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점창의 제자들은 눈을 들어 적들을 보라.”
근엄하게 내리깔린 음성.
이 순간만큼은 모략과 계책을 궁리하던 모사의 모습 따윈 찾아볼 수 없다.
보검을 하늘로 들어 올리고, 진신전력을 아낌없이 개방한 공지량은 천하 구파의 장문인다운 위엄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모두가 들어서 알 것이다. 본 장문인이 저들과의 평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는 것을. 정당한 절차에 따라 진행된 토지 매입조차 오해를 피하기 위해 유립이를 사절로 파견했다. 허나 저들의 수장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말로 그 손을 뿌리쳤다. 그것은 전쟁의 선포이며, 그대들과 어깨를 맞댔던 사형제들이 궁벽한 오지의 거름이 되어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저들은 우리를 말살하겠다며 이곳까지 왔다.”
들끓는 기세.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자신들이 창산에 편히 머무르는 동안 헤아릴 수 없는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염탐을 나온 족장의 아들에 의해 두 명의 이대 제자가 앞마당에서 살해당했다.
그 뒤를 쫓은 설검대 이백 명도 매복해 있던 야만 전사들에게 몰살당했다고 했다.
간악한 술수다.
게다가 더러운 야만인들은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감히 본산까지 쳐들어왔다.
사생결단.
이제 저들과의 공존은 불가능했다.
“검에 자비를 두지 마라! 저들은 용서할 가치가 없는 족속들일지니!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고 제자들을 짓밟은 야만인들에게 대 점창의 투혼을 보여주리라!”
“우와아아아아아!”
들불 같은 투지가 하늘을 태울 듯 치솟는다.
일장연설을 통해 마주 기세를 끌어올릴 만도 하련만.
조용히 지켜보던 너른 하늘은 그저 한 걸음을 내디딜 뿐이었다.
쿵!
완성된 전사의 발걸음이다.
극성으로 끌어올린 자연기가 그 한 걸음에 담겼고, 창산의 발목을 찍은 전사의 발자국에 천지가 뒤틀릴 듯 진동했다.
쿠구구구!
사위를 뒤덮는 압도적인 기세가 육백 무인의 사기를 홀로 집어삼킨다.
치떠진 눈, 쩍 벌어진 입, 떨리는 손.
인세에 존재하리라 상상치도 못했던 개세의 무력이다.
일순간에 뚝 끊어진 함성은 항거 불가능한 힘을 접한 자의 경악이자 위축이었다.
까딱.
피아를 막론하고 천육백 개에 이르는 눈동자가 집중되었지만, 너른 하늘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공지량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까딱일 뿐이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네놈이구나.
개수작 떨지 말고 이리 내려와라.
애꿎은 목숨들 희생시킬 필요 있겠나.
네놈이 남자라면, 수장끼리 일대일로 붙자.
단 한 걸음만으로 전장 전체를 침묵시킨 전사의 도발에, 이번엔 천육백 개의 시선이 공지량을 향했다.
‘큭!’
스스로 느끼기에도 아주 흡족한 연설이었다.
적당한 거짓을 버무려 적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고, 죽어간 제자들을 상기시키며 사기를 끌어올렸다.
절대 불가침이어야 할 본산에 대한 침공.
중원의 내로라하는 세력도 아니고, 변방의 원시 부족 따위가 사문을 넘본다는 사실은 제자들의 투지를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한데 갑자기 내딛어진 저 발자국!
솜털까지 팽팽하게 곤두세우는 괴력의 진각이 산 전체를 떨쳐 울리며, 애써 끌어올린 사기를 단박에 잡아먹었다.
‘저놈이다!’
보는 순간 알겠다.
저자가 와족의 족장이다.
사절로 다녀온 공유립과 호국영이 보고했던 자.
탐색을 위해 파견했던 응목대원들을 모조리 실종시킨 자.
가장 궁금했으나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이, 이게…… 정녕 인간이 내뿜는 기세란 말인가!’
꿈틀거리는 구릿빛 육체 뒤로 동트는 여명이 후광처럼 번져 오른다.
그늘진 정면.
굳건하게 버티고 선 사내의 얼굴 부분에서 새파란 불꽃 두 개가 이글거렸다.
점창의 제자들은 존재할 리 없는 거대한 장벽이 덮쳐오는 듯한 환영에,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발을 물려야만 했다.
‘신승(神僧)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검을 든 공지량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구파일방 수장들의 회합.
정파 무림의 태두라는 소림(少林)의 방장을 대면한 순간을 기억한다.
과연 신승이라는 거창한 별호가 아깝지 않은 노승이었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그릇은 도리어 텅 빈 듯한 허허로움으로 다가왔고, 삐쩍 마른 노구에는 태산을 짓누를 거력이 숨어 있었다.
천하가 얼마나 넓은지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단언한다.
소림 칠십이종 절예를 완벽히 깨우치고, 스스로 창안한 무예로 소림 무공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신승조차 이자에겐 안 된다.
어떤 것도 가미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살기가 창산을 밑자락부터 집어삼키고 있었다.
『뭘 꾸물대고 있나. 전투 집단의 수장이란 자가 결투를 회피할 셈인가?』
“큭!”
“이, 이게 대체?!”
“머리에 목소리가!”
전장 전체에 내리꽂히는 광범위 언령이다.
육백에 이르는 점창 제자들이 뇌리를 파고드는 언령에 혼비백산했다.
‘이, 이런 괴물은 감당할 수 없다…!’
공지량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족장이라고 하니 회효라는 장로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하겠거니 짐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무력이니까.
하지만 현 와족의 수장은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존재였다.
‘응하지 않으면 사기가 곤두박질친다. 하지만 나서면… 내가 죽는다!’
저자가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었다.
치솟은 사기를 압도적인 기세로 찍어 누르고, 충격에 빠진 무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집중시켰다.
뒤이어 던진 노골적인 도발.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전장의 모두가 자신에게 눈을 돌렸다.
여기서 물러서면.
패배를 자인하는 꼴이다.
내가 약하다,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공지량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화아악―!
한 줄기 달콤한 구원의 손길이 전장 중앙에서 솟아올랐다.
험준한 산악의 기운이 기지개를 켜며 덮쳐오는 살기를 차단한다.
너른 하늘이 뿜어낸 기세의 절반 가까이를 밀어낸 그것은 창산의 고고한 봉우리를 닮아 있었다.
“흠.”
포진의 정중앙.
바다가 갈라지듯 좌우로 물러서는 점창 제자들 사이로 탄탄한 체구의 노인이 섰다.
붉은빛이 감도는 대도를 비껴든 노인이 탐스런 백염을 쓸어내렸다.
“대단하군. 이런 자가 인세에 존재하다니.”
점창을 수호하는 한 쌍의 방패.
그들은 점창의 상징인 검을 이름에 담을 뿐, 실제론 검을 다루지 않는다 했다.
고색창연한 붉은빛 대도는 봉검가의 상징일지니, 점창의 적을 가르는 홍염(紅焰)의 좌도(左刀)라.
성명병기인 적봉도(赤峰刀)를 가볍게 휘돌린 봉검이 우측을 힐끗 바라봤다.
“혼자는 버겁구먼. 좀 도와주는 게 어떻겠소?”
툭 던진 봉검의 한마디에 밀물이 빠지듯 무인들이 물러서고, 또 한 명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봉검에게 슬쩍 고개를 돌린 운검이 나지막이 웃었다.
“난 또 기세 좋게 나서길래 혼자 가능하시다고.”
푸화학―!
창산의 창공을 누비는 구름이 유유하게 번져 오른다.
봉검이 일으킨 기세에 필적하는 강대한 기운이, 밀어닥치는 살기의 나머지 절반을 밀쳐냈다.
청빙(靑氷)의 우창(右槍).
점창의 적을 꿰뚫는 청운창(靑雲槍)은 대대로 운검의 이름을 지닌 자에게만 허락된 절세의 무구라.
그그그긍.
보이진 않지만, 느껴진다.
창산을 집어삼킬 듯 치닫던 살기가 어느 순간 주춤한 것이.
두 명의 대장로가 형성한 무형의 방벽은 거침없이 치닫던 너른 하늘의 기운을 상쇄하며 점창의 제자들을 보호했다.
겨우 한숨을 돌린 무인들이 서서히 평정을 되찾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됐구먼.’
‘음……. 그런 것 같구려.’
평생을 함께 한 사이다.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의사를 주고받기엔 충분했다.
바닥을 칠 뻔한 사기를 겨우 안정시킨 봉검이 입을 열었다.
「기 싸움은 이쯤이면 충분할 듯하오만.」
“헛…!”
“뭐여, 이게? 언령은 아닌데?”
“너도 들려?”
“그보다 저 두 노인네, 족장님의 기운을 받아냈어!”
그쪽이 광범위 언령이라면, 이쪽은 광역 어기전성(語氣傳聲)이다.
기파에 실린 봉검의 음성이 와족 전사들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왔다.
점창의 제자들이 기겁했듯 와족 전사들 또한 놀랐다.
궤를 달리하는 절세의 기예들을 아무렇지 않게 펼쳐대는 양측 수장들의 역량에 침음을 삼킬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실전 못지않은 격렬한 기 싸움이 오가고, 곧 시작될 격돌을 예감한 양 진영의 기운이 서서히 벼려지기 시작했다.
“점창의 수장이란 자보다 당신들이 더 강하군.”
공지량만을 노려보던 너른 하늘이 그제야 봉검과 운검에게 눈을 돌렸다.
그 강렬한 안광에 흠칫했으나, 두 명의 대장로는 순식간에 평정을 찾았다.
“오히려 우리가 놀랐소이다. 중원을 다 뒤져도 그대 같은 무인, 아니, 전사는 없을 거요. 도저히 일대일로는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구려.”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그리 쉽게 적을 인정해도 되는 건가?”
“힘이 모자란 건 창피한 게 아니요. 맞설 용기가 없는 게 부끄러운 것이지.”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군.”
그믐이 그랬듯, 그것은 봉검이 점창의 제자들에게 전하는 조언이다.
적의 강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하지만 힘이 모자랄지언정 물러서지 말라.
진정 중요한 것은 담대하게 마주쳐갈 용기일지니.
“이익…!”
부끄러운 줄은 아는가.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진 건 공지량 한 명뿐이었다.
“또 한 가지. 이건 비무가 아니라 전쟁이요. 개인의 힘이 아무리 출중하다한들 집단의 힘을 이길 순 없는 법이지.”
또한, 승리의 길을 제시한다.
생각지도 못한 무력을 마주했지만 위축되지 말라.
승기는 우리에게 있을지니.
공지량처럼 소리 높여 떠들 필요가 없다.
전장의 흐름을 타고 자연스레 사기를 가다듬는 것.
과연 점창의 영명을 거머쥔 대장로다운 관록이었다.
“말로는 못 당하겠군. 준비하라. 들어갈 테니.”
넘실대던 격노는 차가운 이성 밑에 가라앉았다.
전장에서 감정에 몸을 맡기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는 법.
들끓는 분노를 터뜨릴 시점은 지금이 아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사기를 가다듬은 양측의 수장들이 눈빛을 빛냈다.
“우둔한 땅. 선봉을 맡긴다.”
“오오오오오!”
기골이 장대한 와족 전사들 사이에서도 한눈에 띄는 팔 척 거한이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도무지 인간이라 볼 수 없는 덩치와 태산 같은 기운.
점창의 제자들이 눈을 비비며 포효하는 우둔한 땅을 내려다봤다.
쿵! 쿵!
“빠오오오오!”
지축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거수가 호위하듯 따라붙었다.
고대 설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코끼리는 옆에 선 인간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우리는 전사들의 방패요, 도끼다! 적들의 최전선, 우리가 부순다!”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이다.
치졸한 암습과 비열한 술책에 수많은 형제들이 쓰러졌다.
가눌 데 없는 분노를 누르며 여기까지 왔고, 달려나갈 순간만을 기다렸다!
우둔한 땅의 함성이 전사들의 예열된 투지에 불꽃을 점화했다.
“바위 곰, 돌격한다!”
“우오오오오!”
곰, 호랑이, 멧돼지, 코끼리, 물소…!
암습과 연이은 전투를 거치며 고작 육십을 조금 넘는 인원이 남았을 뿐이지만, 이들은 정예 중의 정예다.
더군다나 육탄 돌격에 특화된 거수들은 같잖은 검진 따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다.
육십 명의 거한과 그만큼의 야수들이 굉음을 흩뿌리며 치닫는 광경은, 마치 산사태가 산을 거꾸로 밀어 올리는 것만 같았다.
“매서운 눈. 바로 따라붙어라.”
“네. 족장님.”
바위 곰만 따로 떼어 보낼 리 없다.
수적 열세에 있는 이상 공고한 연계가 필수적이고, 그믐에 의해 다듬어진 진형은 와족 전사들에게 체화된 지 오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매서운 눈이 전사들을 돌아봤다.
“나무표범! 우린 창이다! 우둔한 놈이 격돌하는 순간, 허공을 날아 적들을 파고든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걱정 마십쇼! 부 족장!”
“간다!”
쒜에엑- 쒜엑―!
표범, 늑대, 오소리, 여우, 삵…….
주로 날렵한 몸놀림에 특화된 야수들이 칠십여 명 남은 벗들의 뒤를 따랐다.
“할아범.”
“오냐.”
뒷짐을 지고 있던 그믐도 손을 풀며 명령을 내렸다.
“우린 비수다. 삼십씩 나뉘어 전사들의 좌우를 받쳐라. 이십 명은 나와 함께 눈깔의 뒤를 바짝 따른다. 전사들 사이사이의 빈틈을 메우고, 적의 급소를 찔러라. 가자!”
동쪽 하늘에 떠오른 해가 기울어진 음영을 드리운다.
살아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들이 기척을 죽인 채 전사들의 뒤에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