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죄송합니다, 대인. 제가 잠시 실언을……. 이렇게 사죄드릴 테니 부디 노기를 가라앉히십시오.”
공지량의 두 눈에 살의가 떠올랐지만, 깊이 숙인 고개 때문에 호르찰에겐 보이지 않았다.
“명심하도록 해라! 네 주제와 신분을 망각하지 말란 말이다!”
“예, 대인. 죄송합니다.”
씩씩거리던 호르찰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삐걱대는 의자가 애처로워 보였다.
“커흠. 실언이라니 이쯤하고 넘어가도록 하지. 내 자네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억이 날 듯도 해. 소란이 발생할 거라는 말을 들은 것도 같군. 허나 전쟁이라면 그 정도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내 아무리 자네를 어여삐 여긴다 해도 그런 큰일을 못 본 척 눈감아주기는 어렵다, 이 말일세.”
‘……눈이 절로 감길 수밖에 없는 액수를 달라?’
빌어먹을 새끼.
좋다. 얼마든지 떠먹여주마.
까짓것 운남을 쥐고 나면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공지량은 어차피 이렇게 된 것, 그의 입이 찢어질 정도의 뇌물을 안겨주기로 했다.
지석인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호르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약조를 했던 것 같기도 하구먼. 해서…….”
뭐냐. 저 애매한 수긍은.
그게 다가 아니었나?
단순히 돈을 뜯어내기 위해 온 게 아니란 말인가?’
늘어지는 말과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양보하도록 하지. 최근에 점창이 운남에 있는 땅들의 소유권을 갖게 되었다지? 거기서 나오는 수익을 총독부에 일정 부분 기증하는 걸로 함세. 그걸로 곧 있을 소란을 무마해주지.”
공지량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이놈이 어디서 개수작을…!’
이거였다.
호르찰은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였다.
하니족을 시작으로, 점창이 운남 각지의 노른자위 땅들을 빼앗은 사실을 알고 있다.
모를 리 없다.
모르는 게 이상하다.
하니족의 대 이주를 시작으로 대대로 살아온 터를 빼앗긴 자들 때문에 운남 전역이 시끄러웠으니까.
개중엔 총독부로 달려간 자들도 있었다.
오래도록 대리와 곤명 주변에서 한족과 교류한 부족 중엔 지금이 원 제국의 시대라는 걸 귀동냥한 자들도 많았으니까.
그들은 호르찰에게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며, 점창에도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다.
‘못 본 척 넘어가 준 게 아니었단 말인가…!’
기다린 거다.
점창이 토지를 손에 넣을 때까지.
운남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된 총독부가 토착부족의 손에서 강제로 토지와 재산을 빼앗는 건 반발의 여지가 크다.
차별 계급인 한족, 즉 점창의 손에 토지가 들어간 후에 징발을 하는 것이 운남 토착부족들의 비난을 피하고, 알맹이를 손쉽게 빼먹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호르찰은 조용히 점창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흠. 결국 천하 모든 영토의 주인은 카안이 아니시겠는가. 자네가 카안의 땅에서 일으킬 소란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게. 이 운남을 살피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자네가 ‘기꺼이’ 기증한 그 돈으로 이 호르찰이 카안의 백성들을 굽어살필 것이야.”
호르찰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기만 했다.
‘기껏 판을 벌려놓았더니… 뒷짐 지고 구경만 한 놈이 판돈을 날로 처먹으려 들어?!’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마 위로 새파랗게 곤두선 핏줄이 공지량의 심중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마음 같아선 눈앞의 피둥피둥한 돼지를 일검에 쪼개버리고 싶지만, 그 뒤엔 황실이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면…… 되겠습니까.”
가뜩이나 울화로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되는 공지량에게 피를 토하게 하는 마무리 일격이 꽂혔다.
“절반이면 족하지 않을까 싶네.”
“저, 절반…!”
십 년을 준비한 계획이다.
점창이 비상하기 위한 그림이었으며, 그 골자는 결국 막대한 자금의 확보에 있었다.
하지만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 서방이 받는다고, 막판에 끼어든 엉뚱한 놈에게 태반을 빼앗기게 되었다.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상황.
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 방문한 것까지 전부 다 호르찰의 노림수였다.
‘베어버릴까…….’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뒤에 황실이 있는 이상 자신은 절대 호르찰을 벨 수 없다.
핏발 선 눈 위로 수십 토막 낸 호르찰의 시체를 그리는 게 공지량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알겠습니다, 대인. 그리하겠습니다.”
“카하하! 그래야지! 잘 생각했네. 장문인! 아주 잘 생각했어!”
‘전쟁만. 전쟁만 끝나면… 내 절대로 네놈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손을 뻗어 어깨를 두드리는 호르찰에게 공지량의 가면이 미소를 띠워 올렸다.
탐욕은 더 큰 탐욕에 먹히고, 힘은 더 큰 힘에 짓뭉개진다.
약육강식.
무자비한 야생의 철칙이 한 치의 예외도 없이 창산 장문전을 집어삼켰다.
* * *
“같이 안 갈 거야?”
마른 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호가 그런 소년의 얼굴을 고요히 내려다봤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교감을 주고받게 된 인간의 아이다.
애정이 가득한 눈빛과 안절부절못하는 태도.
같이 가자는 제안에 고개를 저으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저러고 있다.
인간처럼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르릉.”
그렇다고 답하자, 소년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싹 다가왔다.
“왜? 왜 같이 안 가? 내가 싫어?”
앞발의 털을 붙잡고 떨어지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는 이 꼬마가, 독림에서 훨훨 날아다니던 그 인간이 맞단 말인가.
번쩍이는 눈빛과, 전성기에 이른 표범과 같은 표홀한 움직임, 혀를 내두를 동물적 감각.
인간의 싸움이란 이토록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구나, 절로 느끼게 된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앞발을 붙잡고 있는 소년은 형과 떨어지기 싫다고 징징대는 아기 호랑이 같았다.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린 동생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크릉.”
이런 인연이 이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난 검치호에게 아비와 어미, 형제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 이후로 쭉 혼자였다.
앞으로도 혼자일 거라고만 여겼다.
검치호.
그 집요한 놈은 아직도 자신을 찾고 있고, 발각되는 순간이 목숨을 잃는 때다.
산중제왕이라는 호칭이 부끄럽게도, 살아남으려면 몸을 숨기는 법부터 익혀야 했다.
성장을 마치지 못한 육체로는 놈과 맞설 수 없으며, 아비를 쓰러뜨렸을 정도로 강대한 녀석과 싸우기엔 아직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칙칙하고 어두운데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독림으로 숨어들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장소지만, 몸을 숨기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었다.
기척을 죽이는 법, 어둠에 동화되는 법, 지형지물에 녹아드는 법.
대로를 걷는 산군이라면 익히지 않을 은신법을 몸에 붙였다.
애뢰산 최고의 독물들이 바글거리는 곳에 머물다 보니 독 저항력도 비할 데 없이 상승했다.
난마처럼 얽힌 고목들 사이를 누비며 육체를 단련하고, 사냥술을 습득했다.
그리고 아비에게 배웠던 기술들을 연마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독림에는 온갖 종류의 독물들이 서식하지만 그것들은 맹수가 아니었고, 강대한 육체적 힘을 지닌 존재들과 생을 맞부딪히는 실전이 절실했다.
검치호는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존재였고, 놈을 쓰러뜨리려면 발톱과 이빨의 활용에 능숙해져야 한다.
몸을 움직이는 법과 지형을 활용해 싸우는 법, 찰나의 간극에서 적을 압도할 수 있는 전투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려야만 한다.
그리고 그건 생사가 걸린 싸움을 통해서만 개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르르…….”
그래서 못 간다.
강해져야 하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
나도 네가 좋지만, 나에겐 할 일이 있다.
갈가리 찢기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눈물을 흩뿌리며 도망쳤던 순간이 잡힐 듯 선명했다.
검치호를 쓰러뜨리고 산군의 자리를 탈환하는 그날까지, 백호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아…!”
혼이, 마음이, 그리고 자연기가 공명했던 순간부터.
끈끈하게 이어진 정신이 종의 차이를 넘어 의사를 전한다.
마른 비는 백호의 생각과 감정을 명확히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이 싫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간다는 게 아니었다.
갈 수가 없는 거였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며,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자신도 마찬가지니까.
‘존중해줘야겠지.’
둘의 관계가 일반적인 반려 관계와 확연히 다른 부분이었다.
통상 야수 제어로 맺어진 둘은 점차 벗이자 동반자의 관계로 나아가지만, 근본적인 우위는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있다.
강제로 의지를 발한다면 반려수는 심혼을 억누르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
설령 자신의 의지와 상반되는 지시일지라도.
전사와 반려수가 공유하는 자연기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며, 야수 제어의 특성상 관계의 시작이 ‘종속’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 자연기를 깨우쳤던 푸른 눈과 어둔 날개 역시 마찬가지다.
여타의 반려수들과 달리 자연기의 활용을 깨우쳐 주거나 조율해줄 필요는 없었지만, 관계의 근본이 야수 제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상 너른 하늘과 그믐에게 귀속된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힘의 원천인 자연기를 스스로 터득했기 때문에 훨씬 강하고, 인간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강점이 존재할 뿐.
‘우린 달라.’
마른 비와 백호의 관계는 분명히 그들과 달랐다.
우선 힘의 우위를 가리고 출발한 관계가 아니다.
푸른 눈과 어둔 날개도 백호처럼 사고가 가능한 존재였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너른 하늘과 그믐을 따라나서는 걸 거부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던 놈들이다.
강한 힘을 지닌 만큼 누구도 자신의 위에 두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싸웠다.
너른 하늘과 그믐은 성년식 기간의 대부분을 놈들과 싸우는 데 썼고, 수십 번을 눕힌 후에야 완전한 굴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귀속이나 종속이 아닌, 철저한 독립성을 유지한 채 맺어진 관계라는 점이다.
힘의 고하나 여타의 조건을 배제한 채 오직 상대가 마음에 들어서 이어진 인연이다.
어떠한 제압이나 억압 없이 시작된 반려 관계는 기나긴 와족의 역사를 통틀어도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번거롭긴 하지만…….’
반려 관계로 맺어진 이상, 통상적으로는 ‘가자.’고 말하면 끝날 일이다.
하지만 마른 비는 백호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억지로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끌고 갈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같이 가고 싶다.
같이 가는 게 둘 모두에게 좋다.
백호가 원한을 갚으려는 상대와 자신이 복수해야 할 상대가 같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힘을 키우는 데 있어 같이 움직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들어봐.”
설득을 한다.
백호가 수락하면 지금부터 함께 움직이고, 정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다.
마른 비는 벗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고 싶었다.
‘매서운 눈 아저씨가 봤으면 또 한소리 들었겠네.’
짐승을 상대로 설득이라니.
매서운 눈이 봤다면 덜 떨어진 모지리가 또 별난 짓을 한다고 코웃음 쳤을 거다.
하지만 마른 비는 이런 관계가 마음에 들었다.
어느 한쪽으로 관계의 추가 기울지 않은 채 독립된 개체로서 서로를 마주한다.
친구란 그런 게 아닌가.
‘이게 훨씬 더 좋아.’
‘특이’일지 ‘특별’일지는 누구도 모른다.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길이니까.
진지해진 소년의 눈이 백호를 향했다.
“우린 아직 약해.”
백호가 귀를 쫑긋하며 마른 비의 눈을 바라봤다.
“아까… 봤지? 네 가족의 원수에게 달려들었던 사람. 날 살리기 위해서.”
봤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적에게 거침없이 덤비는 인간과 짐승의 모습은 눈부시기까지 했으니까.
“은빛 여우 형은 나한테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칼이빨에게 잡아먹힌… 실바람도 마찬가지고. 나도 복수를 해야만 해.”
“……!”
식구였던가!
그토록 슬퍼한 게 이제야 이해가 간다.
마른 비가 그렇듯 백호 또한 벗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와 같다.
아비와 어미도 자신과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검치호에게 달려들었으니까.
망막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잔혹한 기억.
백호가 살며시 얼굴을 부비며 마른 비를 위로했다.
“고마워. 우린 복수의 대상이 같아. 하지만… 지금으로선 우리가 동시에 달려들어도 놈을 이길 수 없을 거야.”
맞다.
인정한다.
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존재다.
수긍하듯 백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소년은 말했다.
“우린 강해져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