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네가 원하는 것. 마음을 주고 마음을 받는 것. 강제로 찍어 눌러 굴복시킨 녀석과 진정한 교류를 시작하는 것이지. 그때부턴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과 같단다. 인간과 짐승이라는 종의 차이 때문에 시작은 상이했으나, 결국 정을 쌓고 마음을 소통하는 방법은 동일하단 말이지.”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게 끝인가요?”
“아니. 함께 성장해야지. 마음까지 얻어내어 주종에서 반려의 관계로 넘어간 둘은 동반 성장한다. 몸놀림, 호흡, 사냥과 전투, 몸을 숨기는 법, 발달되는 감각……. 혼이 이어진 쌍둥이처럼 모든 것을 자연스레 공유하며 닮아가는 거지. 반려수의 특성에 따라 인간 또한 특정 능력이 극대화된다. 애초에 비슷한 특질을 지닌 짐승과 이어질 수밖에 없기에 그건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수순인 게야.”
‘거짓말쟁이 할아범.’
보자마자 알았다.
이 녀석이 내 짝이라는걸.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확신한다.
나와 함께 갈 거라는걸.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처럼, 백호를 마주한 순간 마른 비는 깨달았다.
앞으로 이 녀석과 쭉 함께하리라는 것을.
‘주종 관계는 무슨.’
힘으로 찍어 누르고, 굴복시켜라?
오직 그 방법밖에 없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낯설어서 아직은 경계를 풀지 않고 있지만, 확실하다.
이 녀석은 날 좋아한다.
그리고 나도 이 녀석이 좋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뭐가 더 필요한가.
마른 비가 백호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난 네가 마음에 들어.”
그건 마치 첫눈에 반한 소녀에게 고백하는 소년과 같았다
소녀의 몸집이 훨씬 더 크고, 털이 복슬복슬한 짐승이라는 점에서 전혀 낭만적이진 않았지만.
“너도 그렇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백호가 고요한 눈으로 마른 비를 내려다봤다.
사경을 헤매던 마른 비를 일으켜 세울 정도의 자연기를 스스로 깨우친 녀석이다.
아직 그 힘이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생존에 대한 강렬한 염원으로 각성을 이루어낸 녀석이다.
너른 하늘의 피를 이은 마른 비가 그런 것처럼, 푸른 눈의 핏줄임을 증명하듯 강대한 검치호의 손아귀에서 탈출하여 살아남은 녀석이다.
각성 이래로 싹 틔운 이성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이끌림이.
진한 동질감이 묻어나는 자연기가 말한다.
언제가 됐든 눈앞의 인간과 이어지게 될 거라고.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잠시 간의 침묵을 깨고, 백호가 움직였다.
스윽-
백호는 자신의 머리를 감싼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고개를 낮추며 마른 비와 눈높이를 맞췄다.
소년이 활짝 웃었다.
“헤헷. 그럴 줄 알았어.”
그믐이 보았다면 기절초풍했을 거다.
어떤 와족의 전사도 이런 식으로 반려수에게 다가간 경우는 없었다.
아니, 다가갈 수 없었다.
사나운 맹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순한 초식 동물조차 일정 간격 안으로 인간의 접근을 허용할 리 없으니까.
그건 지극히 당연한 야수의 본능이나 마찬가지니까.
지켜보던 은빛 여우를 벌떡 일어서게 만들었던 그것이다.
습격해온 그물무늬비단뱀을 돌려보내고, 곤줄박이의 경계심을 풀어헤쳤으며, 동물들을 움직여 뒤쫓아 온 설검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그것이기도 했다.
위압과 압도에서 비롯하는 야수 제어를 넘어선 무언가.
백호와의 인연을 기점으로 마른 비만의 독특한 야수 제어의 술, ‘야수 친화’가 완연한 꽃을 피웠다.
함지박만 하게 입이 벌어진 마른 비가 백호를 바라봤다.
“음… 반려수와 이어진 순간은 저마다 다르다고 했어. 걸음이 형은 산꼭대기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며 같이 가자고 말했대. 산이 형은 싸우고 둘 다 널브러진 상황에서, 자길 안 따라오면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면서 때리겠다고 협박했다더라. 은빛 여우 형은… 실바람이 자길 받아들일 때까지 말없이 곁을 지켰댔어.”
맹수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맑은 눈이 마른 비를 담는다.
푸른 하늘과 같은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소년은 말했다.
“복잡할 필요 있겠어? 네가 좋아. 친구가 되어줘.”
우우웅―
혼이 거하는 집.
상단전을 열어젖힌 혼백이 둘의 정신을 하나로 잇는다.
마음의 밭.
중단전에서 뻗어 나온 염원이 단단한 결속을 짓는다.
그리고 자연기.
공명하는 둘의 기운을 대자연에 떠도는 기운이 감싸 안으며 기적을 일궜다.
파앗-!
하늘을 뒤덮은 칠흑의 장막 위로, 별빛으로 수놓은 자수가 은빛 광채를 뽐낸다.
달과 별이 만들어낸 찬연한 빛무리가 야공을 가로지르며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아득한 옛날 옛적, 고대 신화의 한 장면처럼.
인연을 맺은 인간과 야수를 하늘의 손길이 축복하듯 어루만졌다.
“이제부터 친구다?”
이 순간만큼은 드넓은 천지에 오직 둘만이 존재한다.
짙푸른 자연기의 공명이 후광처럼 둘러친 달빛과 별빛을 삼켰다.
“이름은…… 흰둥이로 할까?”
백호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인.”
이 남자가 이토록 정중한 예를 갖추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오래도록 옆자리를 지켜온 지석인조차 이런 모습을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천하 구파의 장문인이 허리를 숙일만한 상대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에헴. 흠, 흠.”
하지만 예를 받은 사내는 그만한 격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밀면 굴러갈 듯 뒤룩뒤룩 살찐 몸은 심각한 운동 부족임을 짐작케 했고, 얄팍하게 뻗은 수염은 비대한 몸과 대조되어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허나 간신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목소리와 살 속에 파묻힌 작은 눈이 데굴데굴 구르는 걸 보고 있노라면, 불쾌한 감상에 젖어드는 걸 막기 힘들었다.
“커흠. 오랜만일세, 장문인. 앉게.”
“예, 대인. 그럼.”
극상품의 비단으로 짠 옷과 금은보화로 치장한 장신구.
그 값비싼 물품들은, 외모와 풍기는 인상이 어떻건 간에 눈앞의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리기에 충분했다.
예를 갖춘 공지량이 단정한 태도로 마주 앉았다.
“어인 일로 이 먼 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부르시면 문안을 드릴 겸 제가 곤명으로 갔을 텐데요.”
이토록 공손한 공지량의 모습.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다.
하지만 봉검이나 운검이 보았다면 치를 떨 광경이기도 했다.
백 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몽골의 지배.
당금 원 황실에 의해 운남성에 파견된 총독 호르찰이 탐욕스런 미소를 지었다.
“크흠. 뭐 별일 있겠는가. 장문인의 얼굴을 보러 온 게지.”
‘빌어먹을 돼지 새끼. 또 뇌물을 바치라 이거군.’
원 치하에서 한족은 노예 계급이나 다름없다.
원전장(元典章)을 통해 법제화된 민족의 구분상, 한족은 먼 이국에서 들어온 색목인들보다도 못한 3~4등급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지량이 운남의 소수부족을 천시하듯 지배계급인 몽골인, 그것도 운남성을 관할하는 호르찰 앞에선 공지량 역시 미천한 한족에 다름 아니었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었습니다, 대인. 지 대주, 그걸 가져오게.”
‘십 년.’
자그마치 십 년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공지량이 호르찰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온 이유.
바로 힘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황실의 눈길이 거의 미치지 않는 운남의 지리적 특성.
중원 본토에선 병장기 금지령까지 내려져 모든 문파들이 몸을 바짝 낮추고 있는 실정이다.
광활한 영토의 특성상 실질적인 단속은 어렵다지만, 그 정도의 억압이 들어왔다는 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양지에서 문파의 성장을 꾀하는 건 무척이나 어렵게 되었다는 점.
특히나 강남 일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는 지금은 더욱 그러했다.
변방이란 불리함이 처음으로 유리하게 작용한 시점이었고, 달리 말해 이건 기회나 다름없었다.
‘이 돼지만 구워삶으면.’
호르찰만 눈감아주면 황실의 이목에 잡힐 리 없다.
변방 중의 변방인 운남의 특성상 호르찰은 이곳에서 황제처럼 군림하고 있었고, 중원의 유수한 문파들이 주춤하는 사이 점창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곧 있을 전쟁만 끝마치면 된다.’
곤명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문 호르찰이지만, 명색이 운남의 총독이다.
운남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도시인 대리의 사정에 관심을 두지 않을 리 없었다.
중원 각지에서 받아들인 인원들로 점창이 비대해짐에도 간섭을 받지 않았던 이유.
버젓이 병장기를 들고 다니며 창산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었던 이유.
썩을 대로 썩은 저 호르찰 덕분이었다.
“약소합니다만, 대인께 드리려고 준비한 제 성의입니다.”
이번 전쟁만 끝나면.
와족만 치워버리면, 운남 땅 전체를 마음껏 주무르는 게 가능하다.
운남 전역에서 들어오는 특산물과 자원들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를 안겨줄 것이다.
꼴 보기 싫어도 지금은 호르찰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 할 때였다.
‘그리고 금광.’
호국영 덕분에 알게 된 금광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한다.
그리고 흑상을 통해 유통망을 확보한다.
거기까지만 간다면 천하 구파의 정점, 아니, 천하제일문도 꿈만은 아니었다.
“커허허. 뭘 이런 걸 다. 장문인에게는 매번 고맙구먼.”
“아닙니다, 대인. 대인의 아량에 제가 항상 감사드릴 따름이지요.”
‘뭐냐. 여기까지 온 진짜 목적이.’
정기적으로 상납하는 뇌물을 받으러 일부러 여기까지 왔을 리 없다.
이 탐욕덩어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분명 다른 목적이 있단 뜻이었다.
“실은 내 놀랄만한 소문을 들어서 이리 왔다네.”
‘놀랄만한 소문?’
“허허, 대인께서 놀랄만한 소문이라시면…?”
꾸며낸 공지량의 미소를 여유 있게 음미하던 호르찰이 입을 열었다.
“장문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공지량은 멍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곧 벌어질 전쟁에 대해 알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건 공지량 자신이 이미 전달하고 양해를 구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하루. 단 하루면 됩니다, 대인.’
창산 쪽이 시끄러워지더라도 하루만 못 본 척 넘어가 달라고 했다.
이 뒤숭숭한 시기에 대규모 인원이 전쟁을 벌이는 건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피가 내처럼 흐를 것이고, 시체가 땅을 빼곡히 메우며, 단말마의 비명이 하늘을 울리리라.
황실의 전방위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년 간 인원을 끌어모은 데다 전쟁까지 벌인 사실이 알려지면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지금밖에 없다.
지금이 적기였다.
장강 이남에서 원 황실의 골치를 썩이며 십 수년간 대항해온 반란 세력.
그들의 저항이 거세어져 황실이 다른 곳에 눈 돌릴 여력이 없는 지금.
정보 통제가 용이한 창산으로 와족을 끌어들여 일거에 섬멸한다.
‘거의 다 왔다.’
긴 세월 절치부심하며 준비한 대계가 흐드러진 만화(滿花)를 피워 올리기 직전이었다.
‘이 상황에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이미 끝난 이야기지 않나.
분명 호르찰은 이번 일을 눈감아 주기로 약조했었다.
10년 전, 처음 줄을 댈 때는 그리 큰 액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호르찰은 점점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냈고, 최근 2년간은 그야말로 정점에 달했다.
대리석으로 남긴 이문의 삼분지 일을 매달 상납해야만 했다.
전쟁을 결심하고 공유립을 사절로 보냈을 때.
그때는 직접 곤명을 방문하여 대리석으로 얻은 수익 세달 치를 고스란히 뇌물로 건넸다.
전쟁으로 인한 소란을 묵인해주는 대가였다.
“대인. 지난번 방문 때 잠시간의 시끄러움을 못 본 척 해주시기로…….”
“응?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그런 약속을 했다고?”
‘이 새끼가…!’
치솟는 울화에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다.
이거다.
이거 때문에 온 거였다.
이 몽골 오랑캐 놈은 그 막대한 액수로도 성에 안 찬 게 틀림없었다.
뒤룩뒤룩 찐 살만큼이나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이었다.
“허… 허허. 대인, 곤란합니다. 지난번에 해주신 약조를 믿고 일을 추진하는 중인데, 이리 손바닥 뒤집듯 약속을 어기시면…….”
“……뭐라? 곤란? 네가 지금 나에게 곤란하다 하였느냐?! 어디서 감히!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나 다를 바 없는 한족 따위가!”
쾅!
호르찰은 탁자를 뒤엎으며 벌떡 일어섰다.
출렁이는 살 때문에 서 있는 것도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얼굴을 푸들푸들 떨 정도의 노기가 그로 하여금 몸을 일으키게 했다.
“꼴에 한 집단의 수장이라고 대우를 해줬더니만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잊지 마라!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인 네놈이 어깨에 힘주고 살 수 있는 건 다 이 호르찰 덕분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네놈이 저지른 짓들을 황실에 고하면 어찌 될 것 같으냐!”
‘공멸이겠지.’
호르찰은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고 자신하겠지만, 공지량이 아무 대비 없이 뇌물을 건넸을 리 없다.
장부와 증인.
그리고 뇌물을 숨겨둔 호르찰의 비밀창고.
모두 확보해두었다.
그간의 일이 밝혀지면 몰락하는 건 공지량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고작 몽골 오랑캐 놈 하나 붙잡고 동반 자살하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울화가 치밀지만,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 이 자리를 모면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