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난 마른 비야. 구해줘서 고마워.”
쏟아지는 별빛을 등지고 선 백호는 영문을 알 수 없단 표정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자신도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두 번이나 모습을 드러내며 눈앞에 있는 인간의 새끼를 구했다.
아이는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고, 정신을 잃은 소년을 포식하고자 몰려드는 짐승들을 물리치며 옆자리를 지켰다.
한데 눈을 뜬 소년이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저건 뭔가?
왜 앞발을 내밀지?
뭘 어쩌라는 말인가?
푸른빛 눈동자에 의문과 당황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아! 이렇게 하는 거야. 앞발 줘봐.”
발가락을 그러모은 인간의 새끼가 오른쪽 앞발을 쭉 내민 채 다가왔다.
그러더니 왼쪽 앞발을 뻗어 자신의 오른쪽 앞발을 쥐려 한다.
백호는 경고의 울음을 발했다.
“크르릉…….”
소년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실실 웃으며 넉살 좋게 다가왔다.
“아이참. 싸우자는 거 아냐. 반갑고, 고맙다는 인사란 말이야. 발 줘봐, 발.”
“크헝!”
마른 비가 뻗은 왼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백호가 앞발을 뒤로 휙 뺐다.
난데없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이빨을 드러낸 백호가 당장 물러나라고 울부짖으려는 찰나, 눈앞까지 다가온 소년이 말했다.
“너, 나 좋아하지?”
마른 비를 만나기 전까지 인간이란 생물을 마주친 적 없는 백호다.
당연히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저 눈.
호기심과 반가움에 반짝이는 두 눈이 너무도 정겹게 다가든다.
자신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렸다면, 이 인간의 새끼는 무언가 알고,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다가온다.
그 묘한 확신에 동화되어,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앞발을 내주고야 말았다.
툭.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주먹이랑 앞발을 부딪치는 거라구.”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
왜 앞발과 앞발을 가져다 대는 건지.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멍해진 백호의 눈에, 신나서 앞발을 툭툭 부딪혀대는 마른 비가 선명하게 담겼다.
* * *
“몸은 좀 어떻습니까?”
머리를 과할 정도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청년이다.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데다 주름 하나하나까지 신경 쓴 의복은 보는 사람에게 왠지 모를 불편함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만 가지고는 딱히 문제 될 게 없다.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탐색하는 저 눈!
눈치채지 못하게 살핀다면 모를까, 대놓고 위아래로 굴러다니는 눈동자는 지나치게 말끔한 외양과 맞물리며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주었다.
“…….”
그럼에도 시선을 받은 노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패기를 뿜던 눈동자는 타고 남은 재를 그러모은 듯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끝났군.’
노인의 상태를 파악하라는 명을 받고 들른 참이다.
바닥끝까지 추락했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회안검이기 때문이다.
외팔이의 삶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2개 성에서 이름을 휘날렸던 무력이 어디 갈 리 없다.
앞으로의 행보를 가늠하고, 선택을 종용할 생각이었는데…….
‘직속 세력은 전멸했고, 몸도 불편해진 데다 투지까지 잃었어. 이자는 끝났다.’
설검대의 궤멸.
예상치 못한 결과지만, 나쁘지 않다.
어차피 곧 있을 전쟁에서 사지에 밀어 넣을 계획이었고, 그들이 없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기 때문이다.
와족에 대한 대비는 철저하게 끝내놓았으니까.
노인의 수족이나 다름없던 자들이 모조리 잘려나갔으니 오히려 해야 할 일 하나가 줄어든 셈이었다.
그가 다시 무인들을 키워 세력을 일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수제자마저 와족과의 전투 중에 사망해버렸다.
나날이 커지는 그의 입지를 경계했던 일이 허무하게도, 노인은 하루아침에 재기 불가능한 폐인이 되어 주저앉았다.
설지굉.
그는 끝난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지.’
밑으로 기어 들어오느냐.
창산을 떠나느냐.
한 울타리에 소속된 식구인데, 피폐해진 사람을 다독이진 못할망정 무슨 막돼먹은 생각이냐고 욕할 수 있다.
사문 내 권력의 향방에 무관심한 자들이라면 말이다.
가령 저 봉검과 운검 장로처럼.
실제로 그들은 십 년 내내 자신들에게 적의를 드러냈던 설지굉을 부축해서 휴식을 취하게 도왔다.
‘아주 대단한 군자들 납셨군그래.’
배알도 없는 인간들이다.
그따위 대접을 받고도 챙겨줄 마음이 든단 말인가.
아니, 진심이 아니겠지.
허구한 날 입바른 소리나 뱉어 왔으니 주변 시선이 신경 쓰여서 마지못해 그런 거다.
위선자들 같으니라고.
엄청난 무력과 명성, 봉검대와 운검대라는 점창 최강의 무력단체를 휘하에 두고 있지만 않았다면 진작 정리했어야 할 인간들이었다.
‘내가 장문인이 됐을 땐 둘 중 하나다. 철저히 굴복시키거나 아예 지워버리거나.’
손쓸 수 없단 이유로, 문파를 위해 꼭 필요하단 이유로 아버지처럼 놔두지 않는다.
그들을 존중해줬던 결과가 어땠나.
여 장로를 파문한다는 장문인의 결정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뒤집은 자들이다.
자신은 그딴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머리가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습관적으로 쓸어 넘기며, 공유환은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듯한 설지굉을 냉정하게 바라봤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공지량이 설지굉을 점창에 들이고, 그가 세력을 키우는 걸 가만히 놔둔 이유는 하나다.
봉검과 운검을 견제할 패로서 유용하기 때문에.
하지만 설지굉은 당초의 예상보다 훨씬 큰 세력을 일구었고, 대장로의 지위까지 욕심을 냈다.
공지량은 말 잘 듣는 개를 원했지만, 설지굉은 제 욕심을 위해 움직이는, 길들일 수 없는 늑대였다.
장문인의 결정에 토를 달만큼 강한 발언권을 가지는 건 봉검과 운검만으로도 족하다.
그런 자가 또 생기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지굉을 제지하지 않은 것은 아직까진 쓸모가 있기 때문이었다.
십 년 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온 공지량은 설검대를 가장 위험한 전장에 몰아넣어 화살받이로 쓸 생각이었고, 그럼 자연스레 정리될 일이니까.
하지만 설검대가 전멸했다.
팔 하나가 잘리고 투지까지 잃어버린 설지굉은 이번 전쟁에 참전하는 게 불가능하다.
즉.
이제 그의 효용가치는 다했으며, 정리할 시점이 됐다는 뜻이었다.
‘강호에서 그 정도 굴러먹었으면 말 안 해도 알겠지, 설 장로? 권력에 한 번이라도 발 담갔단 자가 힘을 잃어버리면 둘 중 하나야. 굴종을 맹세하고 휘하로 들어가던가, 완전히 손을 털고 떠나던가.’
그나마 점창이 정파이기에 망정이지, 사파나 마교였다면?
당장에 목이 떨어졌거나, 다시는 재기할 수 없는 불구의 신세가 되었을 거다.
말 잘 듣는 충견으로 키우기 위해 데려왔더니만 주변의 개들을 끌어 모아 주인의 신경을 긁어놨으니까.
그리고 집안까지 들어와 방 한 칸을 떡하니 차지하려 했으니까.
‘주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이상 언젠가는 가죽이 벗겨질 각오는 했어야지. 그깟 꼬마 하나 때문에 이토록 허무하게 몰락할 줄은 누구도 몰랐지만.’
무림에서 구르고 구른 노강호인 설지굉이, 자신이 견제받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챘을 리 없다.
안다.
알고 있다.
그가 모른 척한 이유 또한 공지량과 같다.
자신을 대장로에 올릴 수 있는 건 장문인뿐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장로가 되어야만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서로의 속내를 알면서도, 필요에 의해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온 것이다.
하지만 설지굉은 가지고 있던 모든 패를 잃어버렸다.
‘아버지는 이자가 창산을 떠날 거라고 했었지.’
자신의 생각도 같다.
설검 장로는 모든 걸 잃었다 해도 꼴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인간이 아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걸 할 성격이 못 된다.
그렇다면 깔끔히 사라지는 길밖에 없지 않나.
스스로 나가지 않는다면 나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줄 것이고.
‘곱게 보내는 드리지.’
원칙상 문파의 제자가 파문을 요청하면 사문에서 받은 무공을 폐함이 마땅하나, 그의 무공은 점창의 것이 아니다.
또한 그는 점창의 요청으로 영입된 자였다.
특수한 상황과 그간의 공로를 감안하여 떠난다면 고이 보내줄 생각이었다.
‘그 뒤는 장담 못 하겠지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무인이 전쟁을 겪으며 좌절에 빠졌고, 스스로 파문을 요청했다.
점창은 그의 요청을 관대하게 수락했고, 노후를 보낼 자금까지 쥐여서 배웅해줬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운남 어딘가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어디서나 있을 법한, 흔한 이야기 아닌가.
점창을 의심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증거가 없는 이상 음모론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응목대주는 이런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대단히 능숙한 남자였다.
‘아버지가 벌인 일들을 상세히 알고 있는 당신을 살려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우릴 원망하진 말라고.’
공유환이 찬찬히 상황을 되짚는 와중에도, 설지굉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볼 것도 없군. 완전히 끝났다. 이자는.’
설지굉의 눈빛, 몸짓, 기도 하나하나까지도 상세히 살핀 공유환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감당할 수 없는 무력과 이용가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손하게 대해온 자.
절대 마음에 들었을 리 없다.
설지굉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걸 확신하자, 지금껏 그 앞에서 눌러두었던 본성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공유환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설지굉의 귀 옆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당신 말이야. 그간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 근본도 없는 길바닥 출신 주제에 장로라며 거들먹대는 꼴이라니. 그게 언제까지 영원할 줄 알았나?”
나지막이.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도저히 어쩔 수 없었던 상대를 조롱하고 짓누르는 희열.
공유환의 얼굴이 저열한 쾌감으로 뒤틀렸다.
“당신이 고개를 조아리며 잘 부탁드린다고 아양 떠는 걸 보고 싶은데 말이지. 꼴에 무인이라고 그러진 않겠지? 나중에 정신이 들면 말이야. 조용히 떠나라고. 살려는 드릴게.”
공유환이 일순 주춤하며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한 조각의 정신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지랄 같은 성격에 가만있을 리 없는데, 설지굉은 끝까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확실하군.’
혹시나 해서 감행한 도발이다.
개인적인 욕구를 해소할 의도도 있었지만, 설지굉이 정신을 놓은 척 연기를 하는 건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공유환이 아는 설지굉은 작은 도발조차 참아 넘길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확실하다.
이자는 재기가 불가능하다.
완전히 끝났다!
“큭큭큭. 천하의 회안검의 말로가 참으로 비참하구만. 이봐, 늙은이. 뭐 하나 알려줄까?”
그렇다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공유환의 얼굴이 한층 더 비열하게 일그러졌다.
“당신 수제자랑 설검대 말이야. 죽으라고 보낸 거야. 죽을 수밖에 없는 사지로.”
상대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도 꺼내서는 안 될 말이다.
하지만 공유환은 그의 귀에 진실을 속삭였다.
해서는 안 될 말을, 꼴보기 싫던 상대에게, 여과 없이 늘어놓으며 능욕한다.
희번덕대는 눈알과 귀밑까지 찢어진 미소.
준수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설지굉의 귀에 속삭이는 공유환은 섬뜩한 광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쳇.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재미가 없군.”
순식간에 평소의 멀끔한 얼굴로 돌아온 공유환이 설지굉의 초점 없는 눈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
툭툭.
“정신이 돌아오는 대로 얼른 떠나라고, 늙은이. 마음 변하기 전에.”
설지굉의 뺨을 손바닥으로 두드린 공유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쾌한 날이구만. 크하하하!”
쾅!
문이 닫히고,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듯 침묵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스륵-
사람을 통째로 찢어발길 것 같은 눈동자가 잿빛 살의를 담고, 공유환이 나간 문을 불사를 듯 노려봤다.
‘이……!’
타오르는 분노가 용솟음친다.
발끝에서부터 치솟는 노기에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