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래서 애뢰산에 남아 맹수들과 싸우며 힘을 기르려는…….
“아니. 그걸로는 안 돼. 네가 애뢰산을 다 뒤져도, 운남 전역을 샅샅이 돌아본다 해도 칼이빨처럼 강한 놈을 찾긴 힘들어. 놈을 이기려면 그보다 강한 맹수와 싸워봐야 해.”
무슨 말을 하나했더니…….
바짝 붙어서 마른 비의 말을 경청하던 백호가 허탈한 몸짓으로 거리를 뒀다.
검치호보다 강한 짐승?
불가능하다.
그런 존재는 없다.
놈의 손에서 탈출한 이래로, 놈을 쓰러뜨리기 위한 탐색과 모의 전투를 수없이 거듭했다.
그놈은 그야말로 몇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앙 같은 존재다.
맥이 빠진 백호가 고개를 저으며 땅을 바라봤다.
“있어.”
있다고?!
번쩍 들어 올린 고개가 마른 비를 향했다.
“네 할아버지. 푸른 눈.”
백호의 눈동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확장됐다.
‘이 녀석,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마른 비는 그 생동감 넘치는 인간 같은 반응이 재미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르릉…!”
아비에게 들었다.
수십 년 전, 인간을 따라나서기 전까지 애뢰산을 제패했던 산군.
그 강대한 위용은 애뢰산을 넘어 운남 전역을 떨쳐 울렸다고 했다.
감히 그 앞에서 이빨을 드러낼 맹수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다.
살아 있었던가!
하지만 아비의 아비가 태어난 건 수십 년 전이었을 텐데?
게다가 벗의 말에서 전해지는 느낌으론 가까운 사이인 듯하다.
아? 설마 따라갔다는 인간이…!
“응. 푸른 눈은 우리 아버지의 반려수야. 그리고 그들은 지금 전쟁을 앞두고 있어.”
놀라워하는 백호에게 마른 비는 부족의 이야기를 꺼냈다.
“인간 집단들 간의 전투가 벌어질 거야. 봤지? 날 죽이려고 쫓아온 사람들. 우리 부족과 그들이 속한 무리가 싸우게 됐어. 난 거기로 갈 거야.”
숨지 않는다.
마른 비는 이미 전쟁에 휘말려버렸고, 소중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데 숨어 있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힘이 모자라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장으로 갈 것이다.
소년의 눈이 결연히 빛났다.
“우리와 싸우는 그자들, 무척이나 강한 사람들이야. 어지간한 맹수는 가볍게 사냥할 정도로. 날 도와줘. 전쟁을 마치고, 푸른 눈에게 싸움을 배우자. 그 방법이 아니면 칼이빨을 이길 수 없어.”
자신의 싸움에 애꿎은 백호를 휘말리게 한다?
아니다.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마른 비는 무조건 함께했을 거다.
반려 관계를 맺은 이상 운명 공동체니까.
자신이 그렇다면 백호도 같은 마음일 거라 믿는다.
마른 비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도와 달라 부탁했다.
“크르르르…!”
무슨 말인지 알겠다.
더 들을 필요도 없이 네 말이 맞다.
그런 위험에 뛰어들 거라면 당연히 함께한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살아 있는 네가 우선이 아니겠나.
백호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전쟁이 끝나면, 우린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을 거야.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자. 그리고 같이 저 이빨 커다란 놈을 사냥하는 거야.”
몸을 일으킨 소년의 등 뒤에 새하얀 방벽이 호위하듯 자리했다.
“크허허헝!”
애뢰산을 향해 울부짖는 포효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언약이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벗을 지키고, 힘을 키운 후에 돌아와 원수의 목덜미에 이빨을 꽂아 넣을 테니.
비명에 간 가족들이 들을 거라는 듯 백호는 힘차게 울부짖었다.
“같이 가줘서 고마워.”
힘이 모자라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그곳으로 다시 간다.
그리고 이번엔 그때완 다를 것이다.
마른 비의 눈이 북쪽 저 멀리에 있는 창산을 그렸다.
“가자. 전장으로.”
두 줄기 섬광이 애뢰산의 어둠을 갈랐다.
개전
새벽을 기다리는 숲은 질식할 듯한 적막에 사로잡혀 있었다.
밤을 꼬박 지새운 야행성 짐승들도 꾸벅꾸벅 졸음에 겨워할 시간.
숲으로 진입한 일단의 무리가 잠든 숲을 흔들어 깨웠다.
저벅, 저벅.
숲의 거주자들이 강제로 잠에서 깨어났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었던 짐승들은 곧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숨을 죽여야만 했다.
넘실대는 투지가, 뭉클거리는 살의가 숲을 채운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동녘의 여명도 섣불리 숲으로 다가들지 못했다.
“다 왔군.”
세월이 배어나는 눈동자다.
번쩍이는 정광이 숲의 끝자락을 넘어, 웅장하게 버티고 선 봉우리들을 비췄다.
구름 위로 치솟은 열아홉 봉우리.
새벽의 세례를 받은 창산은 지독히도 눈부셨다.
“한 달.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요.”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운남 땅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진격이었다.
적들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전장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창산이 눈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질 않았으니까.
선두에 선 너른 하늘이 등 뒤에 포진한 전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준비하라.”
전쟁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부상을 입었던 전사들은 싸울 수 있을 만큼 몸을 회복했고, 투지는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어 있다.
그럼에도 준비하라는 저 말.
아직 갖춰지지 않은 무언가를 완비하라는 뜻이다.
뜻하는 건 하나밖에 없으리라.
모두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끌렀다.
“오랜만이구먼. 전투에 이걸 쓰는 건.”
굽은 뿔의 죽음으로 심적 타격을 받고 쓰러져버린 잎의 노래.
심상찮은 기류가 와족을 덮쳐왔을 때부터, 그녀가 전사들을 위해 불철주야 준비해온 물품이다.
왼손에 쥔 주머니를 내려다보는 그믐의 얼굴에, 그녀에 대한 걱정이 진하게 담겼다.
“괜찮으실 겁니다. 염려 마세요. 할아범.”
그믐의 심정을 짐작한 너른 하늘이 위로를 건넸다.
“당연한 소릴. 누구 여잔데.”
그믐이 픽 웃으며 주머니를 끌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너른 하늘이 고개를 들어 마룡봉을 올려다봤다.
“저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범의 그것을 닮은 두 눈에 지극한 분노가 담겼다.
치미는 격정을 차가운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다.
아이들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후부터, 너른 하늘은 터질 듯한 가슴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내가 말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맞다.
누구보다 자신을 염려하는 게 그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질척거리는 피 웅덩이에 누구보다 깊게 몸을 담가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손에 묻힌 피가 진해질수록 짊어져야 하는 업도 무거워진다.
회한에 찬 얼굴로 그리 말했던 게 그믐이기 때문이었다.
“네. 분명 그러시겠죠.”
너른 하늘에게 있어 인간이란 언제, 어느 곳에서도 지켜야 하는 대상이었다.
처음으로 인간을 몰살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 지금, 자신은 분명 도를 넘는 순간을 맞이할 거다.
그러면 그믐은 자신을 말릴 게 틀림없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죄의식과 후회에 시달리는 걸 바라지 않을 테니까.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믐은 고개를 저었다.
“내 손에 죽어간 적들의 얼굴이 생생하다. 살려 달라 애원했던 이들. 원독에 찬 눈으로 저주를 퍼붓던 자들. 우리가 그렇듯 그들 또한 누군가의 부모이고, 자식이며, 형제요, 친구였겠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지워지지 않아. 후회한다. 분노에 미쳐 날뛴 살육의 나날들을. 참회한다. 그 많은 생명들을 꺼뜨린 것을.”
고요한 숲의 끝자락에서, 담담히 울리는 그믐의 음성이 정적을 걷어낸다.
너른 하늘은 그믐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경청하고 있었다.
전투 준비를 끝낸 전사들 또한 그들이 우러러봤던, 그리고 지금도 존경해 마지않는 노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에도 난 너를 그만하라 붙잡지 않을 거다. 아니, 붙잡지 못한다.”
확신이 담긴, 하지만 애잔함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네가 싸우지 않는다면 전사들이 피를 흘릴 테니까. 네가 손에 피를 묻히는 만큼 살아남는 식구들이 많아질 테니까. 그래서 난 너에게 손을 멈추라 이야기하지 못한다.”
잠시 말을 멈춘 그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한마디 한마디 입 밖으로 내는 걸 힘겨워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말을 하는 게 너무나 미안하다는 듯이.
“너는, 30년 전의 나와 같다.”
그것은 고백이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있는 그대로 털어놓지 못했던 소회며, 경험담이다.
너무나 힘겨웠노라고.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견뎌냈노라고.
그리고 지금껏 감당하고 있다는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
“들어라. 우린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30년 전, 내가 적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만큼의 식구들을 잃었을 게다. 우린 할 수 있는 만큼 참았고, 당할 만큼 당했다.”
전쟁을 이미 경험한 자로서 전쟁을 앞둔 후대에게 전하는 당부이며, 조언이었다.
“참지 마라. 더 이상은 참을 필요 없느니라. 지킬 대상을 정했다면 그들을 핍박하는 존재들을 쓸어버려라. 싸우고, 오롯이 짊어져라. 그것이 수장된 자의 책임일지니. 나 또한, 너와 함께할 것이다.”
망설이지 마라.
네 주먹은 여전히 사람을 지키기 위해 쓰이고 있으며, 네가 저지를 살인은 살아남기 위한 자기 방어일 뿐이다.
회피하지 말고, 그 무게를 직시하며 짊어져라.
다시는 되풀이하기 싫은 일이지만, 나 또한 너희와 함께 전장에 서리라.
두쿵, 두쿵.
노장의 선언이 전사들의 맥동하는 투지 위로 내려앉으니, 그것은 개전을 알리는 북소리다.
당장이라도 내달릴 것 같은 전사들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너른 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열렸다.
“가자. 전장으로.”
와족의 전사들이 숲을 열어젖혔다.
* * *
“왔군.”
휘오오오―
바람이 귀를 틀어막으며 세차게 불어 닥친다.
창산을 오르는 비탈의 중턱.
그 평탄한 땅 위에는 포진을 마친 백색 무복의 무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상당한 규모다.
운남 각지에서 와족 전사들과 싸우다 죽어간 응목대원과 삼대 제자들, 그리고 최근 마른 비를 쫓다 전멸한 설검대 잔존 인원.
물경 천에 가까운 인원이 몰살했음에도 여전히 육백이 넘는 인원이 창산의 허리 부근을 메우고 있었다.
아직 검대(劍隊)에 소속되지도 못한 풋내기 제자들이 삼백이다.
하지만 숫자가 주는 힘은 무시할 수 없었고, 나머지 삼백의 인원은 그야말로 전통적으로 문파를 떠받쳐 온 점창 무력의 정수나 다름없었다.
공지량이 버리는 패로 던진 삼대 제자들과 설검대의 역사는 기껏해야 십 년이다.
하지만 이들은 점창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정예 중의 정예였다.
설지굉의 피나는 노력으로 설검대가 호검대와 풍검대를 제치고 세 번째 무력 집단이 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백에 이르는 숫자와 설지굉이라는 걸출한 인물 덕분이었다.
각각 팔십 명으로 구성된 호검대와 풍검대의 무력이 설검대의 그것을 상회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각기 삼십 명의 최정예로 구성된 봉검대와 운검대는 그 숫자만으로도 설검대와의 집단 전면전을 압도했다.
그리고 비록 봉검, 운검대에는 들지 못했지만, 봉검가와 운검가에서 파견한 정예 무인이 도합 사십.
임무의 특성상 창산 밖으로 내보낸 인원들을 제외하고, 응목대주 지석인이 고르고 고른 응목대의 정예가 또다시 오십.
이 삼백이 조금 넘는 무인들이야말로 점창이 구파에 진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점창의 모든 것이었다.
‘연이은 습격과 한 달에 걸친 행군. 적들은 지쳐 있고, 숫자도 줄었다. 더군다나 이쪽은 놈들에 대한 탐색을 끝내고 만반의 준비를 끝냈어.’
절대 지지 않는다.
주봉인 마룡봉을 등지고 선 공지량은 자신만만했다.
밝아오는 동녘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의 입술이 열렸다.
“감개무량하구나.”
오늘이다.
십 년을 준비한 대계가 꽃봉오리를 피워 올리는 날이.
바로 오늘, 점창은 운남을 완벽히 접수한다.
그리고 천하제일문이 되기 위한 도약을 시작한다.
온갖 더러운 일들을 감내한 인고의 세월이었다.
이제부터는 명문 정파에 어울리는 정도만을 걸을 것이며, 그것으로 명분을 쌓고 명성을 취한다.
진정한 천하제일문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그래야만 했다.
진창을 헤쳐 나와 눈앞에 펼쳐진 꽃길이 자신을 부르는 듯했다.
전쟁을 앞두고, 공지량은 웃었다.
차아앙!
백색의 광휘를 머금은 보검이 검갑에서 힘차게 뽑혀 나왔다.
상서로운 벼락.
점창 장문인의 신물인 서벽신검(瑞霹神劍)이 밝아오는 여명을 받아 찬란한 광채를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