘째치고 왼팔이 사라져 있었다.

특이한 회색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경악으로 굳어버린 응목대원들을 지나쳐 비척비척 걷던 설지굉은 어느 순간 멈춰 섰고, 공포에 절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사, 살려… 줘…….”

탈진으로 기절하기 전, 설지굉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를 들쳐 업은 응목대가 창산으로 복귀한 건, 설검대가 산을 나선 지 9일째의 일이었다.

“설검 장로. 말을 해보시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엉망으로 훼손된 의복.

찢어지고 갈라진 상처의 형태.

독 내지는 산에 상한 듯한 피부.

인간과의 전투가 아니다.

이건 절대로 사람과 싸워서 남을 수 있는 상흔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와족. 와족의 전사들을 만난 것이오?”

시기상 조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봉검은 그리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짐승에게 당한 걸로 보이는 상처들은 와족의 반려수가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설지굉과 설검대 정도 되는 무인들이 운남에 널려 있는 야수들에게 당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할 말이… 없소.”

퀭하게 죽어버린 눈으로, 설지굉은 말했다.

“……알겠소. 고생 많았소이다. 일단 쉬면서 기력부터 회복하는 게 좋을 것 같구려.”

표정을 잃어버린 설지굉이 물끄러미 봉검을 올려다봤다.

‘……저 얼굴.’

얼굴을 찡그리고 있지만, 그건 자신을 멸시하거나 동정해서가 아니다.

봉검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건 몇 걸음 뒤에 서 있는 운검도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예의 없이 대했건만.’

큰 차이는 나지 않지만, 어쨌든 이들은 자신보다 연상이며 무림의 선배다.

하지만 자신은 첫 대면부터 선전 포고에 가까운 막말을 늘어놓았고, 그 후로도 십 년 내내 적대감만을 표출해왔다.

당연히 자신을 싫어할 거라고 여겼다.

‘그래도 한 식구라 이건가.’

싫어하는 건 맞다.

인정하지도 않을 거다.

자신을 장로직에 올린다는 장문인의 결정을 들었을 때,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던 이들이니까.

그럼에도 동문이라고 여기는 걸까.

엉망이 돼서 돌아온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준다.

자신은 그따위 것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이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처소까지 부축해 드리리다.”

봉검의 얼굴에는 꼴좋다거나, 기만하려는 기색 따윈 없었다.

하나 남은 오른팔을 조심스레 거드는 봉검을 보며, 설지굉이 실소했다.

“킥킥킥!”

이것인가.

당가의 애송이가 말했던 진정한 정도 어쩌고 하는 게.

아니지, 아니야.

이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서 만신창이가 된 누군가를 보며 느끼는, 지극히 당연한 연민일 뿐이다.

상대가 겪었을 지옥 같은 시간들이, 좌절이, 고통이, 가엾고 안쓰러운 거다.

‘하지만 그런 걸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 훨씬 더 많지.’

자신이 봉검이라면?

큰소리 탕탕 치고 나가더니 그깟 꼬맹이 하나 못 잡은 거냐.

휘하의 무인들을 몰살시킨 머저리가 무슨 염치로 살아 돌아왔느냐.

마음껏 비웃었을 거다.

평소에 그토록 싸가지 없게 대하더니 고작 이 정도 실력이었냐며 모욕을 퍼부었을 거다.

‘이 차이인가…….’

바닥까지 떨어지고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보이는 느낌이다.

머릿속이 헝클어져서 정리가 되지 않지만, 분명 그랬다.

반면 명확히 보이는 것도 있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관계라지만, 저토록 노골적인 태도라니.

자신이 건재했을 때는 누구보다 우대해주고, 존중해주는 척했던 자.

하지만 예상보다 강한 세력을 일구자 곧바로 배척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자.

자신이 추락하자마자 숨길 생각도 없이 노골적인 경멸과 멸시를 내비치는 자.

저 뒤에서 자신이 보였을 반응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공지량이, 설지굉의 회색 눈에 선명히 비쳤다.

* * *

가슴이 답답하다.

코가 맹맹하고, 입부터 폐까지 이어지는 경로에서 강한 이물감이 든다.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꽉 들어차 숨통을 막는 느낌.

의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본능이 한발 앞서 호흡을 방해하는 것들을 토해냈다.

“쿨럭, 쿨럭! 으웨엑―!”

입만이 아니다.

눈과 코에서도 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온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마른 비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어억…! 카악! 칵…! 으웩!”

엉망진창이다.

머리와 귓속은 무언가가 들어앉은 듯 둔중하고, 눈과 코는 매워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살았어!’

들이마신 강물을 토해내고, 한참을 쿨럭이며 기침을 하다가 뒤늦게 자각이 들었다.

살아 있다.

살아남았다.

제대로 숨을 쉬기 힘들고,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프지만 이 정도로 그친 게 어딘가.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감격스럽다.

울컥 치미는 격정을 억누를 수가 없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땅의 질척질척한 감촉이.

코끝을 간질이는 강의 냄새가.

뼛골을 울리는 통증마저도.

새로 태어난 듯 모든 게 너무나 생경하게 다가온다.

온몸을 짓누르는 격통까지 즐기며, 마른 비는 순수하게 감격했다.

“아…!”

살아 있다는 기쁨에 취해서 잊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올 수 있었는지를.

누구 덕에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지를.

“흑…! 흐흑, 흑…!”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극심한 슬픔이 뒤이어 찾아왔다.

미친 사람이 널을 뛰듯 마른 비의 감정 기복은 극에서 극을 오가고 있었다.

“흑, 흐흐흑…!”

터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은빛 여우. 실바람.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호했던 소년은 이번엔 목 놓아 꺼이꺼이 울었다.

“아아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데 오열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먹은 물을 토해낼 때보다 훨씬 진한 눈물과 콧물이 마른 비의 얼굴 위에서 지저분하게 섞였다.

‘난…… 약해!’

사무치는 진실이다.

맹수들을 펑펑 눕히고, 살수들을 제압했으며, 점창의 이대 제자와 설검대원을 쓰러뜨렸다.

제법 강해졌다고 자평했다.

이 정도면 전사라고 불려도 되지 않을까 흐뭇해했다.

하지만 설지굉이 나타날 때마다 위기를 겪었고, 흉웅 때문에 바짝 긴장했으며, 검치호 앞에서는 죽음을 예감해야만 했다.

그때는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에 집중하기 바빴다.

뒤쫓는 적이 없어진 지금.

은빛 여우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후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지난 며칠을 돌이킬 여유가 생긴 지금에 와서야.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도록 와 닿는다.

‘내가… 내가 좀 더 강했다면…!’

그랬다면, 여규와 원승을 두고 뒤돌아서지 않았을 거다.

은빛 여우와 실바람을 죽게 놔두지 않았을 거다.

정신없이 도망만 치지 않았을 터다.

나를 핍박하는 적들과 당당히 마주했을 거다!

‘내가 약하기 때문이야!’

이제 고작 십오 년을 살았다.

중원을 주름잡는 구파일방의 정예를 상대로 이만큼 할 수 있는 소년은 없다.

하물며 점창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설지굉까지 따라붙은 바에야.

설령 우둔한 땅이나 매서운 눈이었다 해도 서슴없이 도주를 택했을 거다.

하지만 마른 비에게 있어 보편적인 현실 따윈 중요치 않았다.

자신 때문에 애꿎은 목숨이 스러졌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아플 뿐이다.

‘아버지였다면!’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설지굉? 설검대?

불끈 쥔 두 주먹만으로 그 자리에서 모조리 때려눕혔을 거다.

흉웅? 검치호?

다시는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두드려 패서 철저하게 굴복시켰을 거다.

지금껏 아버지를 마주한 모든 맹수들이 그랬듯, 놈들은 자신이 자랑하는 신체의 일부를 내놓고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을 거다.

이토록 무력할 수가 없다.

지난 몇 달간 잔재주 몇 개 습득한 거 가지고 강해졌다고 자신한 스스로가 한심하고 부끄럽다.

누구도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할 거목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키고 싶은 것들을 지킬 수 있다.

“아아아아아!”

‘난, 약해!’

뒤엉킨 슬픔과 자책을 토해내며 소년은 목 놓아 울었다.

“훌쩍. 훌쩍.”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을 만큼 서럽게 흐느꼈다.

여전히 가슴은 아프지만, 처음에 비하면 한결 후련해진 것 같았다.

‘근데… 여기가 어디지?’

그제야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 든다.

고개도 들어 올릴 힘이 없는 마른 비는 처음 정신을 차렸던 자세 그대로 누워 있었고, 소년의 눈에 별이 무수히 박힌 밤하늘이 비쳐 들었다.

‘감각에 집중해보자. 여긴…….’

피부에 와 닿는 질퍽한 감촉과, 근처에서 느껴지는 수기(水氣).

그리고 바람에 실린 민물 특유의 물비린내.

강가였다.

정신을 잃었을 때 와류에 휩쓸리지 않고 운 좋게도 강변으로 떠밀려온 모양이었다.

‘일어나야 하는…….’

꼬르륵―

‘아… 배고파…….’

인간이란 이토록 간사한 존재였던가.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람처럼 꺽꺽대며 오열한 게 방금 전인데, 조금 진정됐다고 본능적인 욕구가 고개를 든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지난 며칠간 몸을 있는 대로 혹사하면서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적이 없으니까.

툭.

‘응?’

무언가가 머리맡에 떨어지는 소리.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쳐온다.

갓 사냥한 짐승 특유의 피비린내였다.

‘뭐야? 뭐지?’

마른 비가 낑낑대며 겨우 고개를 꺾은 곳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대지 위에 웅크린 ‘그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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