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철질려와 연노 때문에 멈춰선 거한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적들의 수장.
예상치 못한 장애물 때문에 본대의 돌격이 멈췄고, 그 때문에 날쌘 전사들이 먼저 난입한 상황이다.
지금 뛰어든 자들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이목을 끌려는 목적인 게 분명했다.
봉검대와 운검대를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될 일이었다.
‘만약 같이 들어왔다면.’
육십 명의 거한이 내뿜는 저 어마어마한 기파.
뭉클뭉클 번지는 기운은 시선을 강제로 붙잡아둘 정도로 강렬했다.
먼저 난입한 전사들이 나뉘지 않고 이들을 뒷받침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저들은 먼저 달려들었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금은 피부를 뚫고 파죽지세로 전진하고 있지만, 뼈까지 부수기엔 파괴력이 모자라는 자들이다.
머지않아 한계를 드러낼 게 틀림없었다.
‘대기한다.’
봉검이 판단을 마쳤을 때, 아니나 다를까 공지량의 지시가 떨어졌다.
“봉검, 운검대는 자리를 지켜라! 진형에 난입한 적들은 호검대가 막아선다! 적들의 돌격이 주춤하는 즉시 이, 삼대 제자들은 사방을 에워싸고 달려들어라! 놈들이 본대와 합류하지 못하게 철저히 고립시키는 거다!”
‘과연 장문인.’
무력은 다소 아쉬운 감이 있지만, 전황을 읽고 병력을 운용하는 용병술만큼은 단연 발군이다.
봉검과 운검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공지량에게 지휘를 맡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야만족 거한들이 온다! 난입한 적은 신경 쓰지 말고 정면을 주시해라! 준비!”
두두두두―
“오오오오!”
유격대에게 잠시 한 눈이 팔린 사이, 거한들로 구성된 와족의 돌격대가 짓쳐오고 있었다.
중기병의 돌진을 보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는 바위 곰 전사들이다.
지금부터가 진짜 육탄전의 시작이다.
공지량의 목소리가 드넓은 전장을 울렸다.
“지금이다! 당겨라!”
끼이익― 터텅!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최전선에 자리한 삼대 제자들이 땅 밑에 늘어진 줄을 힘차게 잡아 당겼다.
다가드는 바위 곰 전사들의 앞, 땅에 뉘여 있던 무언가가 덜컥 솟아올랐다.
“뭐냐, 이건?!”
통나무 네다섯 개씩을 이어 붙인 장애물이다.
앞부분을 날카롭게 갈아내고, 기울어진 울타리처럼 사선으로 전면을 막아선 그것은 대 기병전에서 적의 예봉을 꺾기 위한 도구다.
급정지가 불가능한 말이라면 그 끝에 꿰이거나 충돌하여 날아올랐을 터.
허나 철질려와 연노에 당하고 경각심을 있는 대로 끌어올린 전사들이 그런 장난감에 당할 리 만무했다.
“온갖 너절한 짓은 골라서 하는구나!”
콰카캉!
거친 모래의 고함과 함께 바위 곰 전사들이 통나무들을 일격에 분질렀다.
‘됐어!’
뚫어져라 전장을 주시하던 공지량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적들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 설치한 장애물이 아니다.
30년 전, 바위 곰 전사들의 무지막지한 돌격을 기억하는 공지량은 그들의 돌진력을 경감시키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궁리했고, 통나무 장애물은 그 일환일 뿐이었다.
‘가속도는 제거했다!’
먼 곳에서부터 달려와 강인한 육체를 내던지는 돌격.
그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가속도다.
속도를 등에 업은 바위 곰 전사들과의 첫 격돌에서, 백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던 끔찍했던 기억을 공지량은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따위 조잡한 장애물을!”
거친 모래가 코웃음을 쳤다.
이런 건 아무 의미 없는 짓거리다.
내달려온 속도를 살릴 수 없다?
그게 무슨 상관이랴.
순수한 힘으로 깨부수면 그만인 것을.
충돌의 순간, 그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준비한 잔재주는 다 꺼낸 거냐?! 그럼 싹 다 뒈져라!”
꿀꺽.
앞에서 보니 더욱 엄청나다.
머리 한 개는 큰 키와 장정 두 명을 이어붙인 듯한 덩치.
바위 곰 전사들을 정면에서 마주한 점창의 제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오오오오!”
초격은 역시나 힘을 있는 대로 그러모은 필살의 강격으로 간다.
공격을 받은 놈들은 그대로 으깨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바위 부수기, 거목 쪼개기, 산 허물기.
바위 곰 특유의 막강한 기예들이 화염을 토했다.
“지금이다! 들어 올려라!”
언제 명령이 떨어질지 조마조마했다.
바짝 긴장한 채 대기하던 점창의 제자들이 황급히 무언가를 들어 올려 전면을 가렸다.
푸콰캉!
콰캉!
까가가강!
“이게 웬?!”
줄지어 늘어선 그것은 강철로 주조한 대형 사각 방패였다.
3인 1조.
한 명은 방패에, 두 명은 몸 전체에 내공을 흘려 넣어 단단히 버티고 선다.
혼자서는 막아낼 수 없는 바위 곰 전사들의 맹격이 강철로 된 방벽에 모조리 가로막혔다.
“장창조, 거창(擧槍)! 찔러랏!”
푸슛! 피핏! 푸슈슉!
“크윽!”
“아아악!”
1열이 방패라면, 2열은 장창이다.
야생곡에서 벌어진 코끼리 무리와의 전투, 그리고 삼대 제자들의 암습.
은밀히 지켜봤던 응목대에 의해 바위 곰 전사들의 전투 방식은 낱낱이 보고되었다.
거한들은 맞설 엄두가 나지 않는 강격을 쏟아내지만, 그만큼 힘을 쓴 직후의 빈틈이 크다.
초격을 어떻게든 막아내면 쑤시고 들어갈 틈이 생기는 것이다.
공지량이 머릿속에서 구상해온 전략을, 소모전으로 내던진 삼대 제자들이 목숨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와족을 잡기 위한 공지량의 준비는 실로 치밀했다.
피핏! 푸슈슉! 푸악!
“으으윽!”
“커흑!”
통짜 쇠로 된 방패와 혼신의 힘을 다해 버티는 세 명의 무인.
그리고 빈틈을 찔러 들어오는 장창.
모든 공격과 방어를 맨몸으로 수행해야 하는 바위 곰 전사들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크하하! 이것이 바로 북방 오랑캐 놈들을 잡기 위해 고안된 대 기병전술이니라!”
경기병 중심으로 움직이며 말 위에서 궁사로 적들을 유린하는 게 몽골 기병의 주 전술이지만, 그들도 정면 힘 싸움을 위한 돌격대는 존재한다.
공지량이 준비한 것은 과거 한족의 보병대가 몽골 기마대와 맞붙으며 갈고 닦은 대 기병 전술의 정화였다.
철질려, 연노, 대 기병용 장애물, 방패, 그리고 장창.
이쯤 되면 이건 무림 문파의 싸움이 아니다.
지난 십 년, 공지량이 준비해온 건 애초부터 싸움이 아닌 ‘전쟁’이었다.
“앞에, 비킨다.”
“……?!”
묵직한 음성이 전장에 깔렸다.
처음으로 마주한 적들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는 바위 곰 전사들을 헤치며, 거인이 앞으로 나섰다.
바위 곰 전사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우둔한 땅이 눈 아래 늘어선 철의 방벽을 내려다봤다.
“너희들, 전사가 아니다.”
이런 건 전사의 싸움이 아니다.
육신과 육신이 맞부딪히며 피워내는 열기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요, 전사의 증명이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우둔한 땅.
그의 눈에 떠오른 건 완연한 경멸이었다.
“방패. 아예 성을 쌓아놓지 그랬나.”
스르륵-
굳게 디딘 오른발이 좌측으로 회전하고, 휘돌린 몸통을 따라 널따란 등판이 적들을 향한다.
휘아아악―!
그가 발 디딘 대지 위로 일대의 공기가 압축되듯 빨려들었다.
웅혼한 자연기가 중첩되어 맺히니, 그것은 대지에 내리꽂히는 하늘의 분노라.
“천둥바위.”
쿠콰콰콰쾅!
강철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간다.
흐드러지게 대기를 수놓는 것은 피를 머금은 인간의 육편이니, 인세에 강림한 지옥도가 여기에 있었다.
“카아아악!”
“으, 으아아아!”
힘에 대한 절대적인 맹신.
뭘 가져오든 그 이상의 힘으로 뭉개버리면 그만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분쇄하며 길을 연다.
거인, 우둔한 땅이 허리를 세웠다.
“긴 코, 길을 열어라.”
“뿌오오오!”
화탄이라도 폭발한 것처럼 둥글게 터져나간 전선의 우측.
거수가 햇빛을 가렸다.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덮쳐오는 악몽일지니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두 줄기 기둥이 강철의 방벽을 통째로 짓이겼다.
쿠아아앙!
막을 수 없는 힘이다.
찌부러진 방패 밑으로 폭죽이 터지듯 새빨간 선혈이 대지를 물들였다.
“들어간다. 바위 곰.”
“우오오오!”
일순간에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힘이다.
우둔한 땅과 긴 코가 나서자 금성철벽 같던 강철의 울타리는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장문인! 명령을!」
너무도 강대한 적이다.
고르고 고른 정예라 하나 이, 삼대 제자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지금 당장 나서지 않으면 피해가 가중될 뿐이다.
봉검대의 출격 명령을 받기 위해 봉검이 고개를 돌렸으나, 공지량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최전선의 제자들은 저 거인과 코끼리에게 달려들어라!”
‘병력을 물리는 게 아니라?! 대체 무슨 생각을…!’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지시인가!
저런 괴물들 앞에 일반 제자들을 내세우는 건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저들을 막기 위해 봉검대와 운검대를 대기시켰던 게 아니었나?
왜 나서지 말라는 것이냐!
압도적인 힘 앞에 이성이 마비된 제자들은 뒤에서 떠밀리다시피 하며 우둔한 땅과 긴 코에게 달려들었다.
방패의 울타리가 깨진 곳은 둘이 위치한 곳뿐이었고, 구멍 난 둑으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와족의 전사들이 밀려들었다.
우둔한 땅과 긴 코를 중심으로 발 디딜 틈도 없는 난전이 벌어졌다.
「장문인! 무슨 생각인 것이오!」
이런 건 사전에 이야기한 상황이 아니다.
제자들의 무의미한 희생에 봉검이 눈을 부릅떴을 때, 공지량의 손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준비.”
끼리릭!
불쾌한 마찰음이 울려 퍼지고,
“쏴라.”
퀘에에엑―!
소름 끼치는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퍼퍼퍼억!
크게 흔들리는 육체.
정지한 듯 시간이 흐르고…….
거인과 거수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부 족장! 긴 코!”
거친 모래의 외침이 전장을 갈랐다.
“우둔한 땅! 괜찮은 거냐!”
바위 곰 전사들의 뒤를 받치던 그믐도 크게 놀라 소리쳤다.
옆구리를 감싸 쥔 채 한쪽 무릎을 꿇은 거인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거친… 모래. 할아범. 괜찮…소.”
우둔한 땅의 얼굴은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괜찮다 말하지만, 그럴 리 없다.
사람의 팔뚝만큼 두꺼운 화살대와 날카롭게 벼려진 철촉(鐵鏃)이 옆구리와 어깨를 관통했으니까.
“저건… 상노(床弩)!”
그믐의 부릅뜬 눈이 공지량 뒤에 늘어선 열 기의 커다란 병기를 향했다.
연노와 달리 연사속도를 버리고 오직 파괴력에 집중한 활이 상노다.
평상 위에 얹은 대형 활에서 기계장치를 통해 화살을 날리는 그것은 대인살상용이라기보다는 공성용 병기에 가까웠다.
한 기당 응목대원 세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운용 가능한 상노는 벌써 다음 사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대체…!’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전장에서나 쓰일 법한 군용 병기들이 줄줄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30년 전의 점창은 일신에 지닌 무력으로 승부하는 자들이었고,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줄만 알았다.
그믐조차 서적과 이야기로만 접했던 병기들.
미지의 병기에 무방비로 노출된 전사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크흐흐!”
공지량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전장은 철저히 자신의 뜻대로 흐르고 있었다.
설마 철질려를 되돌려 보낼 줄은 몰랐지만, 적들의 발을 묶으면 날랜 전사들이 단독 침투를 시도하리라 예상했다.
진형 깊숙이 그들을 끌어들여 고립시키고, 거한들과의 연계를 막는다.
거한들과의 첫 충돌 시, 방패와 장창으로 적들의 예봉을 꺾으면 수장급이 튀어나올 줄 알았다.
부분적으로 방진에 구멍이 뚫릴 것이고, 그곳으로 적들이 몰려들어올 거다.
그러면 이, 삼대제자들을 마주 돌격시켜 적장이 움직일 공간을 틀어막는다.
방벽을 뚫어낸 적장이 눈앞의 싸움에 집중할 때.
고지대의 이점을 살려서 숨겨놓았던 상노로 저격한다.
직접 맞붙으면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할 수장급 한 명을 원거리에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멋들어지게 들어맞은 전략이었다.
‘자, 그럼 다음은.’
저들은 숨겨놓은 수가 없다.
단순무식한 야만인 놈들은 정직하게 힘으로 돌파를 시도할 거다.
필연적으로.
전장을 지휘해야 할 ‘그자’가 앞으로 나온다.
「이제 족장이 튀어나올 겁니다. 장로님들, 봉검대와 운검대를 움직이십시오.」