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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90화 (90/463)

90화

검이 없으면 어떠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이죽대던 애송이의 목을 비틀어 꺾고 싶었다.

‘이 설지굉이 이런 모욕을…!’

제 애비를 닮아 교활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어찌 모를까.

장문인의 가면 속 추악한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안다.

지난 십 년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점창의 비약적인 성장을 옆에서 지켜봐 왔기 때문에.

공지량은 사파에서도 극히 질이 안 좋은 놈들이나 쓸법한 짓들도 마다하지 않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점창을 키워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짧은 기간 동안 이토록 덩치를 불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상세한 내막을 아는 자.

자신과 응목대주 정도가 전부였다.

‘큭큭큭, 토사구팽인가. 얼간이들이나 당하는 일이라 여겼거늘. 아니지, 그보다도 못하지 않나. 토끼를 사냥하는 것조차 실패하고 가죽이 벗겨지는 늙은 개의 꼴이구나.’

홀로 떠돌 때는 한 적이 없었던 더러운 짓들에 손을 담갔다.

이 지시가 정말 점창의 장문인이 내린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일들도 있었다.

오직 당가의 애송이를 무릎 꿇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눈을 감고 검을 휘두른 지난 십 년이었다.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확고한 지위를.

장문인은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할 해결사와, 대장로들을 견제할 새로운 인물을.

서로의 이해가 합치한 거래였다.

스스로의 능력을 믿었고, 효용가치를 믿었다.

한배를 탄 이상 자신을 내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설령 딴마음을 먹는다 해도 그의 치부를 아는 자신을 어쩔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것도 최소한의 힘을 지니고 있어야 가능한 일.’

순진했다.

그리고 오만했다.

이렇게 갑자기 모든 걸 잃게 될 줄은 몰랐고, 장문인은 기다렸다는 듯 치고 들어왔다.

아니, 자신을 잘라낼 계획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자신만 몰랐을 뿐.

‘조용히 떠나려 했거늘.’

평생을 들개처럼 살아온 인생이다.

떠받쳐줄 세력도, 뒤를 봐줄 배경도 없이 오직 검 한 자루에 기대 사는 자가 얕보이면 끝장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업신여김을 당할 요소가 다분했다.

작달막한 체구와 일반적인 중원인들과는 다른 회색의 눈.

비웃는 자들을 뭉개고, 마주친 적들을 잔인하게 부쉈다.

과할 정도의 손속과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자존심.

그것은 비빌 곳 없는 들개가 늑대로 위장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나 다름없었다.

수십 년을 그리 살다 보니, 그것은 어느 순간 스스로를 규정짓는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뒤집어쓴 가면이 눌어붙어 얼굴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황…….’

왜 모를까.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녀석은 근본이 글러먹었다.

무의 재능은 있었지만, 도를 넘은 잔인함과 뒤틀린 인성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지독히도 외로운 인생에 유일하게 다가온 녀석이었고, 그래서 받아들였다.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

사부라면,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최소한의 기준 정도는 세워주었어야 했다.

무공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사부의 역할이 끝나서는 안 되었다.

정파인이라기엔 자신도 문제가 많은 족속이지만, 녀석은 정말 근본부터 썩은 놈이었다.

알면서 방치했다.

누군가를 계도한다는 게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언제나 본인의 일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아니다.

핑계다.

솔직히, 귀찮았다.

‘그래도 의리는 있는 놈이었지.’

하늘같이 떠받들던 사부가 눈앞에서 새파란 애송이에게 패했을 때.

그리고 정도가 어쩌고 하는 훈계까지 들었을 때.

그 실망과 부끄러움이 얼마나 컸으랴.

하지만 녀석은 악을 쓰며 당가의 무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집단 구타에 가까운 폭행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된 녀석은 울부짖었다.

‘으아아아! 개 씨팔! 엿 같은 새끼들! 사부, 분통 터져서 못 살겠소! 우리도 어딘가에 들어갑시다! 저 새끼들, 다 조져 버리지 않으면 울화통이 터져서 죽어버릴 것 같소!’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금간 자존심을 복구해야 했다.

이제는 완연히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가면의 깨어진 부분을 수복해야 했다.

그래서 점창에 들어왔다.

뒷배와 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일대일로 다시 붙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생각보다 좋았지.’

외로워서, 필요에 의해서 정황을 받아들인 것처럼 설검대 또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조직했다.

입지를 다지고, 써먹을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열심히 가르쳤다.

처음엔 그저 이익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사람 간의 관계란 생각보다 묘했고, 어느 순간 정이 들어버렸다.

자신을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지난 십 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허무하구나.’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살아온 인생이다.

그게 옳다고 믿었고,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여겼다.

한데 모든 게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고 나니.

가눌 수 없는 허망함이 밀려온다.

이 나이에, 이 지경이 돼서까지 그토록 가시를 세우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다.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당가의 애송이와 다시 붙는다 치자.

쉽지도 않겠지만, 만약 이겼다고 치자.

그러면?

뭐가 남는가?

금간 자존심이 치유되어 하늘을 날 듯한 고양감을 느낄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설검대를 휘말리게 하고, 나름 정붙인 사람들을 이용한 게 마음 편할까?

거기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정황과 설검대를 모조리 잃은 지금에 와서야 알겠다.

후회했을 거다.

헛된 자존심밖에 내세울 게 없는 인생이라 그토록 집착했던 거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변인들에게 마음이 흘러가고 있었다는 걸, 설지굉은 모든 걸 잃은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그 상실감과 허망함에, 미안함에, 애잔함에.

뒤늦은 깨달음에…….

조용히 돌아서려 했다.

여기서 끝내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이대로는 갈 수 없다.

‘복수해주마.’

처음으로.

나를 위해서가 아닌 타인을 위해 움직인다.

그리고 그 대상은 와족이 아니다.

그들도 결국 휘말린 자들일 뿐.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놈들.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방식대로 복수해준다.

드러내지 않고, 철저한 기회를 잡아서.

고이는 걸 넘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노인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 * *

“장문인.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짐작이 되질 않습니다.”

한쪽 눈을 찡그린 지석인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공지량도 마찬가지였다.

“글쎄…….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공지량이 갑작스런 방문자의 난데없는 요청을 되새겼다.

‘최전선. 이번 전쟁에서 최전선에 서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맞으며 맞는 대로.

아무런 의지나 의사 표현 없이, 어떠한 반항도 없이 살아온 녀석이다.

한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난생처음 입 밖으로 낸 요청이란 게, 죽을 게 뻔한 최전선으로 보내 달라?’

도저히 그 심중을 짐작할 방법이 없다.

처음으로 보인 공유립의 돌발 행동 때문에 공지량은 머리가 복잡했다.

“거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전장에서 공유립의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삼대제자들 중 가장 약하고 쓸모없는 녀석들을 한데 모아 전장의 측면을 지원하는 것.

그 지휘를 맡길 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살 특공대나 마찬가지였다.

와족도 우회하는 적들이 있으리라 당연히 예상할 테고, 측면의 방어를 굳혀 놓을 것은 안 봐도 훤하다.

그들을 1차로 보내 교전시킨다.

전멸하겠지만, 와족은 우회한 적들을 막았다는 것에 순간적으로 안도할 터.

그 순간 몸을 숨기고 접근한 타격대가 들이친다.

공지량은 적들의 시야를 가리고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미끼로 공유립을 쓸 생각이었다.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지. 생존율은 최전선 쪽이 훨씬 낮지 않나.”

양측의 최정예가 모여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생존 확률이 2할에도 못 미치는 곳이 최전선이다.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오히려 그쪽이 낫다.

지나치게 노골적이라 배치하지 못했을 뿐.

“스스로 사지로 기어 들어가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지. 마지막 부탁이 될 텐데 그 정도도 못 들어주겠나.”

일말의 부정(父情)도 찾아볼 수 없는 눈이었다.

지금껏 그랬듯 자신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사문의 대적을 맞아 장문인의 아들로서 책임을 다하려고?

아니면 무언가 생각해 둔 바가 있어서?

무엇이든 상관없다.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최전선에 뛰어든다면 어설픈 실력으로는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

그리고…….

‘어차피 그곳은 초토화될 터.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공지량은 공유립의 문제로 더 이상 골머리를 썩지 않기로 했다.

똑똑.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리 방문자가 많단 말인가.

“들어와라.”

하지만 이번 방문자는 절대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다.

다급히 들어온 응목대원의 보고를 들으며, 공지량과 지석인은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장문인. 대인께서 내방하셨습니다.”

* * *

성년식을 떠나기 전, 그믐과 대련을 하던 마른 비가 불쑥 물었다.

“할아범. 내 짝이다, 확신이 드는 놈을 만나면 그다음엔 어떻게 해요?”

“음? 무슨 소리냐, 그게? 뭘 어떻게 해?”

“그 순간부터 그냥 함께 다니는 건가요?”

할 말을 잃은 듯, 그믐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곧 성년식을 떠날 녀석이 그걸 질문이라고…!’

마른 비에게 관대한 그믐조차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

“너…! 크흠! 그래, 내 설명해주마.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꾸나. 비아야, 만약에 네가 어떤 여인을 만나자마자 호감을 느꼈다고 치자. 그 여인도 너한테 좋은 느낌을 받았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가잔다고 그 여인이 덥석 너를 따라 오겠느냐?”

“당연히 오겠죠. 서로 좋아하는데.”

“안 와! 안 온다! 절대로 그냥 올 리가 없지!”

대화의 진행이 어렵다.

그믐은 급격히 뒷골이 당기는 걸 느꼈다.

‘어찌 된 게 이 녀석은 지 애비보다 더 하는구먼!’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긍정적이라고 해야 할까.

나이를 먹고, 부족을 책임지며 많이 달라졌다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속 편하고 단순하게 사는 게 너른 하늘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가끔 보면 비아는 어린 시절의 족장보다 더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그믐이 말했다.

“안 온다. 뭘 믿고 보자마자 너를 따라오겠느냐. 그 여인도 자신의 삶이 있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을 텐데. 무엇보다 첫인상만으로 네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덜컥 따라나선단 말이냐.”

“흐음…….”

전혀 수긍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그냥 바보인 건지.

납득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그믐이다.

“사람 간의 관계도 그럴진대 짐승은 어떻겠느냐. 게다가 야수란 본디 야생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누군가에게 귀속되는 것 자체를 본능이 거부한다는 말이지. 너를 특별하게 받아들이고 친밀감을 느끼더라도 따라나서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럼 어떻게 해요?”

매우 중요한 이야기라는 듯 그믐이 눈빛을 진지하게 가다듬었다.

“찍어 누른다.”

“찍어 눌러요? 힘으로?”

“힘, 민첩성, 자연에 몸을 숨기는 은신법, 혹은 특정 감각. 그게 무엇이 되었든 종의 특성이 발현된 해당 짐승의 특기를 그 이상의 능력으로 압도한다. 관계를 맺기 위한 첫 번째 단계지.”

“그건… 조금 이상해요. 반려 관계라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반려수는 인간 배우자와는 달라. 감응까지 가능하게 될 특별한 관계라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차후의 일. 야생의 짐승임을 잊지 말거라.”

“……?”

“길들이고 마음을 주고받는 건 주종관계를 정립한 이후에 할 일이야. 약육강식의 철칙은 야생의 짐승들에게 있어 피에 새겨진 본능이나 다름없다. 왜 전사들이 성년식 기간의 대부분을 반려수와의 싸움에 소비하겠느냐. 너의 말을 듣게 하려면 우선 네가 더 강자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해. 굴복할 때까지 철저히 찍어 눌러라. 누가 위인지를 각인시키는 것이다.”

어느새 소년은 심통이 단단히 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른 비를 누구보다 관심 있게 지켜봐 온 그믐은 그게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그 방법밖에 없어. 친근하게 다가섰던 많은 이들이 있었지.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야생의 짐승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순간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야. 모두 잡아먹히거나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마음에 안 들더라도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확실히 해야만 하느니라.”

“……그다음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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