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88화 (88/463)

88화

“너…!”

하긴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천길 아득한 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마른 비가 추락한 곳은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그 정도의 물이 낙하하는데 평범한 와류가 형성될 리 없다.

몸이 정상이어도 헤어나기 힘들 판인데,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멀쩡히 살아날 리 만무한 것이다.

더군다나 여긴 대자연의 기가 그 어느 곳보다 풍부한 애뢰산이다.

강에 거주하는 생물들이라고 만만할 리 없다.

정신을 잃고 피 냄새를 짙게 흩뿌리는 먹잇감을 ‘물길이 험하니 살펴 가십시오~.’ 하며 두고 본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날 구해준 거야?”

침장(針匠)이 심혈을 기울여 수놓은 비단 같은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빛의 밤.

미인의 눈썹을 떼어와 건 듯 쪽진 그믐달이 그림처럼 걸렸다.

후광처럼 쏟아지는 달빛과 별빛 아래, 그보다 눈부신 존재가 눈을 들어 소년을 바라봤다.

청광(淸光) 어린 푸른 눈은 티 없는 자연기의 발로다.

대자연의 그것에 한없이 가까운 기운이 짙푸른 귀화를 피워 올렸다.

또한 그것은 핏줄의 증거다.

강대한 힘을 지닌 먹이사슬 최정상의 포식자.

운남의 대지에 던져진 순간부터 군림이 허락된 제왕의 증표였다.

하지만 제 아비와도, 아비의 아비와도 다르다.

쏟아지는 별빛을 미끄러뜨리는 순백의 털.

중원에서 사방신(四方神)으로 숭앙하는 사수(四獸) 중 유일하게 현세에 거하는 존재가 소년의 망막을 채웠다.

훗날, 중원을 떨쳐 울릴 수왕 마른 비와 그의 반려수 백호가 운명을 공유하게 된 순간이었다.

* * *

“괜찮은 것이냐.”

공유립이 앞서 걷는 여규를 착잡한 표정으로 보며 물었다.

괜찮을 리 없다.

하지만 그리 물었다.

달리 꺼낼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집단 대 집단이 맞붙는 전장의 최전선.

처음 칼날을 부딪치는 초전(初戰)은 전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에 앞서, 양측의 사기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측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적의 예봉을 꺾기 위해 포진하는 건 불문가지였다.

전쟁은커녕 며칠 전에 처음 실전을 겪은 꼬맹이다.

스물 중반에 이르는 일, 이대 제자들조차 후방에 대기하며 지원 병력으로 운용되는 게 현실일진데.

열네 살 소년을 선봉에 세우는 건, 가서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가혹한 처사다.”

걱정과 염려가 버무려진 눈빛.

공유립은 오랜만에 마주한 사제가 안쓰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사형.”

하지만 소년은 씩씩하기만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안색이다.

두 눈엔 한 점의 두려움이나 걱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허세나 꾸며낸 의연함이 아닌 진실한 담담함이었다.

공유립의 눈이 이채를 띠고, 감탄이 흘러나왔다.

“성장했구나!”

오랜만이라지만 기껏해야 한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이대 제자들에게 구타를 당한 여규를 모옥까지 데려다 준 날.

그날 이후 처음 대면한 사제는 몰라보게 의젓해져 있었다.

‘한순간에 커버리는구나.’

잠깐 보지 못한 사이, 여규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눈빛이 달라졌고, 신색이 평온해졌으며, 표정이 밝아졌다.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불신이 걷혔다는 뜻이다.

기도는 조용히 흐르고, 정광은 눈동자 너머로 고요히 숨었다.

무공의 경지가 몇 단계는 상승했단 증거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이룩한 여규의 급격한 진보가, 공유립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건우라는 와족 소년 덕분인 게 틀림없었다.

“좋은 사람인가 보구나.”

공유립이 안 봐도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네! 제 첫 친구예요, 사형.”

마른 비에 대해 말하는 여규는 즐거워 보였다.

누군가가 정말 좋으면, 마음에 꼭 드는 선물을 받았을 때처럼 자랑하고 싶어진다.

가까운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고, 소개하고 싶고,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처음이다.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소중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여규는 신이 나서 늘어놓았다.

한참을 마른 비에 대해 말하던 여규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흠칫했다.

“아…! 죄송해요, 사형. 곧 싸워야 할 적인데…….”

“하하, 괜찮다. 네가 친구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 아니더냐. 안타깝게도 적으로 마주치게 되었지만, 듣기만 해도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 같구나. 집단끼리의 사정과는 무관하게, 좋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 꼭 소개시켜다오.”

“네, 꼭 보여 드릴게요!”

둘 다 알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 자신들이 살아남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될 거란걸.

여규는 최전선에 서는 게 확정되었고, 공유립은 아직 역할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여규 못지않게 힘겨운 임무가 주어지겠지.

‘아버지는 날… 제거하려 하니까.’

혹독한 진실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며 애써 눈 돌려온 현실을, 이제는 공유립도 받아들인다.

둘 다 본인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미래를 이야기한다.

전쟁 후에 다가올 평화의 시기를 그린다.

그것은 고래로 전장에 나서는 자들의 공통된 소망이었다.

“이야길 들었어요. 사형은 괜찮으세요?”

이번엔 여규가 안타깝게 물을 차례다.

몸은 의복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공유립의 얼굴에는 아직도 새파란 멍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하하. 괜찮다. 하루 이틀이 아닌걸, 뭐. 그래도 전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팼는데, 이번엔 정도가 심하더구나. 형님이 아마….”

“형이 아니에요.”

한 번도 공유립의 말을 끊은 적이 없던 여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끝까지 듣지 않고 딱 잘라 이야기했다.

“사형. 그런 새끼는 형이 아니에요. 미치광이일 뿐이죠.”

“……!”

공유립은 진심으로 놀랐다.

누가 창산에서 공유환에 대해 저렇게 말할 수 있던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소불위한 존재.

아니다.

봉검, 운검, 설검 장로 정도 되는 거물들은 공유환이 알아서 고개를 숙이니 그들은 예외다.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셋을 제외하면 모두가 공유환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는 게 현실이었다.

공지량이 그렇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도록 야금야금.

십 수 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정신을 차렸을 때, 점창파는 공씨 부자의 입맛대로 놀아나는 사조직에 가깝게 변질되어 있었다.

“저번에 하신 말씀,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무얼 말이냐?”

“그… 서출…… 이란 출신성분에 대해서요.”

“아, 그건…….”

“사형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봉검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이다.

여규는 공유립의 씁쓸했던 표정이 내내 걸렸고, 이번 사건을 통해 원승과 가까워지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원승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아비에게 없는 사람 취급받아왔고, 형에게는 어릴 적부터 수시로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연무장에서의 일.

무인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면 죽고 싶을 거다.

게다가 구타한 자가 배다른 형.

여규는 공유립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 정 많은 사형은 자신이 대견하고, 때때로 자신을 보며 힘을 얻는다고 했었지만, 그건 지나치게 겸손한 말이다.

여규가 보기에 공유립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피붙이에게 받는 무시와 핍박, 구타, 경멸…….

그로 인한 주변인들의 수군거림과 드러나지 않는 따돌림.

여규로서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끔찍함이었다.

“절대 사형의 잘못이 아니에요. 사형은 장문인과 대사형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들었어요. 제가 들은 건 일부에 지나지 않겠죠. 저는 하실 만큼 하셨다고 봐요.”

크게 흔들리는 공유립의 눈을, 여규는 똑바로 마주 봤다.

“혈육의 연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지만, 그 연을 유지하는 건 인간이라고 들었어요. 사형은 할 수 있는 걸 다했어요. 이번 일…… 대사형이 눈곱만큼이라도 사형을 동생이라고 여긴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짓이에요. 그걸 가만히 놔둔 장문인도 똑같은 생각이겠죠. 저는 저들이…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거침없는 언사다.

또한 주제넘은 참견이다.

절대로 사제가 사형에게 건넬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건넨다.

그것은 공유립이 홀로 감내해야 했을 지독한 외로움과 비관을 옅게나마 맛본 여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제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사형이 저를 아껴주셨듯이, 저도 사형이 염려되기에 이 말씀은 꼭 드려야겠어요.”

공유립은 점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어린 사제가 이토록 진솔하고 거침없이 감정을 전하는 아이였던가.

불과 한 달이다.

어른에겐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기간이었지만, 아이의 시간은 세차게 흘러온 게 틀림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청년에게, 소년이 말한다.

“사형. 결단을 내리셔야 해요.”

‘결단. 결단이라고.’

많은 것이 함축된 의미다.

항상 보살펴왔던 아이에게.

안타까워 다독여주려 했던 순간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문제의 핵심을 관통하는 이야기였다.

공유립도 이제는 안다.

아버지가 조용히 지내던 자신을 왜 갑자기 사절로 보낸 것인지를.

전쟁을 위한 단계를 착착 밟아가면서도 자신에겐 일언반구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를 위한 사절로 파견되었다고 기뻐했다.

이제야 아버지가 나를 봐주신다며 들떠 있었다.

만약 와족이 공지량의 속내를 짐작했거나, 경우가 없는 야만인들이었다면 자신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복잡한 절차를 단축시키는 전쟁의 신호탄이 되었을 거다.

알면서 보낸 거다.

그러면 일이 편해지니 내심 기대하며 일부러 보낸 거였다.

돌아가는 사태를 주시하고, 정보를 취합했다.

그리고 마침내 진실에 다다른 순간.

공유립은 정신이 아득해지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형님을 장문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날…!’

한 번도 많은 걸 바란 적이 없다.

따뜻한 한마디, 인자한 웃음 한 번이면 자신은 모든 걸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자신은 유용하게 써먹고 버릴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결단이라 했더냐? 그래, 규야. 네 말이 맞다. 이제… 더 이상은. 그들의 인정과 온기 따위 바라지 않겠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유환에게 개처럼 얻어맞은 그날.

그들을 향한 실낱같은 기대마저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바라고 있었다.

언젠가는 찾아주겠지.

그래도 혈육이 아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와 형에게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여전히 갈구하고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를 홀대하고, 이용하는 걸로도 모자라 대놓고 죽이려는 자들을 어찌 가족이라 할 수 있겠나.

가족? 이제부터 없는 셈 친다.

이 순간부터 나는 아비가 없는 사생아다.

평생 불운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어머님만이 유일한 내 혈육이다.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애써 외면해왔을 뿐.

공유립은 미루고 미뤄온 결단을 내렸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지에 던져지겠지.’

아비, 아니 그자를 닮아서인지 머리 회전은 상당히 빠른 편이다.

설검대주를 포함한 설검대 절반은 죽을 수밖에 없는 곳에 투입됐다.

명문 정파에 걸맞지 않은 삼대 제자들 역시 전멸할 걸 뻔히 알면서 내보냈다.

장문인은 이번 전쟁에서 권력의 확립과 혈족 승계에 거치적거리는 요소들을 모조리 정리할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은 필연적 귀결이다.

서출이라고 하나 피가 섞인 자신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들이 모르는 것.’

비상한 두뇌와 함께 그자에게 물려받은 또 하나의 재주.

굳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무의 재능 역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아비에게 인정받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련을 거듭해왔다.

‘예측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이제는 손 놓은 채 타인이 계획한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겠다.

홀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여규가 그랬듯, 자신 역시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는다.’

여규와 헤어지고 상념을 거듭한 공유립이 장문전 집무실 앞에 섰다.

무인답지 않게 온유하기만 했던 그의 눈에 대찬 각오가 서렸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힘차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기척을 흘렸기 때문에 공지량은 방문자가 자신이란 걸 알 거다.

응목대주도 마찬가지다.

그들에 비해 경지가 떨어지는 공유환만이 뒤늦게 알아보고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뭐야? 너 이 새끼, 네가 여길 왜 와?”

대꾸하지 않는다.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단단한 눈빛으로 뜻한 바를 전할 뿐이다.

“장문인.”

“전쟁이 코앞이라 바쁘다. 용건만 간단히 하고 나가라.”

아비는, 아니, 그자는 한결같았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귀찮은 파리를 치우듯 손을 휘저을 뿐이다.

예상한 바다.

이걸로 마지막 남은 감정의 찌꺼기마저 털어버린다.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

예상치 못한 말에 그제야 눈을 들어 올린 아비를 보며, 혈육의 정을 끊어버린 아들이 말했다.

“최전선. 이번 전쟁에서 최전선에 서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청년의 시간이 밀도 있게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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