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95화 (95/463)

95화

‘결국은 근접전이다.’

와족 전사들이나 점창의 무인들이나 전부 육신과 병장기를 맞대며 싸우는 백병전의 달인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의 양상은 근접전일 수밖에 없으며, 진형의 맞물림과 병력의 진퇴에 의한 전장의 조율이 필수적이었다.

그것은 결국 전장 전체를 지휘하는 수장의 역량이 중요하단 뜻이었다.

홀로 남은 너른 하늘은 비탈을 치달리는 전사들과 적들의 진형을 두 눈에 담았다.

‘지형은 다소 불리하다. 하지만 경사가 얕고, 전사들에게 이 정도의 고저 차는 큰 의미가 없어. 중요한 건 적들의 대응. 어디냐. 네놈들의 주력이 모여 있는 곳이.’

격돌이 벌어진 후에 내달려도 늦지 않다.

일반 전사들과 너른 하늘의 기동력에는 그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중요한 건 적들의 힘이 집중된 진형의 요처를 깨부수는 것.

너른 하늘은 가장 위험한 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 생각이었다.

‘곧 충돌한다.’

적이 위치한 비탈의 중턱.

평탄한 지형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적들의 움직임을 보고, 몸을 날린다.

하지만.

적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냐? 왜 움직이지 않지?’

“크헝!”

“뿌오오!”

“샤아악!”

“음?!”

반려수들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점창의 진형을 노려보던 너른 하늘의 눈길을 끌어내렸다.

시야가 열린 탁 트인 땅.

맹렬한 기세로 비탈을 치닫던 야수들이 땅 위로 나뒹군다.

“크어엉!”

“시아아아!”

네발 달린 짐승들은 발바닥을, 뱀과 같이 몸으로 기는 동물들은 몸통의 아래쪽을 뒤집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큭!”

“이게 뭐야?!”

선두에서 달리던 바위 곰 전사들 중에도 발바닥을 움켜쥐며 주저앉는 자들이 속출했다.

“철 가시?!”

송곳처럼 뾰족한 서너 개의 발을 가진 쇠못들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다.

철질려(鐵蒺藜)다.

본디 남가새의 열매를 가리키는 질려는 먼 옛날, 춘추전국시대에 적군의 기동을 방해하기 위해 등장한 도구였다.

당시에는 자연 상태의 질려를 그대로 뿌리기도 했으나, 전란을 거듭하며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통짜 쇠로 된 철질려가 고안되기에 이르렀다.

건장한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쇠뭉치에 날카로운 쇠못이 여러 개 박힌 그것은, 와족 전사들의 눈길을 끌지 않기 위해 흙색의 염료까지 칠해져 있었다.

단단한 피부를 지닌 반려수들이지만, 육중한 무게가 독이 되어 발바닥이 꿰뚫리는 참사를 피하지 못했고, 땅 위로 쓰러지며 몸통에 철 가시가 박힌 야수들이 울부짖었다.

“전원, 멈춘다!”

우둔한 땅이 황급히 전사들의 돌진을 멈춰 세웠다.

당연히 육체와 육체로 맞붙는 백병전을 예상했다.

전투를 위해 단련해온 놈들이 이 무슨 치졸한 짓이란 말인가!

바위 곰 고위전사 거친 모래가 울분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이 비겁한 놈들이…! 네놈들이 그러고도 전사란 말이냐!”

대답은 저 멀리 점창 진영의 끝자락에서 들려왔다.

비릿한 미소가 동반된 비웃음이었다.

“북방 초원의 말 탄 오랑캐 놈들을 상대로 그 효용성을 입증한 병기다. 문명의 이기라고나 할까? 벌거벗고 다니는 야만인 놈들과 정직하게 칼을 맞댈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너른 하늘의 기세에 밀려 합죽이가 됐던 공지량이다.

하지만 전투에 돌입한 이상 지휘권은 그에게 있었고, 이죽대며 다시 전면으로 나섰다.

봉검과 운검은 물론이거니와 상당수의 무인들이 군용 병기의 사용을 탐탁치 않아 했지만, 말릴 방법은 없었다.

아군의 피해 최소화와 전쟁의 승리라는 무적의 명분을 부정할 논리 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끝인 줄 아느냐? 내 오늘 너희 미개한 것들에게 문명인의 전쟁이 무엇인지 알려주마.”

슥-

들어 올린 오른손은 연계될 공격의 신호다.

찰칵하는 불길한 소리들이 연이어 울리고, 최전방의 점창 무인들이 검이 아닌 무언가를 손에 들었다.

“계획대로 놈들이 멈췄다. 벌집을 만들어줘라!”

“저것! 연노(連弩)?”

와족의 전사들은 몰라도 중원을 오래도록 왕래한 그믐은 안다.

방아쇠를 당기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일반 활의 몇 배에 달하는 연사속도와 관통력을 발휘하는 대인 살상 무기.

그 최초의 족적은 춘추전국시대에 새겨져 있으나, 개인용으로 개량하여 실전부대를 처음 운용한 것은 저 유명한 촉한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라 알려져 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개량을 거듭한 그것은 원거리에서 사람을 죽이는 데 최적화된 살인 도구나 다름없었다.

“화살이 날아온다! 강피를 조이고, 자연기를 둘러쳐라! 맨몸으로 맞으면 치명상을 입는다!”

쩌렁 울리는 그믐의 외침에 바위 곰 전사들이 황급히 급소를 가리며 방어 태세를 갖췄다.

“호오! 연노에 대해 알고 있었나!”

상관없다.

주된 표적은 인간이 아니니까.

연노가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날아올 걸 알고 대비만 한다면, 일류 이상의 무인들은 피하거나 쳐내는 게 가능하다.

그 이상의 무위를 지닌 와족 전사들을 고작 연노 정도로 제압할 순 없었다.

목표는 짐승들.

철질려를 밟고 나뒹구는 반려수들에게 장대비 같은 화살이 퍼부어졌다.

피피핏- 피핏-!

“쿠어어엉!”

“크아앙!”

반려수들의 외피가 질기고 단단하다지만, 자연기로 방어하지 않는 이상 연노의 관통력을 온전히 막아내는 건 힘들다.

공격을 인지하고 근육이라도 조였다면 모를까.

고통에 힘겨워하던 반려수들 중 상당수가 내리꽂히는 화살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키익…!”

“카아앙!”

제아무리 강인한 야수들이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다.

늦게나마 위험을 감지하고 방어에 나선 녀석들은 부상에 그쳤지만, 시기를 놓친 반려수들은 고슴도치가 되어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크윽!”

“헉!”

바위 곰 전사 몇몇이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잎의 노래가 그랬듯, 혼으로 이어진 벗의 죽음은 반려수를 잃은 전사에게 막대한 심적 타격을 안겨 주었다.

죽음이 반려수를 삼킨 순간, 벗이 느껴야 했던 고통과 공포, 한 맺힌 절규가 온전히 전사에게 전이되었다.

그것은 반려 관계로 지낸 세월이 길수록, 그리고 반려수가 전사에게 자연기를 의존하는 정도가 클수록 격렬한 반응으로 나타났다.

‘이것 봐라?’

놓칠 리 없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지만, 별다른 공격을 받지 않은 야만인 전사 몇몇이 짐승의 죽음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이런 약점이 존재하다니!’

공지량의 얼굴은 뜻밖의 횡재를 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30년 전 와족과의 전쟁에 참전했지만, 그땐 너무 어렸다.

찰나에 생사가 오고가는 전장에서 적의 상태를 살필 여력도 없었고, 눈앞의 야만인이 갑자기 휘청였다 해도 그걸 짐승의 죽음과 연결 짓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렇게 거리를 두고 관찰하니 보인다.

확실하다.

반려수라는 짐승을 죽이면, 야만인 놈들이 타격을 받는 게 틀림없었다.

‘카하하하! 이 전쟁, 이겼다!’

철질려와 연노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황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했고, 막대한 돈이 들어갔지만 그만한 값어치를 했다.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가상의 단체를 만드는 귀찮음까지 감수하며 흑상과 접촉한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연노의 장전을 서둘러라! 모든 화살을 짐승들에게 퍼붓는다! 제 2파, 발사 준비!”

고된 난전을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이길 수도 있겠다.

희희낙락한 공지량이 두 번째 화살비를 쏟아내려는 찰나, 전황을 지켜보던 너른 하늘이 움직였다.

‘땅에 수북이 박힌 장애물부터 걷어낸다!’

저 철 가시가 가장 시급하다.

넘실대는 기운에서 적들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건 알겠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근접 힘 싸움에 접어들면 얼마든지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전사들이 적들에게 달려들 수 있는 길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이 전장에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첫 번째 과제였다.

“할아범! 우둔한 땅!”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두 번째 화살이 날아오기 전에!

너른 하늘의 우렁찬 목소리가 전장에 메아리쳤다.

“……?!”

지명된 두 남자가 힐끗 뒤를 돌아봤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날아드는 족장의 눈!

무슨 말인지 알겠다.

빛살 같은 속도로 치고 나간 그믐이 너른 하늘과 보조를 맞추고, 진형의 선두로 나선 두 남자가 우둔한 땅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믐, 너른 하늘, 그리고 우둔한 땅.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선 세 남자의 오른발이 하늘로 번쩍 들렸다.

“오오오오!”

“카합!”

전력을 다해 내리찍는 진각이다.

각자가 맡은 전방의 영역은 물론이고 부채꼴로 중첩하여 자연기를 퍼뜨린다.

천제(天帝)의 무구를 담당하는 하늘의 대장장이가 휘두른 망치처럼.

세 남자가 펼친 뿌리 내리기의 수평 응용이 대지에 작렬했다.

꽈과과광―!

요동치는 지면.

아래로 꺼질 듯 내려앉는 산비탈은 착시인가, 현실인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광범위한 지역에 뿌려놓은,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철질려가 모조리 허공으로 솟구쳤다.

“어둔 날개!”

“삐이익―!”

반백년을 함께 한 벗의 부름에, 창공을 배회하던 거조가 내리꽂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남자의 뒤에 도달한 잿빛의 올빼미가 어둠의 장막을 펼쳤다.

푸화아악―!

차라리 휘두른다는 표현이 맞다.

전방으로 휘저은 날개가 난데없는 돌풍을 일으키고, 자연기의 잔향이 섞인 회오리바람이 허공에 뜬 철질려를 적들에게 되돌려 보냈다.

연노?

까불지 마라.

조잡한 이쑤시개 따위로 어딜 감히!

무쇠로 된 가시의 폭풍이 멍하게 서 있던 점창의 선두를 덮쳤다.

투퍼퍼퍼퍽!

“크아아악! 내, 내 파아알!”

“히이익! 내장이…!”

“안 돼애애! 사제! 머리, 머리가…!”

아비규환이다.

거리를 둔 채 와족의 전사들을 사냥하려던 점창의 제자들이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매서운 눈!”

“압니다!”

위기를 반전시켜 공세의 기회로 전환한 지금!

두고 볼 리 없다.

곧바로 들이친다.

너른 하늘이 말하기도 전에 매서운 눈이 이끄는 나무표범 전사들은 이미 적들에게 짓쳐가고 있었다.

“푸른 눈!”

“커헝!”

동녘의 여명을 부끄럽게 만들 푸른 불꽃이 타오른다.

너른 하늘의 옆에 선 황색의 영수가 위엄 어린 이빨을 드러냈다.

“나무표범을 지원한다! 지금!”

『우오오오오!』

“크허허허헝!”

그것은 차라리 천지를 뒤흔드는 천하 최강의 음공(音功)에 가깝다.

맞붙기 전 적들의 기세를 짓누르고, 심신을 압박하는 전투 함성!

심지어 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전사와 먹이사슬 정점에 군림하는 맹수의 합격이다.

언령에 실은 전사의 함성과 울부짖는 맹수의 포효.

최전선에 포진한 적들이 입과 코에서 피를 뿜으며 무너져 내렸다.

2열과 3열을 구성한 무인들마저 검을 놓친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부들부들 떨 뿐이다.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적들의 전열을 향해.

와족의 적을 꿰뚫을 대지의 창이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푸콰캉!

“커억!”

“크아아아악!”

검, 도, 창, 활.

살상력을 높이기 위한 철제 병장기들.

그따위 것을 쓸 이유가 무어냐.

육신의 모든 부위가 곧 무기다.

내지른 발이 복부를 꿰뚫고, 휘두른 주먹이 갈비뼈를 분쇄한다.

꺾어 친 팔꿈치에 턱뼈가 으스러지고, 전진하는 어깨가 장기를 내부에서부터 터뜨렸다.

빠르다.

그리고 날카롭다.

매서운 눈을 필두로 한 나무표범 전사들은 연약한 피부를 사정없이 파고드는 송곳과 같았다.

노련한 이, 삼대 제자들로 구성된 견고한 방벽이건만.

점창파 최전선 일각이 허물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무력의 수준이 다르다!’

전선 중앙에 위치한 봉검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제자들이 약한 게 아니야. 와족의 전사들이 터무니없이 강하다.’

고작해야 수십에 불과한 병력이다.

하지만 나무표범 전사들의 돌진은 텅 빈 평원을 내달리는 야생마의 질주와 같았다.

‘더군다나 저 연계.’

전사들은 일격을 꽂아 넣고 스쳐 지나갈 뿐이다.

마무리는 그들의 곁을 달리는 짐승들의 몫이다.

목젖, 눈, 손목의 동맥, 뒤꿈치의 힘줄.

얻어맞은 제자들이 주춤하기가 무섭게 야수의 발톱과 이빨이 치명적인 급소들을 헤집는다.

날카로운 칼바람이 산천초목을 할퀴고 지나가듯 고심해서 배치한 진형이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움직여선 안 된다.’

당장이라도 봉검대를 출격시켜 적들을 막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저들은 주공(主攻)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파괴력이 모자라.’

아군의 포진을 흐트러뜨릴 순 있지만, 저들만으론 진형 자체를 깨부술 수 없다.

무척이나 강한 전사들이지만, 일타 일타에 실린 무게가 묵직하진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절대적인 숫자가 모자랐다.

‘저쪽이 아냐. 이쪽이 진짜다.’

한옆에서 전장을 휘젓는 나무표범 전사들을 지켜보던 봉검의 눈이 정면으로 돌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